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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47년만에 해체..사리공 노출

야촌(1) 2013. 4. 28. 02:01

 

국보 21호인 불국사 석가탑(삼층석탑)이 47년 만에 속살을 드러낸다.석가탑 해체 수리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은 2일 오후 2시 현장에서 2층 옥개석(屋蓋石. 지붕처럼 덮은 돌)을 해체하고 그 아래 몸돌인 탑신(塔身)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공간인 사리공(舍利孔)을 노출한다.

 

석가탑이 사리공(가로세로 각각 41㎝, 깊이 19㎝)을 노출하기는 1966년 이후 47년 만이다.석가탑은 일부 석재에서 균열 등이 발견돼 2010년 12월16일 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가 결정했다. 지난해 9월 해체를 시작해 그 해 12월에는 상륜부(上輪部)가 모두 해체된 상태이며, 이날 현재 탑신부 해체가 진행 중이다.

 

석가탑은 1966년 사리공의 사리장엄 유물을 노린 도굴꾼들에게 훼손되자 해체수리가 결정됐다.그 과정에서 2층 탑신 사리공에서 사리와 함께 금동제 외합, 은제 내합,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고려 초기 때 석탑을 고쳐 쌓은 내력을 기록한 문서인 중수문서 등이 발견됐다.이 중 28건은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현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해체되어 전시중인 석가탑의 3층 옥개석

 

↑해체되어 전시중인 석가탑의 복발

 

↑해체되어 전시중인 석가탑의 앙화 

 

↑해체되어 전시중인 석가탑의 노반

 

석가탑의 상륜부에서 노반,복발, 양화는 본래의 것이고 나머지 보륜, 보개, 수연 등은 1973년 보수할 때 지리산 실상사의 것을 본따 만들어 올린 것이다 이번 해체 과정에서 수습하는 사리장엄구는 47년 전에 넣은 복제품이 대부분이지만 은제 사리호와 목제 사리병은 재봉안한  원래의 성보문화재이다.

 

연구소는 수습한 사리를 석탑 복원 때 재봉안하기 전까지는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고 석가탑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할 예정이다.또한 사리장엄구는 수습 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조사와 보존처리를 시행한 후에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재봉안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원년(740)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발원하면서 세운 석가탑은 고려 초기인 현종 시대에 경주 일대를 덮친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자 대대적으로 수리했으며, 이후 천년을 버티다 .1966년 해체됐다.

 

하지만 반세기 전 해체를 진행하다가 2층 옥개석을 들어내리는 과정에서 돌이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해체를 중단하고, 2층 몸돌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만 수습한 채 다시 탑을 쌓아올렸다. 2층 옥개석까지 해체한 석가탑은 상반기 중으로는 기단까지 전면 해체된다.

 

연구소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하부까지 모두 해체한 다음 지반 조사를 할 예정"이라면서 "그 결과에 따라 석탑 하부와 주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게 된다"고 말했다.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지반을 보충한 석가탑은 내년 3월 무렵에는 재조립에 들어가 6월 무렵에는 복원을 완료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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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김태식 기자2013.4.2>

 

불국사 석가탑, 그 영광과 수난의 1300년

경덕왕 원년 건립, 지진·도굴 피해..국보 쏟아내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다보탑과 나란히 버틴 석가탑(삼층석탑)은 올해로 정확한 나이가 1천273세다.그것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최근에야 밝혀졌다. 1966년 석가탑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 수리 문서를 통해 신라 경덕왕 원년(740)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석가탑은 문화재보호법상 정확한 이름이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며, 현재 국보 제21호다.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석탑을 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정형을 보여주는 탑으로 평가한다.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세웠다. 기단이나 탑신에는 이렇다 할 조각이 없어 각종 화려한 장식을 한 인근 다보탑과는 달리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학계는 이 석탑이 전탑(벽돌탑)과 유사한 신라 초기 석탑 형식에서 발전한 것으로 평가한다.부재를 분할하지 않고 통돌을 사용한 가장 이른 예로 후대 신라 삼층석탑의 정형을 확립한 뿌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그 이후 한반도에 태어난 삼층석탑은 모두 석가탑을 롤 모델(role model)로 삼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기념비적인 탑이다.

 

◇ 석가탑 수난사

 

석가탑은 한동안 처음 건축 이래 단 한 번도 큰 보수는 없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66년 해체 수리 때 사리공에서 발견한 석탑 중수기(수리내역서)가 최근 판독되면서 사정이 일변했다.이를 통해 먼저 고려 현종 15년(1024) 해체수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원인은 지진으로 보인다. 이어 12년 뒤인 정종 2년(1036)에도 지진으로 피해 보수를 했으며, 다시 2년 뒤인 정종 4년(1038)에도 다시 지진으로 피해를 보아 고쳐 쌓았다.

