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운금루기(雲錦樓記) -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운금루기(雲錦樓記) 지은이 : 이제현(李齊賢) 세상에서 구경할 만한 경치가 반드시 궁벽한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도읍한 곳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도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그러나 조정에서 명예를 다투고 저자에서 이익을 다투다 보니, 비록 형산(衡山)ㆍ여산(廬山)ㆍ동정호(洞庭湖)ㆍ소상강(蕭湘江)이 한 발 내디디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도 의외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왜 그런가 하면 사슴을 쫓아가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금을 움켜 잡으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하며 가느다란 가을 새의 털끝을 볼 줄 알면서도 수레에 가득 실은 섶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으면 눈이 다른데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재..

청주목사 모촌 이공 행장(行淸州牧使茅村李公行狀)/재령이씨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청주 목사(行淸州牧使) 모촌(茅村) 이공(李公) 행장(行狀) 갈암 이현일 찬(葛庵 李玄逸 撰) 공의 휘는 정(瀞)이고 자는 여함(汝涵)이며, 그 선조(先祖)는 월성인(月城人)으로, 신라 시조의 좌명 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고려 때 휘 우칭(禹偁) 이라는 분이 있어서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본관을 삼아 스스로 구별하였다. 증조는 휘 중현(仲賢)으로 병조 참지를 지냈고, 조는 휘 무(珷)로 영남 서도 수군우후(嶺南西道水軍虞候)를 지냈다. 고(考)는 휘 경성(景成)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그 5세조 증 병조 참의 휘 오(午)로부터 비로소 함안(咸安)의 모곡리(茅谷里)에 거주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다대포객사(多大浦客舍)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3호 명 칭 다대포객사(多大浦客舍) 분 류 관아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사하구 다대동 산144 소유자 부산광역시 관리자 사하구 객사는 관아(官衙)건물의 하나로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고을의 수령(守令)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大闕)을 향하여 망배(望拜)를 드리던 곳이며 또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정당(正堂)과 그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 객사는 정당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대포는 옛부터 왜구(倭寇)를 막기 위한 군사(軍事) 요지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경상좌도(慶尙左道) 7진(七鎭)의 하나가 되었으며 부산진(釜山鎭)과 함께 다른 진보다 더 중요시 되었던 곳이다. 이 건물의 초창(初創)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만남재(萬南齋)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48호 명 칭 만남재(萬南齋) 분 류 사묘재실 수 량 1동 지정일 1974.12.10 소재지 경북 고령군 쌍림면 평지리 241 소유자 박광동 관리자 박광동 이곳은 고령박씨(高靈朴氏) 시조(始祖)의 본 고향이며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유명한 어사 (御使) 박문수(朴文秀)의 선조의 묘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이 재실(齋室)은 선산(先山)을 지 키고 문중회의(門中會議)를 열기 위해 현종(顯宗) 11년(1670)에 건립하였으며, 1974년 12월 10일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한상질과 권준의 분묘 판결

■ 주인이 바뀐 한상질(韓尙質)과 권준(權準)의 고려벽화묘 2004년 12월 대법원은 분묘기지권에 대한 청주한씨 문열공파종중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 분묘의 피장자는 청주한씨 한상질[韓尙質,1350(충정왕 2)∼1400(정종 2)]이 아닌 구안동권씨 권준[權準,1281(충렬왕 7)∼1352(공민왕 1)]이며 안동권씨창화공파 종손 권혁홍에게 분묘기지권이 있다고 최종판결하여, 6백여 년간 청주한씨 문열공파에서 관리, 수호해오던 무덤의 주인을 하루아침에 바꿔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앞의 묘가 창화공(昌和公) 권준(權準)의 묘이고 뒤의 묘가 문열공(文烈公) 한상질(韓尙 質)의 묘인데 청주한씨 문열공파종중에서는 권준의 묘를 한상질의 부인묘로 알고 600여 년간 묘셔왔다. ◇두분의 인측관계는 권준(權準)이 한..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저자 : 박팽년(朴彭年) 조선 초기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1417년(태종 17) ~ 1456년(세조 2)》의 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1650년경에 7대손 박숭고(朴崇古)에 의하여 수습ㆍ편집되었고,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3권 3책 중 제1권 1책으로 합집(合集)되어 1658년 외손(外孫) 이경억(李慶億)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본 문집에는 시(詩) 29수와 문(文) 42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제목 아래 《동문선(東文選)》ㆍ《대동시림(大東詩林)》ㆍ《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추강기사(秋江記事)》 등 인용 서명과 창작 배경, 수습 경위 등을 소주(小註)로 밝히고 있다. 산문류(散文類)는 부(賦), 전(箋), 잠(箴), 송(頌)과 문(文)으로 분류하여 편차하였다..

