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신라사(新羅史) 34

경주 월성에서 나온 흉노족의 인골

아하스페르츠의 단상[별명 기백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4.27 21:47 삼국통일을 이룬 자신감의 발로일까, 문무왕은 자신들 신라 왕족의 조상이 흉노인임을 스스럼없이 밝혔다. 경주김씨의 조상이 흉노족이었다는 이 충격적인 스토리는 2005년 벽두 KBS가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신라 제30대왕 문무왕의 비문에 대한 판독결과를 '역사스페셜'에서 공개하며 밝혀졌는데, 족보상 내물왕과 원성왕의 후손이요. 경순왕의 직계라는 나도 몰랐고, 경주김씨 종친회마저 몰랐던(심지어 불쾌한 반응까지 보였던) 그 충격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문무왕 비문의 문제의 글자 비문은 처음에는 문무왕의 업적을 늘아놓다가 앞면 하단 5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문무왕의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왔던..

산스크리트어로 본 신라 성씨 어원

작성일 : 2021. 7. 8. 22:02 ■산스크리트어(Sanskrit語)로 본 신라 성씨 어원 [언어] 인도유럽어 족 중 인도이란 어파에 속하는 고대 인도 아리안 언어. 불경이나 고대 인도 문학은 이것으로 기록되었으 며 오늘날까지도 힌두교 학자들 사이에 사용되는 문어(文語)이다. 문법은 라틴어나 그리스어 같은 더 오래된 인도 유럽어의 문법과 비슷한데, 복잡하고 어형 변화가 심하다. [약어] ●천축어(天竺語) 인도유럽 어족 중 인도이란 어파에 속하는 고대 인도 아리안 어 ●범어(梵語) 인도유럽 어족 중 인도이란 어파에 속하는 고대 인도 아리안 말 ----------------------------------------------------------------------------------------..

고대 신라수로발견(古代新羅水路發見) - 경주

작성일 : 2021. 4. 29(목) 19:23 [KBS] 김경수 입력 2021. 04. 29(목). 19:23 [KBS 대구] [앵커] 경주에서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너비 5m 정도의 고대 수로가 발견됐습니다. 수로 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와 도로 흔적도 함께 발견됐는데, 지금까지 베일에 쌓여 있던 신라 왕궁의 북문 위치를 파악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보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김경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첨성대와 월성 해자 근처에 있는 경주 동부 사적지대 발굴 현장입니다. 이곳에서 1,300여년 전, 문무왕 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대 수로가 발견됐습니다. 박혁거세 왕비 알영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하천인 경주 발천의 또 다른 수로로 길이는 150m 정도입니..

소금강산(小金剛山)

■ 소금강산(小金剛山)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곳에 자추사(刺楸寺)를 세우고 경주 벌판의 북쪽 얕어 막 한 산이 금강산(金剛山, 143m)이다. 남쪽에는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이 이어진 남산이 장엄하게 뻗어있고, 서쪽에는 선도산(380m)과 송화산(214m)이 솟아있다. 동쪽에는 명활산(245m)을 비롯하여 만호 봉(505m), 토함산(745m)이 연이어 있다. 그러나 북쪽에는 형산강이 흘러가므로 산다운 산이 없고 모두가 나지막하니, 지세로 보아 가장 약하고 허(虛)한 편이다. 허약한 곳은 이름이라도 강하게 붙여야 다른 곳과 균형이 맞을 것 아닌가? 그래서 강한 이름! ‘금강(金剛)’인 것이다. 백두대간의 중허리에 자리 잡은 강원도의 금강산이야 돌들이 뼈만 남은 것같이 단단하게 엉킨 모습이라..

“삼국유사속 신라 건국 설화는 사실”

[문화기획] “삼국유사 속 신라 건국 설화는 사실” 천지일보 장수경 기자(jsk21@newscj.com) ㅣ승인 2019.03.25. 09:40 ↑표암 유적 (제공: 이재준 전 충청북도문화재위원, 역사학자)ⓒ천지일보 2019.3.25. 이재준 전 위원 1세기 개국 주장 “박혁거세 추대된 북천 동산서 고대 중요 유적 무더기 발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알평(李謁平)을 중심으로 한 신라 개국 설화. BC 57년 경주에 터를 잡은 육촌장들은 북천 언덕에서 자제들과 함께 모여 나라를 다스릴 왕을 추대한다. 이들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것은 박혁거세였다. 이것이 유명한 고대 민주주의 기원인 화백제도(和白制度)의 시초였다. 삼국유사에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 왕을 추대하는 이유가 다음..

