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92

농암 이현보 묘갈명(聾巖李賢輔墓誌銘)

聾巖先生墓誌銘 李家煥 撰 公諱賢輔。字棐中。其先永川人。自軍少尹諱軒。始寓居禮安縣。是爲高祖。曾祖義興縣監諱坡。贈兵曹參議。祖通禮門奉禮諱孝孫。贈嘉善大夫吏曹參判。皇考中訓大夫麟蹄縣監諱欽。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皆隱德卑官。委祉于公。妣貞夫人權氏。護軍謙之女。少養于外家金文節公。妣明習母道。配德娠賢。以成化丁亥七月卄九日。生公。是夜有神夢。告參判公曰。積善之家。必有餘慶。寤聞生小男。采其語。小名曰有慶。公少而穎發。弱冠始遊校庠。不煩提諭。日有開益。時金相銓宰宣城。大加器異。登乙卯司馬魁。擧館試。華聞彌播。戊午。登第。辛酉。選入翰苑。進言曰。載筆之任。必書君擧。請近方寸地。詳聞天語。凡時政皆直書不諱。十七年。移司書。尋爲司諫院正言。面陳輔養東宮之方及書筵官不職之事。坐失事體。流安奇驛。自戊午後。燕山滛虐日甚。動輒誅夷。朝紳縮頭。公獨抗辭奮筆。頗挺風栽。於是。追仇盡言。拘詔獄七十日。適..

율곡 이 선생 묘표(栗谷李先生墓表)

[생졸년]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 ~ 1584년(선조 17) ■ 우찬성 증 영의정 시(諡)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묘표 선생은 덕수 이씨(德水李氏)이고 휘(諱)는 이(珥), 자는 숙헌(叔獻)이며 학자들은 율곡(栗谷) 선생이라 일컫는다.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휘 돈수(敦守)가 그 비조(鼻祖)이다. 부친 휘 원수(元秀)는 사헌부 감찰 증 좌찬성이며, 모친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진사(進士) 명화(命和)의 따님으로 영수(英秀)하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다. 병신년(1536, 중종 31) 12월 26일에 강릉(江陵)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을 낳으려는 날 저녁, 꿈속에서 흑룡(黑龍)이 바다에서 뛰어올라 방 안에 들어오더니 아이를 안아서 품속에 ..

경은 이맹전 묘갈명 병서(耕隱李孟專墓碣銘 幷序)

■ 경은 이맹전 묘갈명 병서(耕隱李孟專墓碣銘 幷序) 李象靖 撰 [생졸년] 1392년(태조 1) ~ 1480년(성종 11)/壽88歲 공자가 은(殷)나라에 인자(仁者) 세 사람이 있다고 칭하셨는데, 그중에 죽은 자도 있고 죽지 않은 자도 있었지만 또한 각각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그러나 기자(箕子)는 안에서 그 난리를 만나 자신의 명철함을 감추면서 올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으니, 처신이 가장 어려웠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서 특별히 기자의 명이(明夷)를 말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은(耕隱) 이 선생이 아마도 그 경우에 가까울 것이다. 선생은 휘가 맹전(孟專)이고 자는 백순(伯純)이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예원(藝苑)에 들어가 세종조(世宗朝)에 사간원 정언, 지제교를 역임하였다. 중년에 시사(時事)가 위태..

남명 조식 선생 묘갈명(南冥曺植先生墓碣銘)

■ 남명 조식 선생 묘갈명(南冥曺植先生墓碣銘) 성운(成運) 찬(撰)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본래 크게 드러난 성씨로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많다고 일컬어졌다. 선대에 고려 태조 때 벼슬하여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이 된 휘 서(瑞)라는 이가 있었으니, 덕궁공주(德宮公主)가 그의 어머니이다. 그 후손이 이어져 창성하였고, 휘 은(殷)에 이르러 중랑장(中郞將)이 되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은이 휘 안습(安習)을 낳았으니 성균관 생원이다. 생원이 휘 영(永)을 낳았는데 벼슬하지 않았다. 영의 아들은 휘 언형(彦亨)이니 처음에 재예로 이조 정랑에 선발되었는데, 지조가 꼿꼿하여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고 벼슬은 승문원 판교에 그치고 졸하였다. 그의 부인은 이씨(李氏)이니 충무위(忠武衛) 이국(李菊)의 따님으로, 부..

일두 정여창 선생 묘표명 병서

■ 일두 정여창 선생 묘표명 병서 (一蠹 鄭先生 墓表銘 幷序) 선생은 휘가 여창(汝昌), 자가 백욱(伯勖)이며 하동(河東)이 본관이다. 증조부 지의(之義)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냈고, 조부 복주(復周)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으며, 부친 육을(六乙)은 한성부 좌윤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1450, 세종 32)에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부친께서 의주 통판으로 계실 적에 중국 사신 장녕(張寧)이 명설(名說)을 지어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선생은 통곡하다 죽을 뻔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시체 더미 속에 들어가 부친의 시신을 찾아서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선생은 당시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삼..

