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의 성씨((姓氏)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高句麗) 건국(建國) 초기(初期) 인물(人物)의 성씨(姓氏)가 많이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 십 삼권(第十三券)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 주몽(朱蒙)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建國)하고, 고씨(高氏)를 자기 성(姓)으로 하였으며, 건국공신(建國功臣)인 재사(再思)에게는 극씨(克氏)를, 무골(武骨)에게는 중실씨(仲室氏)를, 묵거(墨居)에게는 소실씨(小室氏)를 사성(賜姓)한 기록(記錄)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하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신하(臣下)들에게 성(姓)을 내려 주었다는 극씨(克氏), 중실씨(仲室氏), 소실씨(小室氏) 등과 유리왕(琉璃王)이 사성(賜姓)하였다는 위씨(位氏), 우씨(于氏) 또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사성(賜姓)하였다는 낙씨, 부정씨(負鼎氏), 대실씨(大室氏) 등은 전설(傳說)이라고 하더라도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때 좌보(左輔) 벼슬을 한 을두지(乙豆支)와 우보(右輔) 벼슬을 한 송옥구(松屋句)를 비롯하여
이후 재상급(宰相級)만도 제6대 태조왕(太祖王) 때의 좌보(左輔) 목도루(穆度婁)와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 제8대 신대왕(新大王) 때의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 제10대 산상왕(山上王) 때의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 제11대 동천왕(東川王) 때의 국상(國相) 고우루(高優婁), 명림이수(明臨於漱), 제14대 봉상왕(烽上王)때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 음우(陰友), 창조리(倉祖利),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등등의 이름이 있으며, 또한 왕비(王妃)나 왕모(王母)의 성(姓)으로 예(禮), 송(松), 우(于), 연(緣), 주씨(周氏) 등이 나오고 있다.
결국 고구려(高句麗)에서 쓰인 성(姓 )은 왕실(王室)의 해(解), 고(高)를 비롯하여 을(乙), 송(松), 목(穆), 창, 예(禮), 우(于), 연(緣), 주(周),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의 성(姓)은 후대(後代)의 성(姓)과는 개념(槪念)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중앙(中央) 또는 지방세력(地方勢力) 중에서도 핵(核)을 이루는 유력(有力)한 족장(族長)들의 정치적(政治的) 신분(身分)과 관련(關聯)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中國) ‘한서(漢書)에 나타나 있는 인명(人名)의 기록(記錄)을 보면, 주몽(朱蒙)은 이름만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장수왕(長壽王) 때에 장수왕(長壽王)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記錄)하여 처음으로 고구려(高句麗) 왕실(王室)의 성(姓)을 고씨(高氏)로 기록(記錄)하였으며, 장수왕(長壽王)이 사신(使臣)으로 보낸 고익(高翼), 마루(馬婁), 손수(孫漱), 구(仇), 동등(董騰)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姓)을 사용(使用)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使用)하는 성씨(姓氏) 중에서 고구려(高句麗)에 연원(淵源)을 두는 성씨(姓氏)는 극히 드물다. 고씨(高氏)는 고주몽(高朱蒙)의 후손(後孫)이 강원도(江原道) 횡성지방(橫城地方)에 약간 산재(散在)한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고씨(高氏)는 모두 탐라(耽羅) 고씨계(高氏系)이다.
오직 강씨(姜氏)가 고구려(高句麗)의 장군(將軍)이었다는 강이식(姜以式)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推定)해보면, 고구려(高句麗)는 장수왕(長壽王 413~490)부터, 성(姓)을 쓴 것으로 기록(記錄)에서 고구려(高句麗)의 성씨(姓氏)로는 고(高), 을(乙), 예(禮), 송(松), 목(穆), 간, 주(周), 마(馬), 손(孫), 동(董), 챼,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이 있고, 왕실(王室)의 성(姓)인 고(高)를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참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 고대 씨족공동체 사회에서는 성이란 것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誌) 예전(濊傳)’에 나타나 있는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에 “其俗重山川 山川 名有部分 不得妄相人 同姓不婚 - 그 풍속은 산천을 소중하게 여기며 산천에는 각기 부분이 있어 서로 넘나들거나 상관하지 않으며,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라는 얘기가 있다.
이를 보면 당시 중국인들이 우리 토착사회에서 그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을 보고 일정한 집단을 동성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성을 사용한 나라는 일찍부터 한나라와 접촉해있던 고구려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관계로 중국 문화에 접하는 기회가 많아서 중국의 성씨를 빨리 모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소노부, 계루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등 다섯 부족 연맹인 오부족연맹체로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소노부가 패권을 잡아 맹주의 역할을 하여 왕위를 계승하다가 고구려 건국 시조 동명왕이 계루부에서 나와 세력을 폄으로써 주도권을 빼앗았다.
