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백제사(百濟史) 4

문익점보다 800년 빠른 백제의 면직물

■ 문익점보다 800년 빠른 백제 면직물 문익점보다 800년이나 빠른 국내 최고(最古) 면직물로 드러난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백제시대의 직물입니다.. 이는 2010년 7월 국립부여박물관이 한국전통문화학교와 공동 분석을 실시한 결과 목화에서 뽑을 실로 짠 면직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이 원(元)나라로부터 목화씨를 몰래 붓 두 껑 속에 숨겨 가져와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목화를 재배하게 되었다는 기록을 뒤집는 사료입니다. ↑1999년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한 백제시대 면직물 ↑자체 꼬임이 강한 위사의 모습

백제의 멸망, 그리고 남한산성의 비극

■백제의 멸망, 그리고 남한산성의 비극 역사에 길을 물어도 좋은 것일까. 성공한 역사와 실패한 역사는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절실한 교훈을 주는가!?.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운명적인 역사의 흐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평상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통스런 시대 경험에 맞부딪칠 때, 사람들의 역사 감각은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유년기에 병자호란을 겪은 박세당은 문득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하고 기록한 비문을 읽는다. 그는 거기에서 자기 시대의 운명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발견한다. 이것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하고 공적을 돌에 새겨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부여현 옛 절의 석탑에 있다. 당나라는 요동을 치러 갔다가 이기지 못한 것을 분노하여 ..

백제의 멸망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 <백제문화제>

작성일 : 2009. 10. 27 백제의 멸망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 백제사를 7세기 후반 한반도에서의 멸망 시점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 요동의 건안고성(建安故城)에서 재건한 왕국이 발해에 병합된 8세기 중반 내지 9세기 초반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20일 "당은 보장왕을 수반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을 요동에 거주시켰고, 이 집단이 소(小)고구려의 기원이 됐다. 당이 웅진도독 부여웅을 수반으로 하는 백제 유민 집단을 건안의 고성으로 이주시킨 것도 이와 유사한 사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건안고성에서 존속된 백제 유민 집단도 소백제로서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백제의 멸망시점은 31대 의자왕이 나당군에 항복한 660년으..

<사탁씨 백제를 주무르다>... | 백제 문화재 소식

■ 사탁씨 백제를 주무르다. 최고위직 독점에 왕비 배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는 부여에서 남하한 온조가 세운 까닭에 왕은'부여씨'가 독점했지만 정작 그 나라를 주무른 것은 '사탁씨'였을까? 점점 그런 형국으로 백제사는 빨려드는 중이다.익산 미륵사 석탑을 해체하다가 발견된 백제 무왕시대 사리장엄구에 포함된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 의하면, 이 절은 무왕의 왕후(王后)가 창건했으며, 그 왕후는 좌평(佐平) 사탁적덕(沙탁績德)의 딸이다. 사탁적덕에서 '사탁'은 요즘의 제갈씨(諸葛氏)나 남궁씨(南宮氏)처럼 두 글자를 사용하는 복성(復姓)이며, 적덕(績德)은 이름이다. 이런 명문이 공개되자 종래 무왕의 왕비로 알고 있던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는 어떻게 되느냐고 아쉬워하지만 선화공주를 잃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