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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신분이동

야촌(1) 2013. 4. 28. 14:32

조선후기의 신분이동

 

[서론]

 

조선 중기에 이르러 양반 중심의 사회에 신분제의 변동이 일어났다.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결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왕조 교체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양반계층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층이 생겨나는 한편 전쟁 후의 양반사회는 계속적인 당쟁을 통해 그 자체를 분화시켜갔다.

 

양반 중 계속 정권에 참여한 양반을 벌열(閥閱), 정권에서 소외 되어 지방에 토착하여 기반을 가진 양반을 향반(鄕班), 향반 중에서 가세가 몰락하여 쇠잔한 양반을 잔반(殘班)이라 하였다. 향반은 벌열에 비하여 지위가 떨어졌으며, 잔반은 대부분 소작농이 되었는데 잔반의 수는 점차 늘어갔다.

 

몰락해가는 양반층은 그 사회경제적 처지와 이해관계가 실학자들처럼 농민층의 편에 가까워지기는 했으나 아직 그들과 일체화하지 못한 경우가 있는 한편, 뒷날의 이필제(李弼濟)․전봉준(全琫準) 등과 같이 농민층과 이해가 거의 일치해져서 그 역사의식을 높이고 농민층을 위한 정치적 변혁까지도 감행할 수 있는 처지로 바뀌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중인계층에도 신분상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적서(嫡庶)의 차별도 조금은 개선되어 규장각(奎章閣)의 요직인 검서관(檢書官)에 서얼 출신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역관들은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새로운 문물에 접하여 견문도 넓히고 사무역으로 부를 축척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여갔고, 의관은 그 전문적 기능으로서, 서리들은 행정능력이나 문학적 소양으로 새로운 사회적 위치를 주장해갔다.

 

그리고 양인(良人) 신분이 대부분인 농민층의 일부는 왕조 후기를 통해 꾸준히 진행된 신분적 분해를 통해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여갔고, 한정된 조건 속에서나마 정치의식도 단계적으로 향상되었다.

 

농민 중의 일부는 농업기술의 발달, 농업경영방법의 개선, 상업적 농업의 발전 등으로 부농이 되거나 서민지주(庶民地主)가 되기도 하였다. 또, 납속책(納粟策)으로 공명첩(空名牒)을 사서 신분을 높여 양반이 지던 군역의 부담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한편 대다수의 농민은 영세 소작농민이나 임금노동자의 처지로 떨어져 갔다.

왕조 후기에는 종래 권력을 배경으로 해서 성립된 중세적 지주와 그들에게 예속된 전호(佃戶-예전에,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땅값을 치르던 농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정된 사회관계가 차차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신분적으로 가장 낮은 처지에 있었던 노비(奴婢) 계금의 경우도 신분해방의 길을 빠른 속도로 넓혀갔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노비문서가 불타버린 데다 국가에서 군사적․재정적 이유로 신분상의 제약을 점차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전쟁 후의 통치체제 이완을 틈탄 노비 계금의 피 역저항(避役抵抗)과 전쟁피해 복구과정을 통한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은 법제적으로도 신분해방의 길을 확대시켰다.

 

17세기 이후 점차적으로 실시된 노비 종모 법(從母法)은 그 중요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고 1801년에 시행된 관노비의 해방은 그 큰 성과였다. 조선왕조 후기를 통한 양인, 노비 등 피지배계츨의 분해 및 신분해방은 신분제의 변동으로 양반호가 현저히 증가한 반면 노비호가 격감되었으니, 노비에서 양인으로, 양인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이 많이 이루어지게 된다.

 

본분에서는 신분상승으로 나타나는 양반, 농민, 노비의 변화와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양반 신분의 증가에 대해 문헌자료(文獻資料)와 장부상(帳籍上)의 직역(職役)을 통해서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 알아보겠다.

 

[본론]

 

1. 중세적 신분질서의 붕괴

 

(1)양반사회의 변화

 

16세기를 통해 실시된 군적 수포 법(軍籍收布法)은 사회 신분 면에서도 큰 영향을 남겼다.

즉 군포 부담을 지느냐 안 지느냐에 따라 양반과 양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곧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양반과 양인 사이의 구분은 크게 흔들렸고, 양반의 권위는 실추되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의 조선왕조 사회는 농 병일 치제가 무너지면서도, 즉 군적 수포 법이 실시되면서도 그것에 대신할 용병제와 같은 새로운 군사제도가 성립되지 않았고, 행정체제의 이완으로 정군(正軍)이 될 수 있는 양인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었다.