서산선생문집 제18권 - 묘갈명(墓碣銘)

서산선생문집 제18권 - 묘갈명(墓碣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년(순조 27) ~ 1899년(고종 36)』 증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성균 생원 야암 선생 김공의 묘갈명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成均生員野庵先生金公墓碣銘-서문 병기) 야암 선생 김공은 휘가 임(㶵)이고 자(字)가 수이(受而)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의성군(義城君) 석(錫)이 수봉(受封)한 조상이다. 그 뒤로 대대로 봉작(封爵)이 이어졌으니, 용비(龍庇)는 태자 첨사(太子詹事), 의(宜)는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태권(台權)은 문예부 좌사윤(文睿府左司尹)을 지냈으니, 모두 고려의 사적에 드러나 있다. 거두(居斗)는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한계(漢啓)는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진산부원군 강맹경의 비음기/묘비명/유허비명

강맹경『姜孟卿, 1410년(태종 10)∼1461년(세조 7)』 -------------------------------------------------------------- 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館,春秋館,集賢殿,書雲館事,世子師,晉山府院君,贈諡文景姜公碑陰記。 愚嘗讀記。至孔子不知防墓所在。殯於五父之衢。問於曼父之母。然後得合葬於防。未嘗不疑其誕妄也。歲戊寅春。謁仲父墓於晉之班野洞。見堂兄文景所記先塋之次于碑陰。一日。謁公請其故。公曰。備忽忘也。夫孝子之於親。不敢斯須違離。天性也。及其歿也。飯於牖下。殯於客位。祖於庭。葬於墓。其禮卽遠。有進而無退。勢也。夫以卽遠之禮。加之天性之親。固已悲矣。由是而至於親盡。親盡則服盡。服盡則情盡。情盡則塗人也。塗人而求無忽忘焉。難矣。是亦可悲也已。吾嘗試與世之人語矣。其田廬贓穫。則必曰此幾..

玉山 李瑀 先生 墓表/玉山傳/祭文/挽詞。

신사임당의 작은 아들이고 율곡 이이의 아우이시다. 軍資監正李公墓表。- 宋時烈 撰。 栗谷先生有弟。曰瑀字季獻。號玉山。嘗居嶺南之善山。善山人稱以四絶。謂其琴書詩畫也。其書法尤妙。嘗於胡麻子書作龜字。又劈豆爲兩片。書五言絶句於其一。而不失其結構趯勒之法。宣祖大王嘗加愛賞。以草訣百韻。手題冊額而賜之。其他錫賚甚多。然其四絶終不能掩其人。故先生亦不稱其才。而稱其人曰。使吾弟從事學問。則吾所不及。中生員初試。補慶基殿參奉。不欲遠離先生。不就。其後氷庫別坐,司僕寺主簿,比安縣監,司憲府監察,尙衣院判官,槐山古阜二郡守。皆其履歷。而以軍資監正終焉。則萬曆己酉五月二十七日也。得年六十八。公在郡縣。不任刑杖。吏民愛戴。比安人秩滿而願借。故居比安凡七年矣。嘗再中庭試。皆以微眚見下。公曰命也。自是不復赴擧。丁憂廬墓。親執滌漑。冬月。手爲皴裂出血。庶母嘗不慈。而猶愍然出涕。公輒縮手袖間。不令見之。故..

일본 유출『금석집첩(金石集帖)』 자료 현황

[해외사료총서 15권] 일본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Ⅲ >일본 京都大學 부속도서관 소장 『金石集帖』 자료 현황. ◈ 凡 例 1. 목록의 작성은 ‘帖數, 一連番號, 名稱, 成立年度’의 순서에 의한다. 2. 一連番號는 각 첩에 수록된 탁본에 고유번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첩수-탁본수록순서’의 형식을 취한다. 단, 선행 탁본에 부속된 탁본이 2점 이상 존재하는 경우에는 고유 번호 뒤에 ‘-1, -2’ 등으로 하위 번호를 준다. 3. 탁본의 명칭은 外題를 기준으로 하되, 명칭이 빠진 것과 순서가 틀린 것은 바로 잡는다. 4. 명칭의 기록 시, 蟲損 등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문자는 □로, 미해독 문자는 #으로 표시한다. 또 동일 인물에 대한 서로 다른 형식의 탁본이 연속되어 있는 경우, ‘/’으로..

서정리 묘갈명/묘표음기/행장。

■ 贈左贊成徐公墓碣銘 [생졸년] 서정리『徐貞履, 1599년(선조 32) ~ 1664년(현종 5)』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 찬(撰) 公諱貞履。字勉中。達城之徐。遠有代序。入本朝。有諱彌性。年十七。魁司馬。官安州牧使。娶權陽村近女。生諱居廣。縣監。卽四佳公居正之兄也。生諱彭召。歷內翰,銓郞。止司憲府掌令。生諱固。禮曹參議。是公之高祖。曾祖諱懈。少有學行早歿。贈領議政。祖諱渻。判中樞。號藥峯。贈領議政。諡忠肅。考諱景霌。尙宣廟貞愼翁主。封達城尉。以萬曆己亥八月十八日生公。癸亥仁祖反正。例授宗廟奉事。不就。甲子成進士。復拜前職。歷官豐儲倉主簿,工曹佐郞,翊衛司司禦,刑曹工曹正郞,司僕軍器寺僉正。外則永春靑陽縣監,義城縣令,淸風郡守,忠原縣監,富平南原豐德府使。享年六十六。葬于長湍都羅山負丑原。都尉公兆次也。前室三陟沈氏。監察諱說之女。未育。繼室慶州李氏。刑曹判曹贈領議政號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