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그때 그시절 55

달동네(1987년)

↑산 위에서의 봉천동 전경 ↑달 동네의 놀이터 ↑1980년초에 지은 연립주택뒤로 달동네가 보인다. 지금은 모두 재개발로 아파트로 변하였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선거 포스터 벼보가 보인다. ↑달동네의 흔한 일상 풍경이다. ↑재 개발로 달동네의 집들이 철거 되어 가고 있다. ↑봉천동에서 제일 높은 산위의 달동네는 눈이오는 겨울에는 물도 안나와 페인트 통으로 만든 물지게로 학 생이 물을 나르고 있다. 그래도 첫눈이 내려서인지 표정이 즐거워 보인다. -1986년 봉천동의 물지게를 진 학생- ↑엿장수 아저씨가 동네 꼬마아이들에게 고장난 시계, 전화기, 구멍난 양은 그릇등을 가지고 오라고 그러면서 엿치 기 놀이를 한다고 바람을 잡는다. ↑아이들이 하나 둘 집에 가서 엿 바꿔먹을 물건을 가져오느라 부산하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역사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역사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역사는 처음 외국계 자본에 의한 조립생산단계(1965∼1970년대), 국내 투자 기업들에 의한 조립 및 개별소자 생산단계(1970년대), 국내 기업들에 의한 일괄 공정 생산단계(1983∼1990년대), 국산 고유 상표에 의한 수출단계(1990년대 전반), 생산체제 고도화 단계(1996년 이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내 반도체 역사의 시작은 1965년 미국 Commy사와 필자도 재직한 국내 고미반도체(주)의 합작에 의한 트랜지스터(Transistor) 생산이 그 효시가 되었다. 1968년 아남산업에 의해 국내 자본에 의해 최초로 반도체 조립산업을 출범시킨 이후, 1970년 금성반도체, 1974년 한국반도체 등이 설립되면서 국내 기업에 의한 반도체..

박정희 대통령의 현대판 미복잠행(微服潛行) 이야기

“이 양반 박정희 닮았네” 박정희 대통령의 현대판 미복잠행(微服潛行) 이야기 2009-08-07 1960년대의 한국 경제를 열정적으로 이끌어간 경제부총리 장기영은 시도 때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하기로 유명했다. 1966년 3월 6일, 일요일에 집에서 쉬고 있던 청와대 정보비서관 권상하에게 전화를 걸어 좀 만나자고 했다. 권상하가 그때의 이야기를 대구사범 동창회보에 공개한 바 있다. (사기회보 제39호) 장기영은 한국일보 사주(社主)이기도 하고, 권상하는 대구일보 기자 출신에다 대통령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이다. 두 사람은 부총리실에서 만났다. 장기영은 한국일보가 조성한 남한강변의 포플러 단지 이야기를 꺼냈다. “대통령께서도 큰 관심을 갖고 계신 사업인데 나무들의 성장이 아주 좋아 한번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