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맥.붕당.혼맥 12

청주지역 사림들의 교육적 전통과 학맥

2017년 청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청주문화 제32호에 실린 글입니다. 청주지역 사림들의 교육적 전통과 학맥 Ⅰ. 머리말 청주는 상당, 서원, 주성 등 여러 가지 별칭이 있는 지역이다. 청주 지역의 특성과 관련하여 신항서원의 마지막 원장을 지낸 송래희는 청주를 ‘시와 예절의 고장(詩禮之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청주는 ‘양반의 고을’, ‘선비의 고장’, ‘교육도시’로 이미지화 하다가 근래에 와서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학향(學鄕)’이라는 애칭이 종종 사용되고 있는데 예로부터 청주는 학문을 숭상하고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문화는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시간이 축적된 후에 그 특성이 나타나는 것처럼 청주지역의 교육적 이미지도 오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학문..

한진 그룹의 혼맥

■ 한진 그룹의 혼맥 화려한 혼맥이 한진그룹을 지켜줄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18.05.14 16:11l :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도균(capa 1954) 왕권과 신권(신하권력)의 관계는 어느 나라에서든 간에 역사학의 주요 쟁점이다. 둘은 항상 긴장과 대립의 관계를 보였다. 한국 역사에서는 신권이 대체로 우세를 보였다. 신하 그룹을 형성하는 귀족들이 왕실을 능가했던 것이다. 그것은 귀족 숫자가 왕족 숫자보다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그 원동력은 귀족들이 보유한 노비·토지·사병에서 일차적으로 나왔다. 거기에 더해, 결정적 요인이 더 있다. 대부분의 귀족을 하나로 묶어준 요인이 있었다. 바로 맥(脈)이다. 귀족들의 네트워크, 특히 혼 맥이 이들을 단단하게 결합시켰다. 불과 100여 전만..

병호시비(屛虎是非)

■ 병호시비(屛虎是非) 400년의 서원 싸움 종지부를 찍다. [사건개요] 1620년(광해군 12) 이후에 안동을 비롯한 영남 지역 유림들이 병파(병산서원 유계)와 호파(호계서원 유계)로 나뉘어 전개된 분쟁. [발생연도] 1620년(광해군 12) [사건성격] 향전(鄕戰) 병호시비는 퇴계 이황 사후 문인들 내부에서 퇴계 사후의 적 전화 문제와 관련되어 출발하였다. 19세기 양측의 지지 세력이 병파와 호파와 나뉘어 대립한 일종의 향전이다. [사건종결] 2013년 5월 [관련인물] 류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이상정(李象靖),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관련장소] 호계서원(虎溪書院) ---------------------------------------------------------------------..

안향(安珦) 문하의 6군자(六君子)

■ 안향(安珦) 문하의 6군자(六君子) 1) 안향(安珦) 학맥의 형성배경 충렬왕 15년(1289) 안향[1243(고종 30)∼1306년(충렬왕 32)]이 원(元)에서 성리학[性理學 : 중국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파]을 수용하고 귀국하자 일차적으로 그의 문하에 이름난 여섯 학자(六君子)였던 이진(李瑱)·권보(權溥)ㆍ 우탁(禹倬)ㆍ 백이정(白頤正)ㆍ 이조년(李兆年)ㆍ 신천(辛蕆) 등에게 이를 전하였다. 이들은 안향으로부터 전수 받은 성리학을 몸소 실천 보급하는데 앞장서게 되고 당시 학계에서는 이들을 육군자라 불렀다. 이는 성리학의 본향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송조육현(宋朝六賢)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이는 주돈이(周敦頤,1017~1073년),정호(程顥),1032~1085),정이..

