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려시대 인물 37

추적(秋適)

■ 추적(秋適) 추적『秋適,1246(고종 33)~1317(충숙왕 4)』은 충렬왕 때 사람으로 성품이 활달하여 얽매임이 없었다. 그는 호(號)가 노당(露堂)이고. 본관은 추계(秋溪)로, 아버지는 추영수(秋永壽)이고 밀성[밀양]의 입향조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다가 직사관(直史館)으로 발탁되었고 거듭 승진해 좌사간(左司諫)이 되었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가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기 고향인 합덕부곡(合德部曲: 오늘날 충남 당진시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켰다. 추적이 문안에 서명을 거부하자 황석량은 내수(內竪: 내시) 석천보(石天補)·김광연(金光衍)과 함께 기회를 노려 그를 참소하니 왕이 성을 노해 즉시 형구를 채워 순마소(巡馬所)에 수감..

고려 제2대왕 혜종 왕무

■ 고려 제2대왕 혜종 왕무 惠宗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諱武 字承乾 太祖長子 母曰莊和王后吳氏。後梁乾化二年壬申生 太祖四年 立爲正胤 從討百濟 奮勇先登 功爲第一 二十六年 五月 丙午 太祖薨 奉遺命卽位。 혜종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은 이름이 왕무(王武)이고 자가 승건(承乾)이며, 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장화왕후오씨(莊和王后吳氏)이다.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년(912)에 탄생하여 태조4년(921) 정윤(正胤 : 태자)으로 책봉되고, 종군하여 후백제를 토벌할 때,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섰으므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26년 5월 병오 일에 태조가 죽자 유명을 받들어 즉위했다. - 고려사 혜종 총서 나주 출신인 장화황후오씨의 소생으로 태조 왕건의 장남이다. 아버지의 후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고려 제2대왕 혜종[왕무] 사망원인

고려 제2대왕 혜종[왕무] 사망원인 秋九月 王疾篤 群臣不得入見 小常侍側。 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 《고려사》 혜종 2년의 기사 조선의 정종과 비슷한 예다.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는 늘 상 주름살을 펼 겨를이 없었던 듯한데, 결국 그는 왕의 자리에 머무른지 두해만에 사망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매우 병약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는 태조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었다. 그는 자객을 맨주먹으로 때려잡기까지 하였다. 왕규가 혜종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

윤언이(尹彦頤)

■ 윤언이(尹彦頤) [생졸년] : 1090(선종 7)∼1149(의종 3). [진사시] 1114년(예종 9) 진사시 장원 ------------------------------------------------------------------------------------------------------------------------------------ 고려 중기의 문신.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윤관(尹瓘)의 다섯째[막내] 아들이다. 17세에 부음(父蔭)으로 벼슬에 나갔다가, 25세 되는 예종 9년(1114년)에 진사시에 제1등으로 급제하였다. 인종 때 기거랑(起居郎)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정치의 득실을 ..

체원(體元)

■ 체원(體元) ◈속명 : 미상 ◈생졸년 : 미상 ◈본관 : 경주(慶州) ◈별칭 : 법호 목암(木庵)·향여(向如), ◈시호 : 각해(覺海) ◈활동분야 : 불교 승려 ◈주요저서 :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 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 ------------------------------------------------------------------------------------------------------------------------------------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법호는 목암(木庵), 향여(向如)이고, 시호는 각해(覺海)이다.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낸 이진(李瑱)의 아..

일연(一然)스님 - 삼국유사 저자

■ 일연(一然) 스님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승려.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 아버지는 언정(彦鼎)이다. 왕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214년(고종 1) 해양(海陽: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

이인임(李仁任)

■ 이인임(李仁任) 이인임(미상~ 1388)은 고려 말기의 중신(重臣)이자 권신으로, 정치가(政治家)이다. 조부는 성산군 대제학 이조년(李兆年)이고, 아버지는 성산 후 이포(李褒)이다. 그는 관향이 성주(星州)로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에서 태어났고, 호(號)는 승암(勝巖),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인데 훗날 황무(荒繆)로 바꾸었으나. 이성계 집권 후 추탈 당하였다.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숙부이기도 하다. 아버지 이포는 인복(仁復). 인임(仁任). 인미(仁美). 인립(仁立). 인달(仁達). 인민(仁敏)의 6형제를 두었는데, 이인임은 둘째 아들이고 고려 멸망 후 은거한 이숭인(李崇仁)의 5촌 당숙이기도 하다. 그는 음보(蔭補)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되고,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공민왕때 좌부승선(佐副承..

목은 이색선생 영정(牧隱李穡先生影幀)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171호 (안동시) ◈명 칭 : 목은영정(牧隱 影幀) ◈분 류 : ◈수량/면적 : 1폭 ◈지 정 일 : 1983.06.20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 ◈시 대 : 조선전기 ◈소 유 자 : 이장원 ◈관 리 자 : 이장원 ◈상세문의 : 경상북도 안동시 유교문화권개발사업단 054-851-6392 ◈설 명 이 영정은 고려 후기의 문신인 삼은(三隱)의 한분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작자는 미상이나 조선 초의 대학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 1352∼1409)의 찬문이 있고, 영락(永樂) 갑신(甲申) 구월(九月)이란 연대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1404년(태종 4년) 이전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해오는 바로는 영정은 당..

杜門洞七十二賢錄

■ 杜門洞七十二賢錄 휘(諱) 호(號) 본관(本貫) 휘(諱) 호(號) 본관(本貫) 정몽주鄭夢周) 포은(圃隱) 연일(延日) 김약항(金若恒) 척약재(척若齋) 광산(光山) 김 주(金 澍) 용암(龍岩) 선산(善山) 김약시(金若時) 시호충정(忠定) 광산(光山) 이존오(李存吾) 석탄(石灘) 경주(慶州) 이무방(李茂芳) 남곡(南谷) 영천(永川) 정 추(鄭 樞) 원재(圓齋) 청주(淸州) 이 행(李 行) 기우자(騎牛子) 여주(驪州) 최 양(崔 瀁) 장육당(藏育堂) 전주(全州) 변 숙(邊 肅) 길 재(吉 再) 야 은(冶隱) 선산(善山) 김광치(金光致) 상주(尙州) 남을진(南乙珍) 사천(沙川) 의령(宜寧) 이종학(李種學) 인재(麟齋) 한산(韓山) 임선미(林先味) 휴암(休庵) 평택(平澤) 이양소(李陽昭) 금은(琴隱) 순천(順天..

이성서(李成瑞) - 고려

■ 이성서(李成瑞) 1319년(충숙왕 6) ∼1379(우왕 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부(鷄林府) 출신으로 1351년(충정왕 3)에 밀직부사가 되고, 이듬해인 1352년(공민왕 1)에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해에 동지밀직사사에 승진되고 다시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거쳐 1361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남행(南幸)하게 되자 양광도도순문 겸 병마사(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가 되어 이를 막아 싸웠다. 1363년에 일어난 흥왕사(興王寺)의 변(變) 때 최영(崔瑩)과 함께 이를 토벌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고,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왕이 안동으로 남행하였을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다시 첨병보좌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