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구려 인물 3

양만춘(楊萬春) 장군

■ 양만춘(楊萬春) 장군 ●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의 성주 그는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 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히고 있다. 어떻든 그는 지금의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소재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난 바 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에 의한 정권장악에도 불구하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

고선지(高仙芝) 장군

■ 고선지(高仙芝) 장군 고선지((高仙芝, 미상~755) 장군은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로 당나라의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 패했다. 755년 안녹산의 난에서 토벌군을 이끌고 수도인 장안을 지켰다. 그러나 전투 중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적문제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로서,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 안서절도사 (安西節度使) 등을 지냈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 《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