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32

토정 이지함 시장(土亭李之菡諡狀) - 이관명(李觀命)

■ 토정 이지함 시장(土亭李之菡諡狀) - 이관명(李觀命) [생졸년] 1517년(중종 12) ~ 1578년(선조 11) / 향년61歲 [본 관] 한산이씨(韓山李氏) [저 작] 토정비결(土亭祕訣) 선생의 휘(諱)는 지함(之菡)이고, 자는 형중(馨仲)이다. 스스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하였는데 사는 집을 흙으로 쌓아서 정자를 지었기 때문이다.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는데 시호가 문효공(文孝公)이고 호가 가정(稼亭)인 휘 곡(穀)과 시호가 문정공(文靖公)이고 호가 목은(牧隱)인 휘 색(穡) 부자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하여 큰 명성이 있었으니, 가정공은 바로 선생의 7대조이다. 문정공이 휘 종선(種善)을 낳았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성주목사 황준량 행장 - 이황(李滉)

■ 성주목사 황준량 행장 - 이황(李滉) (星州牧使黃俊良行狀) 성주 목사(星州牧使) 황공(黃公)의 휘는 준량(俊良)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며,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 벼슬을 한 유중(裕中)이 그의 먼 조상이다. 시중의 손자 근(瑾)이 공민왕(恭愍王) 때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과 상소(上疏)하여 지진의 변고를 극력 논란하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서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벼슬이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제학공(提學公)이 낳은 휘 유정(有定)은 본조(本朝 조선(朝鮮))에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전서공(典書公)이 낳은 생원(生員) 휘 연(鋋)은 공(公)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전서공이 영천(榮川 경북..

사계 김장생 시장(沙溪金先生諡狀).

가의대부(嘉義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시장(諡狀). 선생의 휘는 장생(長生)이고, 자는 희원(希元)이며, 성은 김씨(金氏)인데, 학자들이 사계 선생이라 칭한다. 그 선조는 신라에서 나왔다. 신라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도망하여 백성이 되었으므로 자손들이 광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8대가 계속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현달한 사람이 있었다. 휘 문(問)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고, 그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절행(節行)으로 정문(旌門)이 섰는데, 그 사적이 《삼강행..

신독재 김집선생 시장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시장 선생의 휘는 집(集)이고, 자는 사강(士剛)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신라(新羅) 말엽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도망하여 백성이 되었으므로 자손이 광주를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8대가 계속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기 때문에 그 마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벼슬이 계속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문(問)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고, 그 배위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절행(節行)으로 정문(旌門)이 섰는데, 그 사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그로부터 2대를 내려와서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으로 적개 공신(敵愾功臣)과 좌리 ..

김유은 공 행장(金遊隱公行狀) - 밀직공 이창로(李彰路)의 외 손서

金遊隱公行狀 - 송순(宋純) [생졸년] 14?? ~ 14?? 金公諱季甫。彥陽人。太傅平章諡威烈就礪之八世孫。太傅平章諡翼戴佺之七世孫。曾祖。禮儀判書,彥陽君湧輝。屢將重兵有功。■祖。純誠翼戴原從功臣,晉州牧使賞。倭寇晉州。屢捷戰亡。功烈顯著。父。行綾城縣令。贈吏曹參判躍。外祖。開城尹慶州李彰路。文忠公益齋齊賢之子也。公平生之心。正直忠毅。不與貴顯交遊。宣德壬子。以學生登武科。歷事世宗,文宗,端宗。舊本云魯山朝 官至刑曺都官正郞。而世祖元年乙亥。作詩贈同朝諸賢。與冢婦之季父歸來申公末舟。解紱南來。申歸于淳昌。公歸于南原屯山下。癖於漁樵。聾於世事。而於淳子江上。因作小亭。自號遊隱翁。自額鰲戴者。亦有所況。鰲戴三山。而公戴三朝之義。遊斯隱斯。終老江湖。去神仙不遠之意也。公與申公最友善。携酒以詩。間日相從。歸來亭鰲戴亭。苟爲一代之勝地矣。公每當皓月良宵。登斯望北。長嚱感歎。已成恒規。忽..