청주 사림의 학맥과 서계 이득윤과의 관계에 대한연구

청주 사림의 학맥과 서계 이득윤과의 관계에 대한연구 이종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요약본 연구의 목적은 16-17세기 청주사족의 동향을 이해하기 위한 사례연구의 하나로 선 행연구와 경주이씨 익재공파 대동보를 중심으로 서계 이득윤(1553~1630)의 생애와 학맥을 살펴보았다. 서계 이득윤은 일찍이 부친 섬계 이잠과 서기 박지화로 부터 수학하였으며, 학문의 근본지향을 '위기지학'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학을 특히 강조하였으며, 소학에 수록된 여씨향약을 보급하여 주자학적 세계를 구현하려하였다. 더욱이 부친의 뒤를 이어, 후생을 훈도하는 것을 자기의 책무로 삼아서 청주지역의 교육에 힘썼다. 그리하여 서계는 수기에 힘을 쏟았던 유학자 일 뿐만 아니라 치인, 계도에 있어서도 사회적 책임의식을 다 하였..

조선(朝鮮)의 성리학(性理學)흐름과 당파(黨派)

조선(朝鮮)의 성리학(性理學) 흐름과 당파(黨派) [1]성리학의 발달 1.성리학의 두 흐름 고려말기의 신진사대부들이 자기역사에 대한성찰과 현실극복의 이념적지표로 삼은 학문적 기반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사회개혁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조선왕조의 개창이라는 역사적 변화에 대하여, 성리학을 공부하는 지식인들이 모두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즉, 개혁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적극적인 역성혁명에 참여한 쪽과, 개혁에 소극적이면서 고려왕조에 충성을 표시하는 의리와 명분을 주장하는 쪽의 대립이 있었다. 전자는 정도전(鄭道傳,1342~1398)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파세력으로, 조선왕조 성립이후 정치구도를 세웠으며, 유교국가 운영에 학문적 이론을 제시하였다. 후자는 정몽주(鄭夢周,1338~1392)를 중..

대리청정 요구 노론에 소론 중용으로 ‘반격의 칼’

■ 대리청정 요구 노론에 소론 중용으로 ‘반격의 칼’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9호] 20091108 입력 노론이 경종 축출과 연잉군 추대의 당론을 정한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이 국왕을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곧 역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론은 강한 당세를 믿고 이런 당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권이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젊은 국왕을 공개적으로 내쫓으려는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김일경 단소(壇所:시신 없이 고인을 기리는 특별한 장소). 경북 예천군 감천면 내성천 근처에 있다. 김일경은 노론 4대신을 4흉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면서 사형당하게 된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④ 신축환국 노론이 한밤의..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

[이덕일 ㅣ제136호 | 20091018 입력] ■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①숙종-이이명 독대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元子)가 되거나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 된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노론은 이런 헌정 질서를 부인하고 자당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노론 영수 이이명의 초상. 이이명은 숙종43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신도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이명(李頤命)이 집필한 소재집(疎齋集). 숙종 43년(1717) 7월 19일. 전염병이..

「權道의 말단」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權道의 말단」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27호 | 20090815 입력] 세상 모든 길에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다. 정도(正道)라고도 불리는 상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원칙이고, 권도는 상황에 따른 응용이다. 당쟁이 심해지면 권도의 말단인 정치공작의 유혹이 커져간다. 정치공작이 용납되는 세상은 그 자체로 개혁 대상이 된다. 권도는 정도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석주(金錫冑,1634~ 1684) 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있다. 서인과 남인을 넘나든 최고의 실세였으나 남인 제거를 위한 정치공작을 주도하면서 명성이 급격히 퇴락했다. 무덤의 무성한 풀이 후세 사람들에게 권력무상을 경계하..

‘사문난적’ 이 될지라도…

■ ‘사문난적(斯文亂賊)’ 이 될지라도… [한겨레21] 송시열의 숙적 백호 윤휴 ①…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반기 든 학자… 조선의 위기에 대한 복고적 해법에 반대하여 다원 사상 체제를 주창 ▣ 이덕일 역사평론가 양란(兩亂·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는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지배층의 무능을 여실히 목도한 피지배층들은 체제 변화를 요구했다. 체제 변화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주자학(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의 폐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의 완화이다. 이런 요구에 대해 사대부 계급은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서인 영수 송시열(宋時烈)로 대표되는 한 세력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와 신분제를 강화하는 복고적 노선을 걸었다. 조선 성리학의 주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