 

조선 선조 20년(1586)에는 낙뢰로 탑 꼭대기 뾰족한 부분인 상륜부가 손상돼 떨어져 나갔다. 이때 손상한 상륜부는 1972년에야 복원하게 된다. 하지만 원래 모습을 알 수가 없어 석가탑과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실상사삼층석탑의 그것을 본떠 붙였다.조선 후기에는 불교에 대한 각종 압박이 심해져 불국사가 쇠락하면서 석탑 또한 훼손이 가속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무렵에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훼손이 극심하다. 그러다가 1925년 무렵에 팔방금강좌대와 주변을 정비했다.석가탑은 1966년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훔치려던 도굴꾼들에게 탑재 일부가 훼손됐다. 이렇게 해서 당시 해체 수리가 결정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2층 옥개석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떨어뜨리는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해 사리장엄구를 수습하는 것으로 해체수리는 끝났다.

 

그러다가 2010년 12월1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석탑을 정기 안전 점검하던 중 기단 갑석에서 길이 1천320㎜, 간격 5㎜ 정도의 균열이 확인됐다.그 원인을 분석한 결과 기단 내부를 채운 흙과 돌덩이인 적심(積心)이 유실되고, 상부 하중의 지지점이 상실됨에 따라 일어났다는 결과가 제출됐다.이에 석탑은 2010년 12월16일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수리를 결정했으며, 지난해 9월27일 해체수리에 착수했다.

 

 

 

 

◇ 1966년 해체 보수

 

현대에 들어와 석가탑의 대대적인 보수는 1966년 도굴 시도 실패에 따른 후속 조치로 진행됐다.당시 해체 보수는 10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됐다. 애초 계획한 해체의 범위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전면 해체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탑신 2층 옥개석까지 해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옥개석을 분리해서 땅에 내려놓는 과정에서 그만 돌이 굴러 떨어진 대형 사고가 발생한 여파였다.

 

이런 우여곡절에서도 조사단은 2층 탑신석에서 사리공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사리 48과와 사리장엄구를 수습했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로 기록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바로 이 사리공에서 발견됐다. 다라니경과 사리장엄 관련 유물들은 국보로 지정됐다. 

 

 

↑1966년 사리 장엄 구 수습

 

사리공은 가로·세로 각각 41㎝에 깊이는 19㎝였다. 이곳에서는 금동제 사리 외함과 공양품 등 총 40건에 달하는 유물이 발견 됐다.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기는 모두 3종이 확인됐다. 하나는 유리제 사리병으로 사리 46과를 봉안했다. 이 사리병은 은제 사리 내호, 은제 사리 외호, 금동제 사리 외 함으로 덮여 있었다.

 

두 번째는 목제 사리병으로 사리 1과를 봉안했다. 금동제 방형 사리합으로 감쌌는데 사리공 동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됐다. 세 번째는 은제 사리 소호로서 사리 1과를 봉안했다. 은제 사 리합으로 감싼 이 사리소호는 사리공 서북쪽 모서리에 발견됐다.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각각 다른 양식이라는 점에서 2차례 정도 석탑을 중수하면서 새로 넣은 사리기로 본다.

 

해체 보수 때 발견된 묵서지편(墨書紙篇)이라는 종이류 뭉치는 뒤늦게 그 내용이 판독되면서 불국사와 석가탑 역사를 뒤흔들게 된다. 2005년 무렵 당시 이를 보관 중이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이 종이 뭉치를 하나하나 해체한 결과 고려 초기 때 석가탑을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중수기 문서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석가탑의 정확한 창건 연대가 드러나고, 석가탑은 단 한 번도 수리 보수가 없었다는 신화가 붕괴됐다. 이런 역사를 지닌 석가탑이 해체 수리 근 반세기 만에 다시 전면 해체 수리가 진행 중이다. 이번에는 석탑 기단까지 전부 들어냈다가 다시 세우는 전면 해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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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1호인 불국사 삼층석탑(일명 석가탑). 불국사 스님들의 "석가모니불" 염불 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2일 오후 2시, 2층 옥개석(屋蓋石· 지붕처럼 덮은 돌)을 기중기로 들어 올려 해체했다. 1000년 만의 해체복원 사업이자, 1966년 도굴 미수로 드러난 사리 장엄 구를 수습한 뒤로 47년 만이다. 이날 사리 장엄 구를 수습한 결과 확인된 사리는 1과(顆)였다.

 

석가탑 해체 수리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 석조문화재보수정비사업단이 옥개석을 들어 올리자 탑신(塔身)에 들어 있는 41㎝x41㎝ 정사각형의 사리공(사리를 모시는 공간)이 드러났다. 깊이는 19㎝이다. 비단 보자기가 덮여 있는 사리공이 드러나자마자 해체를 지휘하던 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산화하지 않도록) 유리를 덮고 가습기를 가동하라. 비닐 포장을 빨리 둘러라"고 소리를 질렀다.

