■ 보학 1744

김홍익 정려문(金弘翼 旌閭門)

■ 김홍익 정려문(金弘翼 旌閭門) [소재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유적현황] 유계리 안다리 마을 입구에 있다. 정려는 방형의 시멘트 기단 위에 세운 정면·측면 1칸의건물이다. 초석은 8각 주초석이고 그 위에 원기둥을 올렸 다. 앞과 옆 중앙 윗쪽은 홍살로 처리했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에 초익공 양식의 건물이다. 김홍익은 병자호란 때 전사한 충신으로 김홍욱은 그의 형이다. ▲김홍익 충신문 안내판 ▲김홍익 충신 정려문(金弘翼忠臣旌閭門) ▲충신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시충민공행통훈대부연산현감 김홍익지문 (忠臣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諡忠愍公行通訓大夫連山縣監 金弘翼之門) ----------------------------------------------------..

김방경 묘지명(金方慶墓誌銘)/이진(李瑱) 찬(撰)

■ 고려국 상락공 묘지명(高麗國上洛公墓誌銘) - 이진(李瑱) (구 안동김씨) 대저 천하를 통틀어 언제나 존중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덕(德)이 하나이고, 나이[齒]가 하나이고, 작(爵)이 하나이다. 군자가 세상을 살면서 그 중 하나나 둘을 얻는 것도 오히려 힘들거니와 하물며 셋을 얻겠는가. 그 셋을 얻어서 빠진 것이 없는 이는 오직 우리 상락공 뿐이다. 공의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방경(方慶)으로, 영가군(永嘉郡-안동의 고려시대 이름)사람이다. 증조 의화(義和)는 사호(司戶)였으나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掌冶署丞 兼 直史館) 민성(敏誠)으로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銀靑光祿大夫 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

병자년 순절인에게 치제하라.

■ 고종 13년 병자(1876, 광서 2) 3월 25일(정사) 순묘조 병자년 순절한 신하들의 원우 등에 영묘가 병자년에 보답한 예에 따라 치제할 것인지를 묻는 예조의 계. ○ 예조가 아뢰기를, “전교하시기를, ‘오늘 북원 망배례 때에 풍천(風泉)의 감회와 강한(江漢)의 감상으로 나의 개탄스러운 마음이 평년보다 배나 되었다. 아아, 병자년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때 충신과 열사로 항의하여 척화(斥和)한 자들도 있었고 살신성인하는 자도 있었으며, 뜻을 잃고 자정(自靖)하는 자들도 있어 우뚝이 높이 솟아 영원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인륜이 이로 말미암아 부식되었고 국맥이 이에 힘입어 유지될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신하들의 공이다. 그 해의 갑자(甲子)가 다시 돌아왔으니, 열성조가 세..

贈吏曹判書金公[弘翼] 謚狀

■ 贈吏曹判書金公謚狀 이민보(李敏輔) 撰 公諱弘翼。字翼之。自號默齋。慶州之金。系出新羅。遠祖諱仁琯。高麗太師。至諱自粹。號桑村。官都觀察使。麗亡引義自靖。不受我朝官。有諱良秀。公州判官。諱堧。安州牧使。於公爲高祖曾祖。祖諱好尹。贈左承旨。考諱積。平陵道察訪。贈吏曹參判。見光海政亂。屛居不復仕。妣和順崔氏。左尹遠女也。公以萬曆辛巳生。早治功令之業。文名籍甚。吾先祖月沙公每當試榜之出。先問公得失。其爲先輩之所推重如此。又其儕友或指爲瑞獜仙鶴。或詡以淸氷寒露。見於文字間。至今傳之。癸丑。登司馬。仁祖甲子。設公州道科。公初與焉。會上命取本州人。故公遂被黜。前後凡中八解而竟不第。一世無不嘆惜焉。其年除義禁府都事不就。戊辰。復拜遷掌樂院直長。陞司憲府監察。壬申。由工曹佐郞出監連山縣。居五年治績大著。邑人立碑訟之。又以淸簡愛民。一境晏然。載諸本縣誌。丙子冬。北虜猝至。上幸南漢。命徵三南兵。忠淸..

縣監贈判書金弘翼公墓誌銘

■縣監贈判書金公墓誌銘 유언호(兪彦鎬) 撰 自古忠臣烈士。爲國家見危授命。其人豈必受國厚恩官位高顯哉。彼官高矣。一朝臨禍難。或賣國遺君。不然則雉兎逃。而誠忠坌涌。勇於一死。自盡天性者。往往出於人主不識何狀之中。如金公弘翼。身未甞登朝。官不過監縣。而從主帥。任事在軍。將逸矣師潰矣而不去。獨挺身力戰而死。豈不偉哉。公慶州人。字翼之。號默齋。宣祖辛巳生。中癸丑生員。筮仕義禁府都事,掌樂院直長,司憲府監察,工曹佐郞,連山縣監。爲連山五年而値丙子之亂。虜圍南漢。上命徵三南兵。忠淸監司鄭世䂓檄守令。領兵赴期。守令望風逃匿。莫有至者。時公父母年皆七十餘。在瑞山。弟文貞公弘郁。以翰林從上於圍中。公慷慨泣曰。吾雖有父母。君父急。安忍不赴。卽杖劍馳詣世䂓。藍浦縣監李慶善亦至。世䂓兵二千四百。使公掌兵械。慶善主餽餫。遂進兵屯廣州之險川。謀入南漢。時虜伏山上。因天大霧。忽馳下而掩擊之。我軍皆披靡。死者相枕。..