 

정부군의 확보를 위해 공사천(公私賤)이나 백정 등의 천민층도 군역에 충당되었고, 또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공 농상(戰功論賞)을 강화했다. 임진왜란 중의 군공청(軍功廳) 보고 1)에 따르면 “공․사천 인도 적 1명을 베면 면천(免賤)하고 2명을 베면 우림위(羽林衛)에 소속되게 하고 3명을 베면 허통(許通)하고 4명을 베면 수문장(守門將)을 제수하는 규정을 이미 시행하고 있다.”

 

“이미 허통 되고 관직을 받았으면 사족(士族)이나 다를 것이 없으며 공․사천뿐만 아니라 제인(才人)․ 백정(白丁)․ 장인(匠人)․ 산척(山尺-산을 재는 데 쓰는 자) 등의 미천한 신분도 높은 관직으로 뛰어오른 자가 있다.”라고 했다.

 

천인 신분에 대한 군공 논상은 적을 죽인 수가 많아도 서반(西班) 종6품직의 주부(主簿) 이상을 주지 말고 그 이상은 다른 방법으로 상을 주기로 결정한 규정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비록 서반의 하위직이기는 하지만 천인 신분이 양반 신분을 얻고 벼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양반 신분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더구나 “요즈음 군공(軍功)이 크게 넘쳐서 3품직을 얻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공으로 얻는 직위의 한계도 엄격히 지켜지기 어려웠다. 이 같은 일은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적의 목 하나를 벤 자는 공․사천은 면천하고, 급제하여 관직을 가진 자는 숭진 시키며, 2명을 벤 자는 가자(加資) 논상”하기로 했다. 거듭된 대규모 전쟁으로 양반사회는 그 문호가 넓어지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만큼 권위도 떨어져 갔던 것이다.

 

전쟁기를 통해 재정적 타격을 받은 조선왕조 정부는 특히 군량미 조달을 위해 소위 납속 보관(納粟補官)의 길을 넓게 열었고 그것을 통해 특히 서얼․향리층이 많이 양반으로 상승했다.

 

임진왜란 중의 납속 사목(納粟事目)에 의하면 향리의 경우 30 섬을 바치면 면역되어 참 하영 직(參下影織)을 받을 수 있었고 80 섬을 바치면 동반(東班)의 실직(實織)을 받을 수 있었다.

 

서얼(庶孼)의 경우도 5섬만 바치면 겸사복(兼司僕)이나 우림위(羽林衛), 혹은 6품의 서반 군직(西班軍織)을 받을 수 있었고 50섬이면 5품 영직, 60섬이면 동반 9품, 80섬이면 동반 8품, 100섬이면 동반 6품을 받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만 있으면 양반 신분을 얻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얼은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자기 도태 작용으로 생겨난 하나의 계층이었으나 왕조 후기에는 납속 보관 등의 기회를 타서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는 길이 열렸다. 18세기 후반기 정조대(正祖代)에 와서는 서얼 소통(疏通)이 이루어져서 규장각 검서(奎章閣檢書)등에 임명되었다. 납속 보관을 통해 비 양반 층이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는 일은 서얼이나 향리에 한정되지 않았다.

 

양인은 물론 천인의 경우도 재력만 있으면 일단 속량(贖良-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했다가 다시 양반 신분으로 오를 수 있었다. 조선왕조 정부가 재정적 곤란에 빠질 때마다 강제로 까지 발매한 공명첩(空名帖)은 재력 있는 비 양반 층이 양반 신분을 얻는 가장 쉬운 길의 하나였다.

 

거듭된 전쟁으로 양반층의 일부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데다가 전쟁 후에 더욱 격심해진 당쟁 과정을 통해 권력권에서 떨어져 나간 양반 인구가 많아졌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해간 반면 전쟁 공로, 납속, 공명첩 매입 등을 통해 많은 비 양반 신분층이 양반 신분을 얻게 되어 양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갔다.

 

이 때문에 양반의 권위는 점점 떨어져서 양반이란 호칭마저 그 본래의 뜻이 변하면서 하나의 속화된 대인 칭(對人稱)으로 바뀌어갔다. 15~16세기까지의 조선왕조 전반기에는 지배 계층인 양반의 권위를 세우고 그 정치․경제․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양반수의 증가를 억제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왕조 초기에 성립된 서얼 금고법(庶孼禁錮法) 등은 바로 양반층의 수적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자기 도태 기구의 하나였다. 그러나 16세기경부터 이와 같은 규제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양반 인구는 현저하게 증가했다.

