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신도비명 17

월파 이재 신도비명. 시장(月坡李栽神道碑銘. 諡狀)

[생졸년] 이재『李栽, 1392년(조선 개국 원년) ~ 1464년(세조 10)』 故禮曹判書月坡李公神道碑銘 - 만구 이종기(晩求 李種杞) 孔子曰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又曰君子不病人之不己知。夫旣不病其不己知。而又疾其名不稱何哉。解之者曰沒世而名不稱。則無爲善之實可知矣。其所疾者。在於無善。而不在於無名也。然苟爲善。名亦隨之。但有久近晦明之殊爾。若故宗伯月坡李公。其亦可謂不求人知。而久而後顯者歟。公諱栽字景培。慶州人。新羅沙梁部大人諱謁平其始祖也。高麗忠烈王世。有諱世基檢校政丞謚文僖。是生諱蒨號菊堂月城府院君謚文孝。是生諱達衷政堂文學號霽亭雞林府院君謚文靖。寔公之曾祖也。大父諱竱。密直副事月城府院君。皇考諱升商。仕本朝吏曹判書雞林君謚恭懿。太宗大王講武海州。聞公卒爲之撤朝減膳。左右諫之。上曰君臣猶父子。雖此草次中。豈獨無恩乎。妣星州李氏。密直副事仁慜女。以洪武壬申生公。世宗..

이종주 신도비명(李宗周神道碑銘)

慶州李氏五世神道碑[李宗周] [생졸년] 이종주『李宗周, 1691년(숙종 17)~1710년(숙종 36) 경산 정원용 찬(經山 鄭元容 撰) 李侍郞裕元。授家狀言曰。吾先祖龜川公墓在振威舞鳳山西麓北一里。岡巒蜿蜒而融結者曰鷹峰。其下爲伽倻谷。有若坊若夏屋者。吾父祖五世聚藏之兆也。謀所以鐫石以銘之。以賁隧道。著之後世。元容肅而作曰賢哉。侍郞也。孝孫之稱述先祖之美者。其比順之道而仁明之所由起也。夫禮者不忘其本。樂者樂其所生。此雅頌彝鼎之義。而太史公又序其家世。後之祠廟墟墓之庭。龜趺而載世德者。經所謂旣美其稱而又美其所爲也。今子有美。其敢辭。乃按狀。東國尙氏閥。最以慶州李氏爲望。始於新羅佐命元臣諱謁平。簪組相繼。麗朝有檢校政丞諱世基。入我朝有諱延孫參判。四世而諱夢亮。右參贊贈領議政謚定獻。生諱恒福。領議政鰲城府院君謚文忠。勳德名節文章。爲宣祖朝宗臣。世稱白沙先生。生諱井男。禮賓寺正。..

이흘 신도비명. 행장.시장(李忔 神道碑銘/行狀/謚狀)

작성일 : 2020. 10. 13(화) [생졸년] 27世 이흘『李忔 1568년(선조 1) ~ 1630년(인조 8)』 [세 계] 국당공후 문정공파 이흘(李忔) 신도비명-최익현/행장- 송시열/시장 – 서유린. 황경원。 본관은 경주. 자는 상중(尙中), 호는 설정(雪汀)·오계(梧溪). 이은신(李殷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흥(李興)이고, 아버지는 부사과 이천일(李天一)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홍염(洪濂)의 딸이다. 15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학유가 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로 왕비를 해주에 호종하였다. 1594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 해 승문원정자·저작·박사 등을 거쳐 전적에 올랐다. 159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지평, 문..

慶州李氏五世神道碑

■慶州李氏五世神道碑-경산 정원용 찬 [생졸년] 이석규『李錫奎, 1758년(영조 34)~1837년(헌종 3) 귤산 이유원 5대조 신도비(평택시 진위면 소재함) 李侍郞裕元。授家狀言曰。吾先祖龜川公墓在振威舞鳳山西麓北一里。岡巒蜿蜒而融結者曰鷹峰。其下爲伽倻谷。有若坊若夏屋者。吾父祖五世聚藏之兆也。謀所以鐫石以銘之。以賁隧道。著之後世。元容肅而作曰賢哉。侍郞也。孝孫之稱述先祖之美者。其比順之道而仁明之所由起也。夫禮者不忘其本。樂者樂其所生。此雅頌彝鼎之義。而太史公又序其家世。後之祠廟墟墓之庭。龜趺而載世德者。經所謂旣美其稱而又美其所爲也。今子有美。其敢辭。乃按狀。東國尙氏閥。最以慶州李氏爲望。始於新羅佐命元臣諱謁平。簪組相繼。麗朝有檢校政丞諱世基。入我朝有諱延孫參判。四世而諱夢亮。右參贊贈領議政謚定獻。生諱恒福。領議政鰲城府院君謚文忠。勳德名節文章。爲宣祖朝宗臣。世稱白沙..

鰲恩君 李敬一 神道碑銘.行狀.謚狀) / 백사공파

■ 議政府左議政致仕諡孝定李公神道碑銘 (의정부좌의정치사시효정이공신도비명) [생졸년] 31世 이경일『李敬一, 1734년(영조 10)~1820년(순조 20) 』 금릉 남공철 찬(金陵 南公轍 撰). 1760(영조 36)∼1840(헌종 6). 上之二十年庚辰正月十八日。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鰲恩君致仕奉朝賀李公諱敬一以疾卒。壽八十七。訃聞。上輟朝敎曰。故相篤至之行。恬靜之操。壽考之祺。求之今日盖亦罕匹。成服日。遣承旨吊祭。仍令有司庀喪如禮。領議政徐龍輔。以公居家篤行白于上。請於葬前議諡。上可之。後又因筵臣言。命竪棹楔。於是太常弘文館議諡曰孝定。禮官卽所居長興坊第。旌以孝子之門。搢紳大夫相與咨嗟歎息以爲公衆善。皆本於孝。而立朝五十年。志操淸苦。論議公平。年至决退。保全終始。比之元祐之完人。可無愧矣。聖朝所以褒寵舊臣者。哀榮俱備。不亦盛哉。公字元..