설 제사상의 차림도

↑본 그림은 참고일뿐 가가례(家家禮)란 말이 있듯이, 지방 마다, 문중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 제수 진설법((祭需陳設法) ◇좌동우서(左東右西) : 사람의 왼쪽(조상의 왼쪽이 아님)이 동쪽, 오른쪽은 서쪽. ◇반서갱동(飯西羹東) : 밥은 서쪽(왼쪽) 국은 동쪽(오른쪽)/좌반우갱(左飯右羹) ◇두동미서(頭東尾西) : 물고기의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어동육서(魚東肉西) : 바닷고기는 동쪽, 뭍고기는 서쪽.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조율시이(棗栗枾梨) : 과일의 순서는 왼쪽부터 대추, 밤, 감, 배의 순서로. ◇좌포우혜(左鮑右醯) : 마른고기는 오른쪽 절인 고기는 왼쪽. ◇생동숙서(生東熟西) : 날 것은 동쪽, 익힌 것은 서쪽. ◇건좌습우(乾左濕右) : 마른 ..

고구려(高句麗)의 성씨((姓氏)

■고구려(高句麗)의 성씨((姓氏)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高句麗) 건국(建國) 초기(初期) 인물(人物)의 성씨(姓氏)가 많이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 십 삼권(第十三券)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 주몽(朱蒙)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建國)하고, 고씨(高氏)를 자기 성(姓)으로 하였으며, 건국공신(建國功臣)인 재사(再思)에게는 극씨(克氏)를, 무골(武骨)에게는 중실씨(仲室氏)를, 묵거(墨居)에게는 소실씨(小室氏)를 사성(賜姓)한 기록(記錄)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하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신하(臣下)들에게 성(姓)을 내려 주었다는 극씨(克氏), 중실씨(..

성여완 선생 묘(成汝完先生墓)

■성여완 선생 묘(成汝完先生墓) [생졸년] 1309년(충선왕 1)~1397년(태조 6) ↑소재지>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 2리 산24번지. ↑구 묘비석 ↑근대 새로세운 묘비석 ●성여완(成汝完) 1309~1397댸인 고려후기와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눈 이헌(怡軒).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36년(충숙왕 5)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을 거쳐 군부정랑(軍簿正郞)이 되었다. 이어 상서우승(尙書右丞) 등을 거쳐 전법판사(典法判事)를 지냈다. 그 후 해주(海州)와 충주(忠州)의 목사(牧使)를 지내고 공민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 재임시 신돈(辛旽)이 주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우왕 때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에 오르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책봉..

점필재 김종직 선생 문적 유품 및 종가문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 문적 유품 및 종가문서 / 시호 교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9호. 수적으로는 『필재당후일기(畢齋堂後日記)』가 있다. 이 책은 김종직이 1482년(성종 13) 11월 1일부터 같은 해 12월 25일까지 기록한 승정원 일기로 44장의 행초로 되어 있다. 문서로는 교지류·서찰·분재기·명문·호구단자·점련문기가 있다. 교지류 로는 교·첩지 28장, 녹패(祿牌) 1장, 증직·증시(贈諡)교지 2장, 김종직의 부인·할머니·증조할머니 증직교지(贈職敎旨) 63장, 김종직 후손교지 83장이다. 서찰로는 1468년(세조 14) 김종직의 어머니, 1470년(성종 1) 김종직의 중형, 1483년 김종직의 전(前) 부인의 것이 있다. 분재기는 1509년(중종 4) 김종직의 계배 남평문씨가 친정 부모로부터 받..

경주최부자집

■ 경주 최 부자 ↑둔차(鈍次) : 경주 최 부자의 어리석은 듯이, 드러내지 않는 버금감 부불3대(富不三代),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부와 권력은 고금을 통해서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운법이다. 내가 하는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목표에 미달 되었을 때, 또는 남과 비교하여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내 스스로를 위안 하고자 다산(茶山) 정약용의 시(詩)를 떠 올린다.「물 좋으면 되었지 정자(亭子)까지 좋을 수야 있나?」하며 위안을 삼는 글이다. ●독소(獨笑, 홀로 웃다) - 정약용(丁若鏞) 유율무인식(有粟無人食) : 양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다남필환기(多男必患飢) : 아들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달관필창우(達官必창愚) :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재자무소시(才者無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