 

조선왕조시대 전체에 걸친, 그리고 전국적인 신분별 인구통계를 근거로 한 양반 인구의 수를 밝힐 만한 자료는 아직 구할 수 없다. 다만 특정의 지역의 호적대장을 부분적으로 분석해서 호적상에 나타난 신분별 인구수의 변화 현상을 밝힌 연구들이 있다.

 

2)양인이나 천인이 납속(納粟)이나 공명첩 매입을 통해 호적상으로 양반이 되었다 해서 그들의 사회적 위치마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로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법제상으로 양반 신분을 얻은 그들은 세대(世代)를 거듭함에 따라 법제적 신분과 경제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적으로도 실질적인 양반으로 변해갔다.

 

먼저 상당히 오래된 연구업적이긴 하지만 경상도 대구(大邱) 지방의 호적대장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문호 개방 이전에 이미 양반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음이 실증된다.

 

자료에 따라 1690년을 제1기로, 1729년과 1732년을 제2기로, 1783년과 1786년, 1789년을 묶어 제3기로, 1858년을 제4기로 잡은 이 연구에 의하면, 각 신분별 호수(戶數)가 전체 호수에서 차지한 비율은 표 1과 같다.

 

<표 1>대구지방의 신분별 호구수

구분
양반호구수 상민호구수 노비호구수 합 계
호 수 백분비 호 수 백분비 호 수 백분비 호 수 백분비
1기 290 9.2 1,694 53.7 1,172 37.1 3,156 100
2기 579 18.7 1,689 54.6 824 26.6 3,092 100
3기 1,055 37.5 1,616 57.5 140 5.0 2,810 100
4기 2,099 70.3 842 28.2 44 1.5 2,985 100

 

표1에서와 같이 제1기 즉 1690년에서 제4기 1858년까지 168년 사이에 전체 호수 중에서 양반호가 차지하는 비율은 9.2%에서 70.3%로 무려 76배나 증가했다. 대구가 도회지여서 경제력 높은 비양반층이 많았고 그들이 양반신분을 사는 경우가 많아서 다른 곳에 비해 양반호 비율이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제1기인 1690년의 양반호 비유이 9.2%나 된 것은 15세기나 16세기에 비해 이미 양반호 비율이 상당히 높아진 것이라 생각되며, 더구나 그 이후 양반호 비율의 급증은 놀랄 만한다. 더구나 이 연구에 의하면 조선후기 양반호 1호당 평균 인구는 왕조기와 큰 변호가 없어서 제1기에는 3.5명이었고 제4기에는 3.1명이었다.

 

1호당 평균 인구가 크게 감소되지 않았으면서 양반호의 비율이 7.6배나 증가했다는 사실은 곧 실제로 양반인구가 그 비율만큼 증가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경상도 지방인 蔚山의 호적대장을 분석한 결과도 대구의 그것과 비슷한 추세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1729년, 1765년, 1804년, 1867년 등 4기분의 울산 호적대장을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는 표2와 같다.

 

<표2> 울산지방의 신분별 호구수



구분
양반호구수 상민호구수 노비호구수 합 계
호 수 백분비 호 수 백분비 호 수 백분비 호 수 백분비
1729년 168 26.29 382 59.78 89 13.93 639 100
1765년 275 40.98 313 57.01 11 2.00 549 100
1804년 347 53.47 296 45.61 6 0.92 649 100
1867년 349 65.48 181 33.96 3 0.56 533 100

 

대구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울산의 제1기인 1729년은 시기적으로 대구의 제2기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양반호의 비율이 훨씬 높다. 반면 울산의 제4기인 1867년은 대구의 제4기인 1858년보다 9년 뒤인데도 양반호 비율은 대구보다 더 낮다.

 

당시의 울산이 대구보다 도회지적 성격이 적었던 곳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제1기와 제4기 사이의 차이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양반호 비율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었음은 두 지바에서 모두 확인된다.

 

이 두 경우가 모두 영남지방의 사례여서 일반성이 약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조선왕조시대의 영남지방은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고 양반과 노비 인구도 또한 가장 많았다.