나릉진안설(羅陵眞贋說 - 경주의 왕릉은 진짜일까?

■ 나릉진안설(羅陵眞贋說/경주의 왕릉은 진짜일까?) 신라(新羅)는 천년의 왕국이었으며, 공식적인 임금의 숫자만 하더라도 56명에 달한다. 기이한 것은 그 수많은 임금의 사후에 존재하여야 할 무덤들은 이 땅에서 거의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경주에 이들의 무덤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고분들 이 추정된 왕릉들일 뿐이다. No 왕 위치 근거 판단 1 혁거세 오릉 담암사 담암사(曇巖寺)의 위치가 추정된 것이니 이를 기준으로 왕릉을 특정 지을 수 없으며, 또한 매장자에 대한 정리도 되어있지 않음. 2 남해 오릉 담암사 상동 3 유리 오릉 담암사 상동 4 탈해 동천동 양정 [양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이를 기준으로 왕릉을 특정 지을 수 없으며, 현..

박창화(朴昌和) 그의 유고(遺稿)집에 대한 진실(眞實)

박창화(朴昌和) 그의 유고(遺稿)집에 대한 진실(眞實) 2015.09.13. 15:04 요즘 역사를 재조명 하고자 하는데 있어 한 가지 혼란을 일으키는 사료가 있는데 그것은 남당 박창화(朴昌和,1889~1962)의 유고 작품이다. 박창화(朴昌和)의 유고집을 연구하거나, 이를 따르는 학자들은 유고집을 진정한 역사서로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박창화(朴昌和) 유고집이 정말로 역사서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주관적 역사관인지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릴 필요성을 가진다. 박창화(朴昌和)는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에서 출생하여 1900년 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그는 그 뒤 충북 영동(永同) 소학교, 배재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평범한 교사..

추척,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두번째이야기

[추적]화랑세기 필사본본의 미스터리 ②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하는 향가와 화랑들의 자유분방한 남녀관계에 대한 기록은 진위논쟁에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사본의 정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모본인 첫 번째 화랑세기 필사본. 이 책의 매듭 부분을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고서들은 대개 매듭이 5개라고 하는데, 이 책의 매듭은 네 갭니다. 이처럼 매듭이 네 개인 것은 일본에서 흔히 사용된다고 합니다. 화랑세기가 필사된 종이 또한 한지가 아닙니다. 빨간색으로 금이 그어진 이런 인쇄용지는 1930, 40년대 일본 정부에서 사용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화랑세기를 베낀 책이 일본식 장정에다 일본식 종이에 쓰여진 걸까요? 이것이 진위를 밝힐 수 있는 어떤 단서는 아닐까요? 우선 이 책..

추척,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첫번째이야기

[추적]화랑세기 필사본본의 미스터리 ① 역사속에만 남아있던 한권의 책. 삼국통일직후 신라학자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그 책이 1300여년만에 홀연히 나타났다.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 이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화랑세기라... 어떻습니까? 좀 귀에 익으신지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보다는 낯설지만 아마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화랑세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700년쯤에 신라시대 학자 김대문이 쓴 것입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책이 1300여년 만에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신라시대 화..

박혁거세의 죽음과 초기신라의 권력변화(略)

阿惠 婆娑 德公 許婁 反政 우리가 알고 있는 알영(閼英)은 신라 초대왕후가 아니라, 신라 세 번째 여왕이 된 인물이며, 신라가 아닌 낙랑국 출신의 여인이었다. 그 낙랑국은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낙랑군[중국 야오닝 성 지역]이 아니라, 남옥저의 자리를 차지한 시길의 낙랑이었으며, 혹자는 이를 황룡국(黃龍國)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황룡국은 고구려 역사에 등장하는 황룡국과는 다른 나라이다. 초대 여왕인 선도성모로부터 월광성모가 여왕의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낙랑계의 알영이 그 자리를 빼앗고, 자리를 빼앗긴 월광성모의 무리들이 반란에 성공하여 그 결과로 다시 월광성모의 손녀인 운제가 남옥저계로 넘어간 권력을 다시 찾아온 것이고, 신라의 4대 여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혁거세와 알영이 처참한 죽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