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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참판 이해 묘갈명(禮曹參判李瀣墓碣銘)

야촌(1) 2013. 6. 6. 19:33

〇퇴계 이황의 넷째 형임.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이공 묘갈명 병서

(嘉善大夫 禮曹參判 兼 同知春秋館事 五衛都摠府副摠管 李公 墓碣銘 幷序)

 

 제(第) 이황(李滉) 찬(撰)

 

공의 이름은 해(瀣)요, 자는 경명(景明)이며, 그 선조는 진보(眞寶) 고을 사람인데, 중간에 안동으로 옮겼다가 또 예안(禮安)으로 옮겼다. 6세조는 휘가 석(碩)이니 아전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은 휘가 자수(子脩)이니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을 섬겼고, 홍두적(紅頭賊)을 치는 데 참여해서 송안군(松安君)에 책봉되었다. 고조는 휘가 운후(云侯)이니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증조는 휘가 정(禎)이니 선산 부사(善山府使)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휘가 계양(繼陽)이니 진사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휘가 식(埴)이니 진사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직된 춘천박씨(春川朴氏)이니 사정(司正)인 휘 치(緇)의 딸이다.

공은 홍치(弘治) 병진년(1496, 연산군2)에 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숙부인 참판 우(堣)에게 배웠다. 

 

을유년(1525, 중종 20)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무자년(1528, 중종 23)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갔고, 다섯 해 만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오르고 네 번 자리를 옮겨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어 정랑(正郞)에 올랐다.

 

병신년(1536, 중종31)에 천거를 받아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이 되고 정유년(1537)에 사인(舍人)에 올라서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옮겼는데, 이 해에 내간(內艱=모친상)을 당하였다. 복을 마치고 다시 사인에 복직하고 경자년(1540)에 전한(典翰)과 사간(司諫)을 지내고 또 네 번 옮겨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임인년(1542)에 하삼도(下三道 충청ㆍ경상ㆍ전라도)에 크게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명신(名臣)을 나눠 보내어 주린 백성을 진휼하니, 공은 경상도에 임명을 받고 그 일을 위하여 계획을 잘 세우고 조처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였다. 부자에게는 나누어 줄 것을 권하고 먼 데 곡식을 옮겨 오는 등 그 처리가 모두 마땅하였고, 여염에 직접 출입하여 노고를 꺼리지 않으니 여러 고을이 소란하지 않고도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공이 복명(復命)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고, 계묘년(1543)에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갑진년(1544)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급하여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가 곧 체직되어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을사년(1545, 인종1)에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있다가 성절사(聖節使)에 충원되어 명나라 연경에 갔고, 병오년(1546, 명종 1)에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있다가 나가서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직했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충청도 관찰사에 옮기었다가 조금 후에 중추부(中樞府)에 들어왔다. 

 

경술년(1550, 명종5)에 다시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 이에 앞서 인종(仁宗)이 처음 정사를 볼 때에 이기(李芑)가 우상(右相)이 되니, 양사(兩司)가 이를 배격하여 파면하였는데, 그때 공이 사헌부의 장으로 있었으므로 이기가 이 때문에 공에게 원한을 품었다. 

 

공이 호서(湖西)에 부임해 있을 때, 유신(維新) 고을에 귀양 갔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백성 최하손(崔賀孫)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런 틈을 엿보고 고변(告變)하여 석방되고 이익을 탐하고자 하여, 그 고을 사람들이 모여서 지은 글을 도둑질하여 장차 서울로 가려 하자, 고을 사람들이 잡아 현(縣)에 보고하였다.

 

현감(縣監) 이치(李致)가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죄를 심문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보고한 공문에 따라서 심문하자 하손이 형장에서 죽었다. 이홍윤(李洪胤)의 형 홍남(洪男)이란 자는 공이 어떤 일로 인하여 자기를 비웃는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크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사간(司諫) 이무강(李無彊)은 이기의 매와 개가 되어 선비들을 많이 모함하였으므로, 공은 여러 번 그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무강이 공을 중상하여 이기에게 환심을 사고 또 겸해 자기의 분도 풀고자 하니, 홍남의 처남(妻兄) 원호변(元虎變)은 무강과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라, 이에 홍남이 호변을 부추겨서 무강에게 공을 무고하여 죄를 만들게 하니, 무강이 기뻐 날뛰며 양사(兩司)를 선동하여 공을 탄핵하되, 처음에는 공이 사사로이 고을 사람들의 전답과 노비(臧獲)를 문서에서 빼 주었다고 무고하였다가, 사헌부에서 조사하자 실상이 없음을 근심해서 다음에는 하손의 일을 고발하되 역적을 비호하였다는 죄명을 삼았으나, 무강(無彊)은 오히려 그 죄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서 또 공이 구수담(具壽聃)과 서로 붕당 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옥사가 더욱 다급해지자 어떤 이가 공에게 권하기를, “거짓으로 자복하면 죄를 면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강개하게 말하기를, “거짓으로 자복하여 살기를 구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하고 스스로 상소를 지어 올리고자 하였으나, 추관(推官)은 이기를 두려워하여 받아들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그 억울함을 살피심에 힘입어 특별히 명하여 갑산(甲山)으로 귀양 보냈으나, 양주(楊州)의 민가에서 병이 나 마침내 돌아갔으니, 이해[庚戌] 8월 14일이요, 향년 55세였다. 공은 덕성이 관후하여 용모가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재예가 숙성하여, 예서(隸書)를 잘 쓰고 우애가 돈독하여 형의 아들을 자기 아들과 같이 교육하였다. 