명곡 최석정 선생 행장

■先考議政府領議政府君行狀[명곡 영의정 최석정 행장] 아들 최창대(崔昌大) 찬 先府君姓崔氏。初諱錫萬。字汝時。後爲翰林。以顯宗小字嫌名。有命改之。改諱錫鼎。字汝和。初號存窩。後號明谷。羅代之始。有六部大人佐之。崔其一也。後世著籍于完山。以高麗上將軍純爵爲始祖。六世而有諱得枰。以選部典書致仕。生諱宰。重大匡完山君。諡文貞。父子皆以廉直孝謹。爲權貴所憚。麗史立傳以紀之。牧隱李公撰文貞墓誌。盛有稱道。生諱有慶。事我太祖。官參贊議政府事。諡平度。以孝旌閭。被廉吏之選。生諱士康。事世宗。官右贊成。兼判吏曹。金宗瑞之開六鎭。實長兵部。參聞籌畫。諡敬節。公之九世祖也。高祖諱秀俊。累贈左贊成。曾祖諱起南。游牛溪成先生門。有重名歷應敎舍人。光海朝。爲羣小所擠。卒官永興大都護府使。累贈領議政。完興府院君。谿谷張文忠公。撰其墓碑。祖諱鳴吉。策靖社元勳。典文衡。領議政完城府院君。諡文忠。文章經術。學士..

하연선생 행장(河演先生行狀)

[생졸년 하연「河演, 1376년(우왕 2) ~ 1453년(단종 1)」 영의정 하연선생 행장(領議政河演先生行狀) 공(公)의 휘(諱)는 연(演)이요, 자는 연량(淵亮)인데 진주사람이다. 젊었을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가 이십일세 되던 병자년(태조 5년/1396)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에 합격하고, 이어 같은 해 문과(文科)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위(6/33)로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되어 예문관수찬 문하주서로써 이조.병조랑에 전직하였다. 그 후 사헌부 장령 집의, 세자 좌우문학(世子左右文學)에 승진하였다. 시를 잘 짓고 읊기를 좋아하여 침식(寢食)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또 글씨를 잘 써서 사대부 중에 시를 요구하는 자가 하 문학(河文學)이 지어서 직접 쓴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한음 이덕형 행장(漢陰李德馨行狀)

■ 한음 이덕형 행장(漢陰李德馨行狀) 이덕형『李德馨, 1561년(명종 16) ~ 1613년(광해군 5)』 지은이 :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덕형(德馨)이며, 자는 명보(明甫)이고 자호(自號)는 한음(漢陰)이다. 족계(族系)가 광주(廣州)에서 나왔는데, 명망이 있는 가문이다. 그 선대 가운데에 이름난 분들이 있으니, 고려 말에 집(集)이라는 분이 있어 문장(文章)과 기절(氣節)로 세상에 크게 이름이 났다. 신돈(辛旽)이 그의 곧음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자, 아버지를 업고 도망쳐 영천(永川) 땅에 숨어 살다가, 신돈이 주벌된 뒤에야 비로소 돌아왔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아주 친하게 지냈다. 지금 《포..

대산 이 선생 시장(大山李先生諡狀)

[생졸년] 이상정「李象靖, 1711년(숙종 37) ~ 1781년(정조 5)」 대산 이 선생 시장(大山李先生諡狀) 류치명(柳致明) 근장(謹狀)。 선생은 휘가 상정(象靖)이고 자가 경문(景文)이며 성은 이씨(李氏)인데 한산인(韓山人)이다. 상대(上代)의 조상 중에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곡(穀)과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색(穡)이 그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고려말엽에 현달(顯達)하였으며, 5대를 내려와서 휘 윤번(允蕃)이 또한 맑은 절개와 올곧은 도(道)로 유명하였다. 그 뒤 2대를 내려와 휘 희백(希伯)이 부사를 지냈으며, 다시 3대를 내려와서 휘 홍조(弘祚)가 현감을 지내고 호를 수은(睡隱)이라고 하였는데, 광해군 때에 안동(安東)으로 피신해 내려와서 외조부인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의 ..

한국(韓國)의 시호(諡號) 탐구

한국(韓國)의 시호(諡號) 탐구 1. 시호란 무엇인가?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한 개인의 상징인 이름(名)을 존중하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이 있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 앞에서나 썼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피휘(避諱) 전통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대신해 자(字), 호(號), 시호(諡號) 등을 썼다. 우리 선조들은 피휘를 지켜 조상이나 군주의 이름과 같은 이름은 절대로 작명하지 않았다. 임금의 본명에 들어가는 글자는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에 사용이 금지됐다. 정조(正祖)의 휘인 산(祘)처럼 대다수 임금들은 왕자의 이름을 지을 때 벽자(僻字)로 지었다. 아예 없는 글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그래야만 피 휘하기 쉽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