 

영남지방은 ‘추로지향(鄒魯之鄕)’ 등으로 불리어 신분질서의 뿌리가 깊은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영남지방의 양반수 증가로 인한 그 권위의 실추와 중세적 신분질서의 와해 현상에 비추어 다른 지방의 추세를 전망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약용이

“나라 안의 사람이 모두 양반이 되면 양반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 말은 이와같은 양반수의 중가추세를 근거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무신정권 시기의 소위 ‘능문능리(能文能吏)’ 즉 행정 실무자층으로서의 사대부층의 등장을 출발점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는 조선왕조시대의 양반은 왕조의 성립과 함께 일단 재조(在朝)세력과 재야(在野) 세력으로 나뉘었다.

 

이후 훈구파(勳舊派)로 불린 재조세력의 귀족화와 부패화가 심해지면서 사림파(士林派)로 불린, 상대적으로 덜 부패한 재야세력의 정권참여 기회가 마련되어 정권의 신선함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반수의 증가도 강력히 통제하면서 양반사회 전체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은 17세기 이후에는 양반수가 계속 증가하면서 격심해진 당쟁을 통해 전체 양반사회에서 집권양반층의 범위가 좁아져 閥閱을 형성해가다가 결국 극히 제한된 몇 가문의 양반층만이 정권을 계속 專斷하는 세도정권이 성립되었다.

 

집권양반층에서 탈락한 양반층은 鄕班․土班이 되어 지역사회의 실권을 쥐고, 좁아진 집권양반층으로 이루어진 벌열정권이나 더 좁아진 세도정권을 뒷받침하면서 어느정도 사회경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중 극히 일부가 간혹 벌열세력이나 세도정권에 의해 山林이란 이름으로 발탁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부패하고 탄력성 잃은 정권이 신선미를 내세우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향반․토반의 대열에서마저 떨어져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전혀 가지지 못한 놀락양반의 경우도 그 처지는 몇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었다. 첫째는 자영농으로, 심하게는 佃戶로까지 떨어져서 완전한 농민이 되거나 혹은 상공업으로 전업하여 생계를 유지한 경우다

 

권력권에서 탈학하여 낙향한 채 몇세대를 지나면 점점 노비와 농토를 잃고 소규모의 자영농이 되었다가 다시 소작노으로, 심하게는 머슴으로까지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의 후예이면서도 술장사, 돗자리 장사, 망건 장사를 하거나 匠人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몰락 양반의 두 번째 유형은 실학자와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중앙권력권에서 제외되었으나 아직 농민이나 상인․수공업자로까지 전락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토반에 끼어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가질 만한 처지에 있지 못한 계층이다.

 

겨우 학문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그 학문의 목적을 벼슬길로 나아가는 데 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처지가 비슷해진 농민층 및 상인층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두었다. 나아가서 그 학문적 목적을 집권 벌열층 중심이 아닌 국왕과 국민 전체를 위한 정치․경제․사회 체재를 수립하는 데 두었던 몰락양반층이었다.

 

몰락양반의 세번째 유형은 19세기 이후 빈번히 일어난 민란의 지도층에서 볼 수 있다.

실학자와 같은 유형의 몰락양반층은 그들의 처지가 비록 권력권에서 제외되고 오히려 농민층에 가깝긴 했어도 그 경제적․사회적 위치가 아직 농민층과 일체화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와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개략주의적 이론을 제시할 뿐 이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욱 몰락해서 사회경제적 처지가 농민층과 거의 일체화한 일부 양반층은 직접 민란에 가담하고 그것을 지도했다.3)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지배층으로 등장한 양반계급은 특히 17세기 이후 비교적 빠른 분화작용을 일으켜 벌영화 귀족화한 집권양반층, 지역사회의 실권을 쥔 토반, 피지배층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거나 나아가서 그들과 처지가 거의 일체화하여 농민전쟁의 지휘부가 된 殘班 등으로 크게 나뉘었다.

 

그러나 문호개방 이후에도 이들 잔반이나 비양반의 상승부가 집권세력으로 상승하지 못하고 계속 귀적적 집권양반층에 의해 권력이 전단되다가 결국 외국의 침략에 의해 무너지고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농민층의 분화

 

조선왕조시대의 농민을 크게 나누면 宮房田이나 官屯田을 경작하는 농민, 중앙의 양반관료층 및 지방 토호․향반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민, 그리고 약간의 자작농민층을 구성되어 있었다.4) 왕조 후기로 오면서 상업과 수공업 및 화폐경제의 발달, 농업경영방법의 발달로 농민층이 차차 분화하기 시작했다.

