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69

비에 대한 표현들 - 이순신 난중일기에서

■ 이순신 난중일기의 비에 대한 표현들. ◇비비(霏霏) : 부슬부슬 내리는 비나 눈발이 배고 가늚, 또는 비나 눈이 계속(繼續)하여 끊이지 않는 모양. ◇련우(煉雨) : 안개비 ◇세우(細雨) : 가랑비 ◇작우(作雨) : 조금 오는 비, ◇우(雨) : 적당한 비. ◇우우(雨雨) : 다소 많은 비, ◇대우(大雨) : 큰 비, ◇림우(霖雨) : 장맛비,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고전명구 공모전 당선작]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이롭답다고 하여 조급히 나아가서도 안되고, 위태롭다고 하여 용감하게 물러나서도 안된다. 不可以利躁進 不可以危勇退 (불가이리조진 불가이위용퇴) - 김시습『金時習, 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 권18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처신(處身)하는 데에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중요한 관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두고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옛부터 처신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김시습은 고금군자은현론(古今君子隱顯論)에서 다음과 같은 지혜를 들려준다. ‘군자는 이롭답다고 하여 조급히 나아가서도 안되고 위태롭다고 하여 용감하게 물러나서도 안되며 오직 의리에..

한양 땅을 내려다보다 - 신유한

목멱산(木覓山)에 올랐다. 산의 높이는 수천 길이요, 서북쪽으로는 백악산(白岳山), 삼각산(三角山), 인왕산(仁王山)의 여러 산들이 바라보이는데 높은 산들이 모여서 하늘에 서려 서로 읍하는 듯 서로 껴안는 듯하다. 동쪽으로는 백운산(白雲山)의 뻗어 나온 산기슭이 구불구불 내려가 남산과 합하였다. 산등성이를 빙 둘러서 성가퀴와 망루가 있어서 종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들린다. 이 성안의 지세는, 가로 10여 리, 세로는 그 3분의 2가 된다. 이곳에 종묘사직, 궁궐, 곳집, 창고, 성균관, 정원이 다 들어서 있다. 그 외에 고관대작과 온갖 벼슬아치들의 관아이고 그 나머지는 수만 채의 가옥, 수백채의 가게, 수십 개의 저자거리이니, 이 모든 것이 또렷하게 손바닥 안에 있는 듯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옛 주나라 수..

나를 위한 휴식

내가 젊을 때부터 말로 다른 사람 이기기를 좋아해서 매양 다른 사람과 시시비비를 논쟁하거나 농담과 해학을 하면 바람이 몰아치고 벌떼가 일어나듯 하였는데 기발한 생각을 재빨리 꺼내 항상 좌중에 있는 사람들을 압도하곤 하였소. 내가 젊을 때부터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마을의 술꾼들과 무리를 이루어 거나하게 마시며 주정을 부려 더러는 한 달 동안 멈추지 않고 마셨고 쇠해가는 나이인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마셨다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 젊을 때부터 사람들과의 교유를 즐겼고, 약관의 나이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태학에 선발되어 들어갔더니 사방에서 태학으로 온 사람들이 해마다 수백 명이었는데 교유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심지어 뼈와 살을 나눈 형제 같은 자 또한 적지 않았었소. 이것이 젊었을 때의 기쁨이자 내가 잘하는..

완전한 혼자라는 신화

나는 그대가 언젠가 펼쳐질 것을 안다. 굽어 있던 것이 펼쳐지는 것은 이치의 형세이다. [해설] 吾知子之伸 ‘화담 서경덕은 별다른 스승 없이 자연과 홀로 마주하여 씨름하며 학문을 깨우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 天 글자를 벽에 붙이고서 면벽 수행을 하듯 깊이 파고들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한 그가 사망한 뒤 30년가량이 지나 조정에서 추증 문제가 거론되었다. 선조는 서경덕의 저서를 살펴보니 기수(氣數)에 관해 논한 바는 많으나 수신에 대해서는 미치지 못했고 공부에 의심스러운 바가 많다며 우의정 추증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때 박순, 허엽 등 서경덕 아래 문인들이 항변했지만 이에도 선조는 끝내 의심스럽다며 주저했다. 그때 율곡은 서경덕의 공..