제정 이달충 신도비명(霽亭李達衷神道碑銘 )

■ 高麗端誠輔理翊贊功臣三重大匡密直提學 鷄林君謚文靖霽亭李公神道碑。 (고려단성보리익찬공신삼중대광밀직제학 계림군시문정제정이공신도비) [생졸년] 이달충『李達衷, 1309년(충선왕 1) ~ 1384년(우왕 10)』 면우 곽종석 찬(俛宇 郭鍾錫 撰) 1846년(헌종 12)~1919년 광주(廣州)의 제릉(齊陵) 북쪽 탄동(炭洞=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과 신흥동에 있었던 지명)에 높직하게 봉분을 만들어, 오백년을 지내면서 행인(行人)까지 바라보고 공경하는 것은 고려말기(高麗末期)에 명신(名臣) 제정선생(霽亭先生) 이공(李公) 휘(諱) 달충(達衷) 자(字)는 중권(中權)의 묘소이다. 그 후손(後孫)들이 장차 신도비(神道碑)를 세워서 오는 세상(世上)에 고하고자 하여 종석(鍾錫)에게 명(銘)을 청한다. 가만히 생각해보..

梧川 李宗城 賜祭文[英祖]. 墓誌. 神道碑銘. 告墓文.

■ 문충공(文忠公) 이종성(李宗城)에게 시호를 내리는 날에 치제한 글 - 정조대왕 [생졸년] 이종성『李宗城, 1692년(숙종 18) ~ 1759년(영조 35)』 나라를 염려하여 가정을 잊음을 / 慮國忘家。 시호를 내리는 법에 충이라 하니 / 書法曰忠。 시호를 내린 후 마음에 흡족한 것은 / 而後允愜。 사사로이 하지 않고 공정했기 때문일세 / 匪私伊公。 상세히 말하고자 할진대 / 所欲詳者。 내 가슴이 막히고 목이 메임을 어이하리 / 奈予摧咽。 당에서는 한 조각 마음을 열어젖히고 / 堂披寸腔。 대에서는 괴로운 피를 쏟았네 / 臺瀝苦血。 중간의 한 가지 일은 / 中間一著。 오직 신만이 아는 것이니 / 獨許神知。 석 달 동안의 교거는 / 三月郊居。 누구를 위하여 더디게 하였던가 / 爲誰遲遲。 소인배가 자기의 뜻..

계림부원군 이수일장군 신도비명 병서

[생졸년] 이수일『李守一, 1554년(명종 9)~1632년(인조 10) [세계] 24世 국당공 후 정순공파 ----------------------------------------------------------------------------------------------------------------------------------- 계림부원군 이수일 신도비명 병서 (鷄林府院君 李守一 神道碑銘 幷序) 지은이 : 李敬輿(이경여) 옛날부터 방패와 창을 잡고 변경(邊境)을 편하게 하고 화란을 진정시킨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많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죽을힘을 다하는 사람을 얻어 인장(仁將)이라는 말을 듣고 경사를 그 후손에게 물려준 사람의 경우는 당(唐)나라의 곽분양(郭汾陽)..

月川府院君 李廷馣 神道碑銘 幷序

[생졸년] 이정암『李廷馣, 1541년(중종 36) ~ 1600년(선조 33)』 [세계] 국당공 후 문정공파 월천부원군이공신도비명 병서 (月川府院君李公神道碑銘 幷序)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임진년에 연안(延安) 싸움은 그 사실이 국사(國史)나 야사(野史)에 기재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말하는 이들이 모두 그 일과 그 충성을 장하게 여기면서, 마치 그 사람을 직접 만나 보는 듯이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공의 행장(行狀)을 보건대, 공의 충성과 용맹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요 평소부터 수양한 것이지, 하루아침에 난(亂)을 만나서 강개(慷慨)하여진 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공의 휘는 정암(廷馣), 자는 중훈(仲薰)인데, 시조 알평(謁平)이 신라시조를 도와 경주(慶州)로 사적(賜籍)된 이후로 고려를 ..

춘전 이공 신도비명. 시장(春田李公神道碑銘. 諡狀)

■ 이조판서 춘전 이공 신도비명 (吏曹判書 春田 李公 神道碑銘) [생졸년] 1617년(광해 9)~1669년(현종 10) 명곡 최석정 찬(明谷崔錫鼎 撰) (명곡은 춘전의 아우 화곡 경억의 사위다.) 신라(新羅) 초기에 이알평(李謁平)이 혁거세(赫居世)를 도와 경주(慶州)에 적(籍)을 두었으니, 바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춘전(春田) 이공(李公, 이경휘)의 비조(鼻祖,=始祖)이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휘(諱) 금서(金書)란 분이 있었는데 삼한공신(三韓功臣)이요, 그 후에 휘 제현(齊賢)은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시호(諡號)가 문충(文忠)인데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고 부르며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아주 드러났다.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휘 윤인(尹仁)이 창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