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168

재사당공(再思堂公) 사실척록(事實摭錄)

작성일 2006. 4. 23(일) 21:17 ■재사당공(再思堂公) 사실척록(事實摭錄) ●李朝實錄 成宗二十三年壬子十一月戊寅。奉常寺參奉李黿來啓曰。文昭殿失造果鍮盆。請搜索。傳曰。前此亦有盜銀甁者。其惡莫甚。本殿參奉及庫子。下義禁府推鞫。亟令捕盜將搜索。又懸賞購捕。二十四年癸丑正月乙亥。奉常寺奉事李黿。承召入啓曰。士習之不明。由於道學之不行。道學之不行。源於斯道之不傳。宗直始倡正心之學。誘掖後進。以正心爲本。身任斯道。興起斯文爲己責。其功反有賢於功名事業之卓然者矣。諡法。有博文多見曰文。博聞多能曰文。道德博聞曰文。若以多見多能名之。則宗直正心爲本。身任斯道之功。泯滅於後。故以道德博聞議諡。命示議政府。政府啓曰。臣等非以宗直爲不肖也。但其議諡有云。淸而不隘。和而不流。又曰。據德依仁。此皆聖人地位之 事。且黿之書啓有云。道學之不行。源於師道之不傳。如程朱張子者。始可以道學言之。其..

광서기(廣西記) - 제정공파 이름자 유례

■ 광서기(廣西記) - 이상언(李尙彦)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이름에 ‘입(立)’ 자 편방을 넣은 사람은 모두 문정공(文靖公)의 자손들이다. 태조가 내린 교지를 종갓집에 보관하여 여러 대를 거쳐 전하였는데, 중간에 불에 타는 재난을 당하여 재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우리 가문이 쇠락한 운명과 무관한 것이겠는가. 그 후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조상의 산소도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선대에 ‘입(立)’ 자 편방을 넣어 이름을 짓게 된 뜻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원주(原州)에 사는 이의(李毅)나 온양(溫陽)에 사는 이종언(李宗彦)은 당초에 모두 다른 글자로 이름을 삼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관동의 안절사(按節使)로 나갔을 때 이의 어른은 선대가 이름을 짓던 뜻을 비로소 듣고 곧바로 이..

취벽공 이규호 간찰첩(簡札帖)

출처>영암 망호리마을 카페 위의 간찰 내용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1868년 봄에 우봉 도리촌 선영 묘단비 건립 및 충북 진천군 초평면 연촌에서 경주이씨중앙화수회를 창립할시 이유승. 이유원. 이용우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 이때 영암 망호정에 사시는 취벽공이규호 께서 많은 일을 도모 하였다. 아마 이때 종친들과 주고 받은 서신들을 첩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는데 후손들이 소장 관리하지 못하고 국립민속박물관(민속 63731호) 까지 흘러 들어 가지 않았나 여겨진다. ■무진(戊辰) 1868년 봄.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 선영 묘단비(先塋 墓壇碑) 건립에 도모한 사람들.... ◇국당공파(菊堂公派) 판서 이현직(判書 李顯稷). 승지 이학영(承旨 李鶴榮). 부총관 이용상(副摠管 李容象). ◇상서..

사류재 이정암 선생 유언

26世 이정암『李廷馣, 1541년(중종 36) ~ 1600년(선조 33)』의 유서[遺書 庚子八月二十四日] 내 너희를 위해 남긴 것이 없다만.... 내가 작은 종기를 잘못 조리하여 마침내 독한 종기가 되고 말았다. 밤낮으로 고통스럽고, 죽음이 아침저녁에 있고 보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느냐? 나이 쉰이면 요절했다고 말하지 않는데, 하물며 나는 예슨 해를 살았다. 벼슬은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게다가 자손까지 있지 않느냐? 기꺼운 마음으로 눈을 감아 조금도 여한이 없다. 너희는 내 죽은 뒤에 장례 등의 일을 검약에 힘써 내 평일의 뜻을 따르도록 해라. 국장(國葬)이 끝나거든 바로 전포(錢浦)에 있는 죽은 아내의 곁에 묻고, 고양촌(오늘날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의 집에 신주를 모시고 슬픔을 아껴 효를 마치면 될..

사류재 이정암 선생 유서

■이정암(李廷馣) 선생 유서(遺書) 죽음을 보름여 앞두고 아들과 손자, 사위에게 준 유서이다. 자기 사후의 일을 꼼꼼하게 당부했다. 글의 주요 부분만 살펴보면 나이 쉰을 넘겼다. 젊어서는 곤궁하여 늘 집안의 가난함 때문에 동분서주했다. 성격은 뻣뻣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사물과 더불어 어그러짐이 많았다. 혼자 자신을 헤아려 봐도 필시 세속의 근심을 받으려니 하였다. 애써 세상을 떠나 지내느라 너희들을 어려서부터 춥고 주리게 하였다. 내 일찍이 한나라 왕패(王覇)의 어진 아내 유중(孺仲)의 말에 느낌이 있었다. 낡은 솜옷을 걸친다 해도 어찌 자식들에게 부끄럽겠느냐.(중략) 질병을 앓은 후로 점점 쇠약해지는구나. 친구들이 날 버리지 않아 매번 약과 침으로 도움을 받지만, 수명이 장차 다해 갈까 염려되는구나. 너..