혼조(昏朝)의 권신(權臣)에서 절신(節臣)으로

[국역] 이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진천(鎭川)의 유학(幼學) 박준상(朴準祥)의 상언(上言)에 대해 본조가 복계(覆啓)하였는데, 그 8대조 박승종(朴承宗) 및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관작을 회복시키는 일을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말하기를, ‘박승종은 혼조(昏朝)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자 폐부(肺腑)와 같은 인척으로서 16년을 지냈습니다. 만약 그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고 이의를 제기하여 잘못이 없는 곳으로 임금을 인도하였다면, 실로 생사를 함께하여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사라진 때를 당하여 한마디 말이라도 내어 천지의 경상(經常)을 지킨 일이 있었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혼조를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은 ..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學問之道無他.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 可也. 학문지도무타, 유불식, 집도지인이문지, 가야. -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 『연암집(燕巖集)』권7 별집 「북학의서(北學議序)」 ------------------------------------------------------------------------------------------------------------------------------------------------------ 1781년(정조5)에 연암 박지원은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에 서문을 써 주면서 그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박제가는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유양잡조 발문(酉陽雜俎 發文)

유양잡조 발문(酉陽雜俎 發文) - 용재 이종준(慵齋 李宗準) 소장처: 성균관대학교 존경각(1492년 간행 유일본) 성종 285권, 24년( 1493 계축 / 명 홍치(弘治) 6년) 12월 28일 무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심(金諶)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지난번 이극돈(李克墩)이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고, 이종준(李宗準) 이 도사(都事) 가 되었을 때 《유양잡조(酉陽雜俎)》·《당송시화(唐宋詩話)》·《유산악부(遺山樂府)》 및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태평통제(太平通載)》 등의 책을 간행(刊行)하여 바치니 이미 내부(內府)에 간직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酉陽雜俎 發文(유양잡조 발문) 月城 李宗準 謹識. 嘗讀宋朝蘇黃諸公詩, 多用事嶮僻, 有可喜可愕可驚可..

어버이 마음

[고전산책]한국고전번역원 ■ 어버이 마음 옛말에 이르기를, “아내가 어질면 남편의 근심이 적어지고, 자식이 효도하면 아버지의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하였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로다. 古語曰: “妻賢, 夫惱少; 子孝, 父心寬.” 旨哉言乎! 고어왈: “처현, 부뇌소; 자효, 부심관.” 지재언호! - 이지수『李趾秀, 1779년(정조 3)~1842년(헌종 8)』, 『중산재집(重山齋集)』권5 「가녀계사(嫁女戒辭)」 [해설]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5월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껴있습니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것도 단정적으로 이 두 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순 무렵엔 스승의 날도 있고 석가탄신일도 으레 이맘때쯤 직장인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날들..

효행록(孝行錄)

■고갑자(古甲子)와 태세(太歲) 효행록(孝行錄)/1688년 필사본 / 필자 소장본 著雍執徐仲春節成粧(저옹집서중춘절성장) 여기서 著雍(저옹)은 戊(무)를 나타내고 徐仲(집서)는 辰(진)을 나타내니 즉 戊辰年(무진년,1688)을 말합니다. 오늘은 위의 태세(太歲) 보는 법을 공부할까 합니다. 고서들을 보다보면 책을 펴낸 간기(刊記)를 적는데 있어서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등이나 중국 연호 등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태세가 아니라 『유조 집서(柔兆執徐)』라거나 『알봉곤돈(閼逢困敦)』이라거나, 『저옹집서(著雍執徐)』라고 적은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이게 무엇인가 싶어 궁금해 하며 책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것이 바로 아래 소개하는 태세를 적는데 있어서 한껏 멋을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