 

조정에 있을 때는 자신을 잘 지키는 몸가짐을 하기에 힘쓰고 절대로 시세를 좇아 세력을 따르지 않았다. 젊을 때에 김안로(金安老)와 이웃하여 살고 또 혼인[瓜葛] 관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안로가 정권을 잡자 여러 번 끌어올리려 해도 끝내 그의 농락을 받지 않았다.

 

공은 평생에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할 마음이 없었고, 오직 남의 급함을 구제하는 일에는 반드시 힘을 극진히 하였다. 이러한 마음으로 미루어 당시의 일을 보면 하손의 꾀가 시행되었더라면, 유신(維新) 온 고을 사람의 생명이 마침내 다시 혹독한 형별[湯鑊]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이것은 공이 차마 그냥 두고 보지 못할 바이며, 그 보고를 듣고 신문한 것은 그 실정을 밝혀 조정에 아뢰고자 할 뿐이었으니 어찌 그가 갑자기 죽기를 요량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무강은 수담이 죽을 때 임금에게 저촉된 말이 있었음을 알고, 드디어 공을 그 당류라고 지목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격동시키니, 그 흉한 칼날은 반드시 사람을 죽여 가루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이었으니, 아아, 또한 참혹하도다.

 

그러나 몇 년이 안 되어 나라의 의론이 비로소 정해지고 이기는 죄를 받고 파면되어 근심으로 죽고, 무강 역시 북방으로 귀양 가서 죽었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시자 관대(寬大)한 법을 써서,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억울함을 풀게 되었다. 

 

그래서 공도 본래의 관직을 돌려받아 은택이 죽은 후에 빛나게 되었다. 아아, 하늘이 선악을 갚는 것이 비록 한때는 어긋났으나 필경은 만세에 정함이 이와 같으니,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들 사이[幽明之間]에 그 오늘날의 경사로써 전날의 통독(痛毒)을 조금은 풀게 되었다고나 할까.

 

공의 아내[內子]는 연안 김씨(延安金氏)이니 가인의(假引儀) 복흥(復興)의 딸인데 다섯 아들을 낳았다. 복(宓)은 충찬위(忠贊衛) 신종손(申宗孫)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을 모시고 명나라 서울에 가다가 중도에서 죽고 후사가 없다. 

 

영(甯)은 군수 이정(李侹)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으며, 신유년(1501, 연산군 7) 진사요, 성현 찰방(省峴察訪)이다. 교(㝯)는 도사(都事) 황윤중(黃允中)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시 주부(主簿) 금응석(琴應石)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다.

 

치(寘)는 훈도(訓導) 금제(琴榟)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죽었다. 혜(寭)는 학생(學生) 이희춘(李希春)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다. 딸은 별좌(別座) 최덕수(崔德秀)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다. 공이 별세한 12월에 예안현 북쪽 연곡(燕谷) 동향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아, 우리 공이 태어나실 때는 / 噫嘻我公之生也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 어쩌면 이리도 후하였던가마는 / 其得於天者何若是之厚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는 또 어쩌면 이리도 앞에서는 형통하고 뒤에는 막혔을꼬 / 而其遇於人者又何若是之亨前而盭後耶

 

조정에 드날리며 임금의 사랑을 입을 때는 / 方揚庭而荷天寵兮

향기로운 술[黄流]이 옥잔[玉瓚] 가운데 있는 것과 같더니 / 有如黃流在玉瓚之中也

갑자기 무지개가 해를 가리니 / 倏陰虹之干白日兮

 

옥 같은 나무(주인공 지칭)가 흉포한 바람을 만났으니 어이할거나 / 柰如玉樹値凶飆之衝也

요순 같은 선조 임금이 즉위하여 훌륭한 조종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들 / 匪勛華繼照而追志兮

어찌 하늘에 뻗치는 원기를 사라지게 하였으리오 / 曷能銷斗牛之冤氛

 

심혈을 기울여 만세에 고하니 / 刳肝血而告萬世兮

반드시 이 글을 보면 분노함과 통쾌함을 느끼리라 / 其必有交憤快於斯文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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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墓碣銘。幷序

 