 

47년 만에 외부에 드러난 붉은색이 도는 보자기 밑에는 바닥이 없는 구멍을 뚫어놓은 철제 덮개가 있고 그 안에 보석장식이 달린 금동 사리외합이 향나무 조각에 쌓여 있었다. 사리가 드러난 오후 4시 40분경엔 돌연 천둥이 치고, 우박과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석가탑은 일부 석재에서 균열 등이 발견돼 2010년 12월 16일 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를 결정했고, 지난해 9월 해체를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상륜부(上輪部·찰주 위에 석물로 된 장식물)가 모두 해체됐고, 최근 3층 옥개석도 해체됐다. 이날 2층 옥개석을 열고, 사리 장엄 구를 수습한 것이다.

 

이후 석가탑 안에 재봉안된 은제 사리 호와 목제 사리병을 제외한 28건은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현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따라서 이날 모습을 드러낸 사리장엄구는 사리와 몇몇 유물을 제외하면 47년 전에 넣은 복제품이다.

 

당시 발견된 '불국사 서 석탑 중수기'에는 부처님 진신사리 47과가 유리제 사리병에 들어있다고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1966년 사리함을 개봉해 조사한 결과, 유리제 사리병에는 46과의 사리만 존재했고, 사리가 1과씩 들어있는 은제 사리 호와 목제사리호가 각각 발견돼 석가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모두 48과이다.

 

배 실장은 "따로 담긴 2과의 사리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점을 볼 때 1038년 이후 최소 1차례 이상 더 수리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현재 확인된 사리는 은제 사리합에 들어 있던 1과다. 목제 사리합은 열리지 않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리제 사리병에 들어 있던 46과(추정)는 서로 달라붙어 있어 추후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정밀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한다.배 실장은 또 "은제 사리 호와 목제 사리병, 그리고 사리를 다시 탑 속에 넣어 재 봉안할지 여부는 더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국사는 수습한 사리를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고 내년 3월까지 석가탑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연구소는 석가탑의 기단부분을 6월까지 해체한 뒤, 내년 6월 무렵 복원을 완료할 예정이다. 이번 해체 복원에는 총 30억원 규모의 예산이 책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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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헙뉴스/경주 문소영 기자 2013.4.2>

 

↑출토된 사리함.

 

↑해체 보수중인 사리탑의 사리공에서 수습한 사리장엄구를 분리한 모습.

 

 

 ↑무설전에 이윤되기전 불국사 주지실에서 기자들에게 공개한 사리1과.

   앞줄 왼쪽의 흰색원 모양의 아주작은 것이 사리다(2013년 석가탑 해체시)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세워진 불국사 삼층석탑은 높이 8m20㎝로 삼국시대의 전통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는 대표적인 석탑이다. 석가탑으로 불리는데, 본래 명칭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다. 또 무구광정탑(無垢光淨塔), 서석탑(西石塔)으로 불렸다.

 

석가탑 해체복원공사로 인하여 수습된 사리 1과를 국립문화재연구소로부터 인계받은 불국사는 이날 오후4시50분부터 무설전에서 '진신사리 친견법회 입재식'을 거행했다. 1과 외에 다른 사리들도 수습하고자 했지만, 봉인된 사리호(병)을 개봉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존처리과정을 거친후 불국사로 이운하기로 결정했다

 

입재식은 반야심경과 배명선 단장의 경과보고, 헌화, 불국사 관장 종상스님의 축원, 불국사 주지 성타스님과 변영섭 문화재청장의 인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불국사 총지당에서 수습된 사리 1과를 무설전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고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우박과 비가 쏟아지기도 했다.

 

불국사 주지 성타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사리를 수습한 후에 비과 왔는데, 이것은 중생들의 고뇌를 씻어주기 위한 부처님의 뜻과 다르지 않다"면 "오늘 우박이 갑자기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주지 성타스님은 "1300년 만에 처음으로 석가탑 진신사리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행사를 하게 됐다"면서 "우리시대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소중한 인연을 맺는 것은 홍복(洪福)"이라고 말했다.

 

총무원 문화부장 진명스님은 "석가탑이 무사히 해체 보수되어 국민 곁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사리를 수습하는 동안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부장 진명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이 세세생생 잘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불사가 잘 이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수습하지 못한 사리와 사리장엄구는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이송해 조사와 보존처리를 진행한 후 재봉안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배병선 경주석조문화재보수정비단장은 "은제 사리호에서 나온 사리 1과만 우선 불국사에 모셔 친견법회를 하기로 했고, 다른 사리호에 있는 사리들은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불국사로 이운하기로 협의했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46과가 들어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리호(녹색사리병)는 함께 들어있는 향이 녹아 붙는 응착 현상 때문에 사리가 분리되지 않는 상황이고, 장방형 사리함 안에 있는 목제(木製) 사리호는 입구를 밀봉한 마개가 겉돌기만 하고 열리지 않아 수습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배병선 단장은 "자칫 잘못하면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문화재청과 불국사가 상호 협의하여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정밀 진단을 거쳐 보존처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ㅣ글쓴이 : 솔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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