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

야촌(1) 2013. 6. 3. 23:56

■영휘원(永徽園) 과 숭인원(崇仁園)

 

[종 목] 사적 제361호

[명 칭] 영휘원((永徽園+崇仁園包含)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55,015㎡

[지정일] 1991.10.25

[소재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외

[시 대] 일제강점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의릉관리소

[자료참조]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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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원(永徽園)은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재위 1863∼1907)의 계비(繼妃)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묘소(墓所)이다.  그리고 영휘원(永徽園) 안에는 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晋, 1921∼1923)의 무덤인 숭인원이 있다.

 

원래 이곳은 명성왕후를 모셨던 홍릉이 있었으나, 1919년 경기도 미금시 고종황제의 릉과 합장하기 위해 옮겼다. 영휘원과 숭인원 주변에는 많은 석물과 정자각· 비각 등이 있다.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사진

 

엄귀비(嚴貴妃)는 철종(哲宗) 5년(年)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長女)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景福宮)에 입궐(入闕)하여 민비(閔妃)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1852-1919)의 총애를 받게된 엄씨(嚴氏)는 민비(閔妃)에 의해 궁 밖으로 쫓겨났다가 민비(1851-1895)가 8월 20일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시해(弑害)된 후 5일 만에 고종의 명으로 궁궐에 다시 들어오게되었다.

 

고종은 이 틈을 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범진등 찬러파의 권유를 받아들여 러시아 공관으로 1896년 2월 11일 피신했으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이때의 고종(高宗)을 피신케한 행동대장이 바로 엄상궁이었다(여자의 가마는 건드리지 않는 조선의 관습을 이용, 궁여의 가마에 고종을 태워 파천에 성공한다.

 

당시 고종의 계비(繼妃)로 정화당(貞和堂) 김씨가 초간택된 상황이었으나, 민씨 시해사건의 주범이 점차 일본으로 밝혀지면서 국혼이 계속 연기되다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 빈 공간을 엄씨가 맡은 것이다.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과 함께 지내던 엄씨는 1년 후 독립협회의 주장에 따라 고종이 환궁(1897년 2월 20일)함에 따라 대궐로 돌아 왔다. 엄씨는 이해(1897) 10월 아들 은(慇)을 낳아 고종에게 선영(善英)이란 이름을 하사 받고 귀인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00년 8월, 아들이 영왕으로 봉해지자 순빈으로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10월 빈에서 비로 봉해졌으며 경선궁(慶善宮)이란 궁호를 받았다. 엄씨는 빈에서 비로 승격됨에 따라 사실상 고종의 계비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는 엄씨의 아들 영왕이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영친왕으로 알려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바로 그다. 엄귀비 또한 이때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엄씨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조선의 그 어느 왕비보다 여성 교육에 뜻이 많았던 선각자이기도 했다.

 

그는 1911년 7월 20일 58세로 별세(別世)하였으며 위패(位牌)는 조선 역대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七宮)에 모셨다. 엄귀비(嚴貴妃)는 신교육(新敎育)에 관심을 갖고 1905년(光武 9)에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1906년를 설립(設立)하였으며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오늘날 숙명여학교(現淑明女學校))의 설립에도 거액을 기부하는 등 근대교육발전(近代敎育發展)에 크게 공헌하였다.


영휘원(英徽園) 경내에는 손자(孫子) 이진(李晋)(영친왕(英親王)의 자(子))의 묘(墓)가 있으며, 원래 이곳은 이왕가(李王家)의 가족묘지(家族墓地)로 정해 놓았던 곳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의 릉(陵)인 홍릉(洪陵)이 있어 이 일대를 홍릉(洪陵)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이 릉(陵)은 1919년(年) 3월(月)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에 고종황제(高宗皇帝)와 합장하기 위해 천장하였다.


묘(墓)의 시설로는 봉분(封墳)(병풍석무(屛風石無))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석양(石羊) 석호(石虎) 사초지(莎草地)가 조성(造成)되어 있고, 묘(墓)앞에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영휘원과 숭인원을 수호 관리하는 재실(齋室)이 있다.


