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온계 이해선생 행장(溫溪 李瀣先生 行狀) / 퇴계 이황 넷째형

[訥隱先生文集卷之十八]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五衛都捴府都捴管。行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捴府副捴管溫溪李先生行狀。 눌은 이광정 찬(訥隱 李光庭 撰)/原州李氏 1674(현종 15년)~1756(영조 32년) 先生姓李氏。諱瀣。字景明。眞寶人。六世祖碩起縣吏。中進士。贈密直使。世稱有隱德。有子曰子脩。麗末中第。事恭愍王。與平紅賊。封松安君。判典儀府事。始來居安東。生諱云侯。軍器寺副正。先生高祖也。曾大父諱禎。嘗以寧邊判 官。開拓藥山城。居官淸愼儉約。卒善山都護府使。大父諱繼陽。進士。恬靜有隱操。又自安東卜居禮安之溫溪里。贈吏曹判書。考諱埴。强志力學。中進士。早卒。贈議政府左贊成。妣贈貞敬夫人春川朴氏。司正緇之女。以弘治丙辰某月日。生先生。幼姿狀丰秀。逈出羣兒。贊成公奇愛之。七歲而孤。與弟退陶..

예조참판 이해 묘갈명(禮曹參判李瀣墓碣銘)

〇퇴계 이황의 넷째 형임.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이공 묘갈명 병서 (嘉善大夫 禮曹參判 兼 同知春秋館事 五衛都摠府副摠管 李公 墓碣銘 幷序) 제(第) 이황(李滉) 찬(撰) 공의 이름은 해(瀣)요, 자는 경명(景明)이며, 그 선조는 진보(眞寶) 고을 사람인데, 중간에 안동으로 옮겼다가 또 예안(禮安)으로 옮겼다. 6세조는 휘가 석(碩)이니 아전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은 휘가 자수(子脩)이니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을 섬겼고, 홍두적(紅頭賊)을 치는 데 참여해서 송안군(松安君)에 책봉되었다. 고조는 휘가 운후(云侯)이니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증조는 휘가 정(禎)이니 선산 부사(善山府使)요..

지례현감 이녕 묘갈명(知禮縣監 李寗 墓碣銘 )

〇퇴계 이황의 조카임 ■통훈대부 행 지례현감 이공 묘갈명 (通訓大夫 行 知禮縣監 李公 墓碣銘)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이씨(李氏)는 진보(眞寶)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다. 그 처음에 현리(縣吏)인 석(碩)이 아들 수(脩)를 낳았는데, 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에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그 후 이대(二代)를 전하여 휘 계양(繼陽)에 이르러서는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아서 고사전(高士傳)에 우뚝이 드러나 있는데, 이분이 예안현(禮安縣)으로 옮겨가 살았고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식(埴)을 낳았는데, 식은 진사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식(埴)이 휘 해(瀣)를 낳았는데, 해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졸관하였다. 해(瀣)는 일찍이 이기(李芑..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

■영휘원(永徽園) 과 숭인원(崇仁園) [종 목] 사적 제361호 [명 칭] 영휘원((永徽園+崇仁園包含)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55,015㎡ [지정일] 1991.10.25 [소재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외 [시 대] 일제강점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의릉관리소 [자료참조] 문화재청 --------------------------------------------------------------------------------------------------------------------------------------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재위 1863∼1907)의 계비(繼妃)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묘소(墓所)..

제례 홀기 순서(祭禮 笏記 順序)

■ 제례홀기순서(祭禮笏記順序) 제례에 대하여 각 지방 또는 문중별로 다르겠으나 유교의 일반적 제례순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합니다. ●笏記(간편 홀기) ① 陳設者 盥水洗手 行 陳設 : 진설자는 대야 물에 손을 씻고 진설 하세요. (진설자 관수세수 행 진설) ② 獻官 及 參諸員 拱手 序立 : 헌관이하 모든 참례자는 공수하고 나란히 서세요. (헌관 급 참제원 공수 서립) ③ 獻官 及 諸執事 盥水洗手 : 헌관 및 제집사는 대야 물에 손을 씻으세요. (헌관 급 제집사 관수세수) ④ 大祝 點視 陳設 : 축관은 진설을 점검 하세요. (대축 점시 진설) ⑤ 執事者 庭下 再拜 : 집사자는 내려와서 재배 하세요. (집사자 정하 재배) 배 흥 배 흥 평신(拜 興 拜 興 平身) ⑥ 初獻官 焚香禮 : 초헌관은 삼상향(三上香)..