고구려 임금의 성은 처음에는 해씨(解氏)였다가 제6대왕인 태조왕(太祖王) 이후에는 고씨(高氏)가 왕위를 했다. 태조왕은 그 이전의 왕인 해씨(解氏)와는 계통을 달리하여 졸본부여족(卒本夫餘族)의 방계인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주몽(朱蒙) 〔주몽(朱蒙) 동명왕(東明王)〕의 성을 그대로 소급하여 적은 것으로 보인다. BC 80년경 후한시대(後漢時代)에 완성된 전한(前漢)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의 ‘조선전(朝鮮傳) 〔왕망전(王莽傳)〕을 보면, 동명왕 주몽을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라 기록 하고 있다, 추(騶)는 주몽의 이름으로서 성(姓)이 없었던 셈이다.
AD 265년경 진(晉)나라 초기에 만든 위(魏),촉(蜀), 오(吳)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속에는 “고구려전(高句麗傳)”과 “공손도전(公孫度傳)”이 있다.
그 글을 보면 고구려 제1대왕인 동명왕을 추(騶)로, 제6대 태조왕을 궁(宮)으로, 제7대 차대왕을 수성(遂成)으로, 제8대 신대왕을 백고(伯固)로, 제9대 고국천왕을 이이모(伊夷模)로, 제10대왕 산상왕을 위궁(位宮)이라하여 성(姓)이 없고,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가우거(大加優居), 주부연인 등의 말이 나오는데 “대가(大加)”는 부족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우거(優居)”는 이름, “주부”는 종2품 정도의 벼슬이었고 "연인“은 이름이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이때까지는 성(姓)이 없었고 이름만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AD 487년 제(齊)나라 무제(武帝) 때의 영명5년〔고구려 장수왕 75년〕에 만든 송(宋)의 역사서 “송서(宋書)”에는 장수왕(長壽王)을 고연(高璉)이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 왕(王)의 성(姓)을 고씨(高氏)로 기록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 “송서(宋書)”에는 장수왕이 중국에 보낸 사신의 이름으로 고익(高翼),마루(馬婁), 손수(孫漱), 구(仇), 동등(董謄) 등이 나오는데, 이들의 고(高), 마(馬), 손(孫), 구(仇), 동(董) 등이 모두 성씨(姓氏)이다.
AD 554년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의 천보 5년[고구려 양원왕(陽原王)10년]에 완성된 북위(北魏)의 역사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동명왕을 고주몽(高朱夢)이라 하여 성씨와 이름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그 후 당나라 태종 6년〔고구려 보장왕 5년 〕에 완성된 진(晉)나라의 역사서 “진서(晉書) 사이전 동이조(四夷傳 東夷條)〔 모용전(慕容傳 )〕”에는 고구려 재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쇠(釗), 제22대 안장왕(安藏王)을 안(安)등으로 기록해 놓고 있어 오히려 성(姓)이 없는 이름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옛 기록을 보면 중국의 기록과는 다르다.
1145년 고려 인종23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 인물들의 성씨가 많이 보인다, 동명성왕이 신하들에게 성을 내려 주었다는 극씨(克氏), 중실씨(仲室氏), 소실씨(小室氏)등과 유리왕이 내려주었다는 위씨(位氏), 우씨(于氏), 대무신왕이 내렸다는 낙씨, 부정씨(負鼎氏), 대실씨(大室氏)등으로 사실이 아닌 전설로 치부하더라도 제3대 대무신왕때 좌보(左輔) 벼슬을 한 을두지(乙豆支), 우보(右輔) 벼슬을 한 송옥구(松屋句)가 나와 있고, 또 제6대 태조왕 때의 좌보(左輔) 목도루(穆度婁)와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 제8대 신대왕(新大王) 때의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 제10대 산상왕 때의 국상 고우루(高優婁), 명림어수(明臨於漱), 제14대 봉상왕 때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등과 같은 성씨(姓氏)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이름도 나온다, 또한 왕비나 왕모(王母)의 성(姓)으로는 예(禮), 송(松), 우(于), 연(緣), 주씨(周氏) 등이 눈에 띈다.
한편 “삼국사기”보다 330여년 앞서 편찬된 일본의 성씨록(姓氏錄)에는 일본에 귀화한 백제, 신라, 고구려, 임나(任那) 사람들이 수록되어 있으나 성(姓)을 가진 사람이 없다. 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역사책들, 우리의 삼국사기, 일본의 성씨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모순(矛盾)된 점이 있으므로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장수왕 이전의 성은 뒤에 소급해서 붙인 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고구려의 성(姓)에는 을(乙), 예(禮), 송(松), 목(穆), 우(于), 연(緣), 주(周), 마(馬), 손(孫), 동(董), 예(芮),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무렵의 성(姓)은 후대의 성(姓)과는 개념을 달리 하는 것으로 중앙 또는 지방세력 중에서도 핵을 이루는 유력한 족장들의 정치적 신분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鄭相琪님이 엮은 “2200년 역사와 함께한 동래정씨 이야기”p.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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