公諱瀣。字景明。其先眞寶縣人。中移于安東。又移于禮安。六世祖諱碩。以吏試司馬。贈密直使。其子曰諱子脩。登第事恭愍。預平紅頭賊。封松安君。高祖諱云侯。軍器寺副正。贈司僕正。曾祖諱禎。善山府使。贈戶曹參判。祖諱繼陽。進士。贈吏曹判書。考諱埴。進士。贈議政府左贊成。妣贈貞敬夫人春川朴氏。司正諱緇之女。公生於弘治丙辰。少孤。學於叔父參判諱堣。乙酉。中進士。戊子。登科。由承文院選入藝文館。五年。陞成均館典籍。四轉爲吏曹佐郞。陞正郞。丙申。薦爲議政府檢詳。丁酉。陞舍人。轉弘文館應敎。丁內艱。服闋。復舍人。庚子。歷典翰,司諫。又四轉爲直提學。壬寅。下三道大饑。朝廷分遣名臣賑飢民。公受慶尙之命。乃爲之區畫措處。極盡心力。勸分移粟。咸得其宜。出入閭閻。不憚勞勩。列邑不擾。而全活甚衆。復命。進階通政大夫。爲承政院同副承旨。癸卯。至都承旨。甲辰。陞嘉善。拜司憲府大司憲。俄遞。歷司諫院大司諫,禮曹參判。再爲大憲。乙巳。以同知中樞。充聖節使赴京。丙午。由掌隷院判決事。出按黃海道。入同知中樞兼五衛都摠府副摠管。轉漢城府右尹,忠淸道觀察使。已而入中樞。庚戌。復右尹。先是。當仁廟初政。李芑爲右相。兩司擊去之。時公爲憲長。芑以是銜公。公之在湖西也。維新有逃還徙民崔賀孫者。覬欲因告變。得放饕利。竊取其鄕人約會文字。將走京。鄕人捕告于縣。縣監李致報監司。請訊治。依報移文。而賀孫杖斃。李洪胤之兄洪男。聞公有因事嗤己語。大以爲憾。司諫李無彊爲芑鷹犬。多構陷士類。公屢過其門而不入。無彊欲中公以悅芑。兼快己憤。洪男妻兄元虎變。無彊死交也。於是。洪男嗾虎變。構公於無彊。無彊喜躍。倡兩司劾公。初。訐公以私漏維新人土田臧獲。法司推覈。患無實狀。次發賀孫事。至以庇護逆賊爲名。無彊猶恐其獄不成。又誣公與具壽聃相爲朋比。獄事益急。或勸公誣服則可免。公慨然曰。僞服以求活。不如死也。自草疏欲上之。推官畏芑。不聽入。賴上察其冤。特命流公于甲山。行至楊州民家。發病遂卒。是歲八月十四日也。享年五十五。公德性寬厚。儀觀丰秀。才美夙成。工隷書。篤於友于。敎育兄子如己子。其立朝行己。務自守。絶不爲趨時附勢。少嘗與金安老。居止接隣。且有涉瓜葛。以是。安老當國。屢相汲引。公終不受牢籠。平生無害人自利之心。惟濟人之急。則必極力而爲之。推此心以觀當日之事。豈不以賀孫之計得行。則維新闔境人性命。遂再沈於湯鑊矣。此公之所不忍。其所以聽訊報者。欲得其情而聞於朝耳。豈料其遽斃哉。況無彊知壽聃所坐死。語有觸上。遂指公爲其黨。以震激天怒。其凶鋒所加。必欲虀粉人而後已焉。噫。亦慘矣。雖然。不出數年。國論始定。芑以罪廢憂死。無彊亦竟死於禦魅。逮乎今上龍飛。大擧曠蕩之典。凡存亡冤衊。無不灑雪。而公乃得給還職秩如初。恩賁泉壤焉。嗚呼。皇天之降報善惡。雖舛於一時。而卒定於萬世者如此。幽明之間。其可以今日之悲慶。而少有洩於昔日之痛毒也哉。公內子延安金氏。假引儀復興之女。生五男。曰宓。娶忠贊衛申宗孫女。侍公赴京。道卒無後。甯娶郡守李侹女。生一男一女。辛酉。進士。省峴察訪。㝯娶都事黃允中女。再娶主簿琴應石女。生三男。寘娶訓導琴榟女。早卒。寭娶學生李希春女。生三男。女適別坐崔德秀。生一男二女。其年十二月日。葬于禮安縣北燕谷東向之原。銘曰。

 

噫嘻。我公之生也。

其得於天者何若是之厚。

而其遇於人者又何若是之亨前而盭後耶。

 

方揚庭而荷天寵兮。

有如黃流在玉瓚之中也。

倏陰虹之干白日兮。

 

柰如玉樹値凶飆之衝也。

匪勛華繼照而追志兮。

曷能銷斗牛之冤氛。

 

刳肝血而告萬世兮。

其必有交憤快於斯文者矣。

 

자료 : 퇴계선생문집 제4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