전주이씨 시조 이한 묘 조경단(肇慶壇)

■조경단(肇慶壇)의 유례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후 전주이씨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만들기 위하여 그의 22대조가 되는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묘가 전주의 건지산(100.5m) 기슭 어딘가에 에 있다는 설에 따라 많은 지사들과 사람들을 동원하여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후 역대 왕들도 시조공의 묘를 찾기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영조는 묘지를 찾지못하자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조 47년(1771) 시조 이한과 배위 경주김씨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祠堂)을 오늘날의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慶基殿) 경내에 건립하였다. 조경단(肇慶壇)은 덕진에서 약 1km 들어간 건지산(乾止山, 103m)에 있으며, 광무 3년(1899년) 5월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

단비(壇碑)는 신위(神位)보다 지단(之壇)이 좋아 外

예절 상식 문답 41(경주김씨 종보 발췌) [문 105] 월간 [실천예절]에 동춘당 송춘길(同春堂 宋俊吉)선생에 대한 내용을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에 제주(祭酒)라는 자리를 만들었다]면서 [성균관에(제주)가 생긴 유래이니..]라고 했는데 [제주(祭酒)]가 관명(官名)으로 쓰일 때는 [제주]가 아니라 [좨주]여야 하지 않습니까? [답] [제주(祭酒)]관명일 때는 [좨주]로 읽어 제수(祭羞)로서의 술이나 바닥에 세 번 술을 지우는 일을 말하는 제주(祭酒)는 [제주]라 읽지만 관명(官名)일 때는 [좨주]라고 읽습니다. [좨주]라는 벼슬은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에 종 3품의벼슬로 있다가 25대 충렬왕(忠烈王)때에 전주(典酒)로 고쳤고 공민왕(恭愍王)때에 사성(司成)으로 고쳤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다시 ..

조선후기의 신분이동

조선후기의 신분이동 [서론] 조선 중기에 이르러 양반 중심의 사회에 신분제의 변동이 일어났다.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결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왕조 교체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양반계층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층이 생겨나는 한편 전쟁 후의 양반사회는 계속적인 당쟁을 통해 그 자체를 분화시켜갔다. 양반 중 계속 정권에 참여한 양반을 벌열(閥閱), 정권에서 소외 되어 지방에 토착하여 기반을 가진 양반을 향반(鄕班), 향반 중에서 가세가 몰락하여 쇠잔한 양반을 잔반(殘班)이라 하였다. 향반은 벌열에 비하여 지위가 떨어졌으며, 잔반은 대부분 소작농이 되었는데 잔반의 수는 점차 늘어갔다. 몰락해가는 양반층은 그 사회경제적 처지와 이해관계가 실학자들처럼 농민..

석가탑 47년만에 해체..사리공 노출

국보 21호인 불국사 석가탑(삼층석탑)이 47년 만에 속살을 드러낸다.석가탑 해체 수리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은 2일 오후 2시 현장에서 2층 옥개석(屋蓋石. 지붕처럼 덮은 돌)을 해체하고 그 아래 몸돌인 탑신(塔身)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공간인 사리공(舍利孔)을 노출한다. 석가탑이 사리공(가로세로 각각 41㎝, 깊이 19㎝)을 노출하기는 1966년 이후 47년 만이다.석가탑은 일부 석재에서 균열 등이 발견돼 2010년 12월16일 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가 결정했다. 지난해 9월 해체를 시작해 그 해 12월에는 상륜부(上輪部)가 모두 해체된 상태이며, 이날 현재 탑신부 해체가 진행 중이다. 석가탑은 1966년 사리공의 사리장엄 유물을 노린 도굴꾼들에게 훼손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