기록으로는 정자각(丁字閣) 남(南)쪽의 비명(碑名)에 「순헌엄비영휘원(純獻嚴妃永徽園)」이라 각자(刻字)되어 있고, 후면(後面)의 비문(碑文)은 「순헌귀비엄씨철종오년갑인십일월초오일생 기미선입궁광무원년탄왕세자봉귀인사년봉순빈사궁호경선오년진봉비칠년책황비○○칠월이십일졸서수오십팔세추호순헌팔월이일장우양주천수산인좌원원호영휘○○

 

(純獻貴妃嚴氏哲宗五年甲寅十一月初五日生 己未選入宮光武元年誕王世子封貴人四年封諄嬪賜宮號慶善五年進封妃七年冊皇妃○○七月二十日卒逝壽五十八歲追號純獻八月二日葬于楊州天秀山寅坐原園號永徽○○)」하고 기록되어 있다.

 

 

▲영휘원 숭인원 안내도

 

순헌엄비능침전경(純獻嚴妃陵寢全景)

 

곡장 뒤에서 바라본 모습.

 

 

 

순헌엄비영휘원(純獻嚴妃永徽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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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원(崇仁園) 전경

 

원손 숭인원
  영왕 이은(英王 李垠,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영친왕 부부.

 

[영친왕의 연대표]
1세 - 탄생하다.
11세 - 황태자에 책봉되다. 유학을 가장, 일본으로 끌려가다.
14세 - 대한 제국이 멸망하고, 순종이 폐위되어 칭호가 격하되다. 영친왕 역시 칭호가 격하되다.
24세 - 이방자와 강제로 결혼하다.
30세 - 순종 승하하다.
49세 - 제 2차 세계대전 종결되다.
51세 - 왕공족 제도의 폐지로 평민으로 강등되다. 이승만 대통령의 저지로 귀국하지 못하다.
67세 -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귀국하다. 이후 국가에서 지급되는 보조금으로 생활하다.
71세 - 지체장애인을 위한 시설 명휘원을 설립하다.
74세 - 사망하다.」


 
의민태자(懿愍太子) 또는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라고 하지만 이는 훗날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붙인 이름이며 세칭 영왕(英王),또는 영친왕(英親王, 일본식명칭)이라 한다.  영왕 이은(李垠)은 1897년 생으로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귀비 엄씨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서 11세에 유학을 명분으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후, 1920년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제로 일본 황족의 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이미 황태자비로 초간택된 민갑완이 있었으나 결혼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민갑완은 상해로 망명하여 평생 수절을 지키다 해방후 귀국하여 노년을 어렵게 지냈으며 정혼자 영친왕을 생전에 단 한번 보고는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968년 3월 19일 향년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일부에서는 영왕과 이방자여사의 합장은 잘못이다 민갑완을 영친왕비로 합장하고 이방자를 일본으로 돌려보내라는 운동이 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영왕은 형식적인 왕위 계승자가 되어 李王으로 불리지만 일본에 강제체류해야 했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중장까지 이르다 패전으로 평민이 된다. 해방이후에도 귀국치 못하다가 1963년에서야 부인 이방자여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세가 깊어 197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 고종과 이복형 순종이 있는 홍유릉 능역 영원(英園)에 묻혔다.

 

이방자여사는 남편 사별 후 신체장애자를 위한 명휘원(明暉園)과 정신지체아를 위한 자혜학교(慈惠學敎)를 세워 사회복지활동을 하다가 1989년에 사망하여 부부합장으로 묻혔다. 진과 구 두 아들이 있으나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마지막 황세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단독으로 도미(渡美)하여 MIT공대를 졸업하였다.

 

직장동료였던 줄리엣여사와 결혼하였으나 한국에 돌아온 후 왕실의 품위를 그르쳤다는 질타 속에 파탄을 맞게 되었다.
이방자여사가 돌아가신 후 한국을 떠났다가 1996년 영구 귀국하여 부암동 등에 살다가 2005년 7월 16일 일본에서 사망하여 아버지 영친왕의 영원(英園) 근처 회인원(懷仁園)에 묻혔다. 
영친왕의 요절한 맏아들 이진(李晉, 1921-22)이 묻힌 곳이 숭인원으로 영휘원 인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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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후손을 끊으려는 일제는 영친왕을 불임녀로 판정받은 마사코와 혼인시켰는데 1921.8.18 아들  진이 탄생하였고 1922.4.26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생후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일 겸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영친왕이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서 어머니 엄귀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후 11년만의 일이다.

이들 부부는 5월 12일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기이하게도 전날인 11일 아들 진이 갑자기 죽었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 독살로 여겨지지만 공식발표는 배앓이 였다. 


순종은 이를 애석히 여겨 왕자책봉을 받지 않은 아기지만 왕실의 전통을 깨고 특별히 왕자의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고, 어린 주검은 아관파천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용감한 친할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곁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