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독립운동 26

이상의(李相義)/고령(高靈) 출신 독립운동가

■ 이상의(李相義) 이상의(李相義)는 본관이 성산(星山)으로,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서 태어났다. 일명 이상희(李相羲)라고도 불렸다. 세칭 파리장서사건이라고 하는 제1차 유림단 의거는 서울에서 김창숙(金昌淑)·김정호(金丁鎬)·이중업(李中業)·유준근(柳濬根)·유진태(兪鎭泰)·윤중수(尹中洙) 등의 논의 끝에 시작되었고, 김창숙이 그의 스승 곽종석(郭鍾錫)을 만나면서 급진전되었다. 마침 충청남도 지역에서도 같은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그 지역 유림의 거두인 김복한(金福漢)과 그 계열의 인물들이 합류하면서 두 지역 대표를 비롯하여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다. 독립청원서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의 시해 의도, 그리고 한국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독립의 당위..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직계 후손 확인

■ 유전자 검사 등 거쳐 외증손 등 10명.."독립운동가 끝까지 기억"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국가보훈처는 23일 독립운동가 이석영(1855-1934) 선생의 직계후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석영 선생의 장남인 이규준 선생이 세 딸(온숙·숙온·우숙)을 뒀고, 세 딸의 자녀 중 10명이 생존해 있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대만에 거주하는 이우숙 씨의 대만 호적등기부 등을 분석해 이석영 선생의 직계 후손임을 확인했고, 그와 이석영 선생의 외증손녀라고 주장하는 최광희·김용애 씨가 유전자 검사 결과 '동일 모계'임이 확인돼 역시 후손으로 인정됐다. 보훈처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최광희·김용애 씨의 독립유공자 유족 등록 신청이 발단이 됐다...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기미독립선언서 원문(己未獨立宣言書原文) (3.1독립선언서라고도 합니다) 기미독립선언서 요약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된 장문의 선언서.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라고도 한다. 배운 사람들에게는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국보중의 국보로 취급받는데 3.1독립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문)는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의 공동명의로 발표되었으며, 초안을 쓴 사람은 최남선[1], 대원칙을 세운 사람은 손병희라고 한다. 손병희가 독립선언서를 고쳐 쓰려고 했으나 시일이 얼마 안 남아 대원칙만 썼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단체에서 서로 자기 단체의..

2·8 독립선언서(二八獨立宣言書)

2·8 독립선언서 요약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로서 서두에서 한국은 4,3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여, 한민족의 독립 근거와 그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 침략과 국권 찬탈을 사기와 폭력에 의한 수치스러운 역사였다고 전제하고, 왜 한민족이 그동안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했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또, 일제의 통치 정책을 한민족의 모든 자유를 짓밟고 민족차별과 생존권 박탈을 자행한 고대적 노예 정책이었다고 비난하고, 자유를 위한 조선민족의 투쟁은 앞으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끝으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 국가임을 명시하고 세..

손용우(孫龍祐) - 20대 손혜원 국회의원 아버지

■ 손용우(孫龍祐) 손용우(孫龍祐, 일본식 이름: 天日正雄, 1923년 1월 19일 ~ 1999년 2월 23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무소속 국회의원 손혜원(孫惠園)의 부친이다.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였고 전라남도 함평과 경성부에서 성장한 그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를 계몽하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을 성토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항일운동으로 1940년 일경에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오래전 독립운동 사실이 확인됐으나 광복 후 사회주의 활동이 문제가 돼 2018년에야 독립운동 유공자로 선정돼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받았다. 1982년 이후 1985ㆍ1989ㆍ1991ㆍ2004ㆍ2007년 총 6차례에 걸쳐 보훈신청을 했으나 광복 이후 사회주의 활동(조선공산당 공산청년동맹..

일본 비밀문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배후는 - 안중근의 스승 이상설"

일본 비밀문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배후는 - 안중근의 스승 이상설" [단독]日 비밀문서 "안중근 스승이자 배후는 이상설" 입력 2018.04.20. 03:01 ↑일제강점기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사령관이 작성한 비밀 보고서. 이 기밀 문건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배후를 캐면서 독립 운동가 이상설 선생과의 사상적 교류에 주목했다.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가해자 안응칠(안중근 의사)은 3년 전(1906년) 당시 배일 목적의 교육에 종사하던 이상설을 찾아가 문하생이 됐다.... 이상설은 안응칠이 가장 존숭(尊崇)하는 자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1897∼1910)와 헤이그 특사로 성명회 선언서를 주도했던 이상설 선생(1870∼1917)의 ‘..

2016 평화오디세이 - 중앙일보

평화 오디세이 2016 참가자 릴레이 기고 연해주에서 다시 만난 통일의 꿈 [중앙일보] 입력 2016.11.07 00:25 수정 2016.11.07. 00:59 ↑정의화 제19대 국회의장 간도에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웠던 이상설 선생은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연해주로 들어와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안중근 의사가 ‘동의회’ 단원들과 함께 독립의지를 담아 왼손 무명지를 끊었던 곳은 두만강 근처의 크라스키노였다. 이처럼 러시아 연해주는 중국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민족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 정권은 한인의 강제 이주를 시작한다. 절반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극한의 강제 이주 과정을 이겨낸 이들이 바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이다. 그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