비석(碑石)의 종류

■ 비석(碑石) 1. 비석(碑石)이란? 고인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로 비(碑), 빗돌, 석비 등 여러 말이 있 다. 그리고 비석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이라 하여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사당 문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말뚝에서 비롯되었 다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貴人)의 관을 매달아 구덩이 안에 공손히 내려 놓기 위하여 묘광(墓壙)(무덤구덩이)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한다. 그 돌을 다듬고 비면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이며, 당시는 비석이 아닌 각석(刻石)이 라 하다가 이것을 비석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전한 말기나 후한 초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비석..

김재석 선생의 만장(金在錫/英陽人)과 간찰

영천출신의 학자로《希巖遺稿》를 남긴 희암(希岩) 김재석(金在錫/英陽人) 선생의 丁未(1907)年 간찰과 만장(挽章)이다. 44 × 20.8cm 등 ●김재석(金在錫), 1857~1925.때의 유학자.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중(極中), 호는 희암(希岩). 용산(龍山) 우성(宇聲)의 아들로 막내숙부 연호(蓮湖)에게 처음 글을 배웠고, 뒤에 종형 재명(在明)에게 배웠다. 이만인(李晩寅)의 문인으로 자질이 매우 영특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나이가 들어갈수록 학문의 경지가 더욱 깊었다. 과거에 낙방한 뒤로는 독서와 과농(課農)을 지도하는데 힘썼다. 경북 영천에는 김재석(金在錫)을 기리는 원관정(遠觀亭)과 그의 형, 김재영(金在濚)을 기리는 난포정(蘭圃亭)이 세워져 있다.

만사와 만장이란?

만사(挽詞)란?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을 천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 만장(挽章)이란? 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을 천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 크기>가로 39cm x세로 1m 15cm 크기>가로 39cm x세로 1m 15cm 일제강점기 慈善. 育英事業家 誠菴 孫昌源 장례시 挽章 2점이다. 한말의 巨商이며 京城孤兒院에 백미 30석을 매년 기증하고 1921년 避病院建立基金 2000원을 기부하고 1922년 경기도 고양에 인창고등학교의 前身인 仁昌義塾을 설립하였던 육영사업가 성암 손창원(1860 ~ 1926) 葬禮時 사업가 李思欽, 敎育者 朴健鍾이 쓴 만장 2점인데. 두터운 한지에 목판 양식의 종이에 썼다.

태종의 후궁 명빈김씨 묘

■태종의 후궁 명빈김씨 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 14번지 명빈묘(明賓墓)는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조 제3대 태종의 후궁인 명빈김씨(明嬪金氏)의 묘이다. 명빈(?~1479년)은 지돈령부사(知敦寧付事) 안정공(安靖公) 김구덕(金九德, 안동김씨 안정공파의 파조/중시조 방경→맡아들 선→셋째아들 승택→첫째아들 묘→셋째아들 안정공 구덕의 딸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태종 11년(1411) 11월 명빈으로 책봉(冊封) 되었고, 성종 10년(1479년) 6월 5일에 졸할때 까지 태종 부터 성종에 이르는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켰으나 태종과의 사이에는 숙안옹주외에는 후사가 없다. 묘역의 석물(石物)은 표석 1기, 문인석 1쌍, 상석(혼유석) 향로석 등이 있다. 명빈김씨의 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