경주이씨 선세자료

■ 경주 이씨 벌열(閥閱) ● 비(碑) 시조공경모비(始祖公景慕碑) 자연암 비(自然岩碑), 시조 유허비(始祖遺虛碑) 우봉 도리촌선영묘단비(牛峰桃李村先塋墓壇碑) 평리 열헌공사단비(評理悅軒公祀壇碑) 고려 평리공사단비(高麗評理公祀壇碑) 동암 문정공묘비(東庵文定公墓碑) 익재 문충공묘지명(益齋文忠公墓誌銘) 문희 송암이선생추모비(文僖松巖李先生追慕碑) 상서공사단비(尙書公祀壇碑) 전서공3세사단비(典書公三世祀壇碑) 석탄공사단비(石灘公祀壇碑) 운와공여흥군사공양세사단비(雲窩公驪興郡事公兩世祀壇碑) 운와공묘표(雲窩公墓表) 정순공묘갈(靖順公墓碣) 전농판관공묘표(典農判官公墓表) 병조판서공묘갈(兵曹判書公墓碣) 호군공묘갈(護軍公墓碣) 태상소경공묘단비(太常少卿公墓壇碑) 한성판윤공유허비(漢城判尹公遺墟碑) 증판서청호공묘갈(贈判書淸湖公墓碣) ..

慶州李氏三綱旌閭重建記

이기(李箕, ? ~ 16??) 慶州李氏三綱旌閭重建記 - 송사 기우만 臣而忠。子而孝。婦而烈。是爲三綱。三綱萃於一家。天之報施厚矣。報施之天。使貞忠孝烈不久泯於二百年之後。乃與韓長興同日命旌。韓公忠勇耀人。至使栗谷先生作傳。可据而信。爲何如。而李氏三綱。與之幷命。徵信來百。豈但爲李廣傳。程不識乎。第言其人。則李公箕死於胡亂。子義秋志復父讎。自幼學射。赴死深河之役。又其子以男痛父祖死敵。丁卯之變。仗劒從軍。力戰而死。夫人卞氏年未二十。縊家後樹。得傍人救甦。剪髮矢靡他。往依夫姓。全節而死。嗚呼。使死者有生。忠臣曰吾孝子。孝子曰吾烈婦。傳所謂死者復生。生者不愧者非耶。吁盛矣。旌舊濱大江。圮于水。粤七年今癸巳。十世孫元業。元弼。始重建於越江依山。力單不瓦而茅。元業頗自訟。余曰否否。今俗贗浮於眞。烏頭赤腳。煌煌道周。而識者或鄙之。李氏之茅屋存古。已知其實事。反不重耶。元業命以記事之文。樂聞..

이황 병부전(李鎤 病夫傳) - 이예환

■ 이황(李鎤, 17?? ~미상) 病夫傳 - 국란재 이예환 長安有自號病夫者名鎤字日汝。卽斥和功臣李忠莊公六代孫。尤齋門人諱商翼五代孫也。眉宇淸疎。神精明秀。志氣倜儻。言論慷慨。詞律豪宕。筆法典雅。以淸白爲世業。以詩書爲家計。其論古今人物。必揆之以道。雖先輩如有過。則無依阿之辭。雖今人如有取。則有傾盖之舊。識者服其特立之見。其身世也。簞瓢屢空。三十未有室。一足蹣跚不利行。此所謂病也。其衡於中拂於外者盖如是。而人不見其戚戚之容焉。或曰。斯人也言必稱古之人古之人。絶今不爲。惟古是學。而不能脫然於擧子之業。不以貧憂焉。不以疾戚焉。而必以病夫自號者何歟。余應之曰。斯人也風節自先世。學問有淵源。辨其義利。立其大者。則科業不至於奪志矣。亦知病于德者爲病。病于足者非病也。而必號病夫者。以病託於世。而將以謝乎輦轂之下。退伏於江湖之間。養成厥德者也。豈若賤丈夫之長戚戚於疾病而形於言語者乎。試嘗論之..

매산공 이인혁 이야기

글 : 영암 망호리 이송재(1645~1703) 지난 을축년「乙丑年,1685(숙종 11)」 봄에 나는 우리 경주이씨 대동보(1684년의 甲子譜) 추보(追補)시 기존에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전남 영암에서 서울로] 잠시 머물러 있었는데 여러 선비들이 우리 종친중에서 매산처사(梅山 處士) 이인혁「李寅爀,1634년(인조 12)∼1710년(숙종 36)」이란 분이계시는데 이분으로 말할것 같으면 중국(中國)의 남송(南宋·420~479)시대 황숙도「黃叔度: 황헌(黃憲)의 字」나 당(唐) 나라 때의 원자지「元紫芝: 元德秀의 字,696~754)」와 비길만한 아주 청렴한 분이라며 나에게 일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내어 매산공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으며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이리도 늦게 만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