 

지주층에 예속된 소작농민과 소규모 경영의 자작농으로 이루어졌던 고정된 농민사회가 무너지면서 양반층의 일부가 소작농민이 되기도 하고 농민의 일부가 상대적 富農層으로 부상했으며, 다른 일부의 농민은 상공업인구로 전환하거나 혹은 농업노동자로 전락해갔다. 학자에 따라 ‘經營型富農’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시기의 부농층은 자작농에서도 나타나고 소작농에서도 성장했다.

 

어느 경우이건 지주와는 달리 스스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지 확대, 영농방법 개선, 상품작물 재배 등을 통애 富를 축적해갔다. 자작농이 농업경영방법을 개선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으며 지주층의 농토, 특히 궁방전이나 관둔전을 借耕하는 소작농민도 영농방법 개선 등을 통해 농업노동자를 고용하는 상대적 부농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왕조 후기에 와서 이같은 부농층이 성장한 데에는 몇가지 사회경제적 변화가 뒷받침되었다. 먼저, 16세기 科田法이 완전히 해체되고 곧 대규모 전쟁을 겪게 됨으로써 권력층에 의한 民田 겸병이 심해지고 지주층의 땅이 확대되어 토지를 상실한 농민이 많아졌다. 거기에 17~18세기를 통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 농민층의 분화를 더욱 촉진했다.

 

토지겸병과 인구증가로 비농업인구가 증가하고 자급자족적 경제질서가 일부 무너지면서 농업의 상업화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농업노동 인구도 분출되었다. 농춘사회의 분화로 증대되는 농산물 수요에 부응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이같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상대적 부농층으로 성장한 농민들이 부를 축적해간 구체적 방법으로는 첫째 농업경영규모의 확대와 둘째 상품생산을 들 수 있다. 일부 농민층이 부를 축적하는 방법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작지의 확장이다. 자작농의 일부가 농토를 확장하고 소작농의 경우도 소작지를 확장하거나, 혹은 陣田이나 新田을 개간했다.

 

논농사에서의 모내기의 발달은 제초작업에서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적은 노동력으로도 廣作을 할 수 있었으며 가족노동의 한계를 넘어 임노동자를 이용한 넓은 땅의 경작도 가능했다.

 

부농층이 경작지를 확대하는 방법은 빈농들이 방매하는 농토를 매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 소작권을 매입하거나 退賭地를 매입하는 방법이 있었다.

 

소작권 매입은 주로 소작료가 헐한 곳이나 관리가 허술한 땅에서 이루어졌으며 궁방전이나 관둔전이 그 좋은 대상이 되었다. 궁방전이나 관둔전의 소작료와 임노동에 의한 경작사이에서도 일정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퇴도지의 매입은 농민들이 지주로부터 일정한 기간 경작권을 사서 토지경영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생산물의 상품화와 그 時價의 변화를 통해 이윤폭을 넓힐 수 있었다.

 

부농층이 부를 축적하는 또하나의 길은 상업적 농업경영에 있었다. 왕조 후기 사회는 인구증가, 특히 비농업인구의 증가로 농산물의 상품화가 비교적 진전되고 경작지를 확대한 부농층은 그것을 통해 부를 축적해갔다. 요컨대, 이들 부농층은 조선왕조 후기의 농민분화 과정에서 형성된 하나의 새로운 계층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종래의 양반지주층과 이해관계를 달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양반관료층의 비호 아래 경제적 이윤 증대를 도모하면서 영세농민층 및 빈농층에 대한 수탈자의 위치에 있기도 했다.

 

조선왕조시대에 官府에서 필요한 노동력은 원칙적으로 농민에 대한 賦役동원으로 충당되었고 양반지주층의 노동력은 奴婢노동이나 佃戶의 부역노동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왕조의 후기로 접어들면서 정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도 농민들의 거부로 부역동원이 불가능해지면서 점차 임금고용으로 바뀌어갔다.

 

군사 제도상에서 농병일치제도가 무너지고 일부 용병제가 생겨난 것과 같은 방향에서 관청 수공업장에 동원되는 匠人 등 기술노동력도 부역동원제에서 고용제로 바뀌어갔다.

 

심지어 중앙관청의 西班衙前인 조예․羅將과 궁궐이나 각 관청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差備軍5)도 부역동원에서 고용제로 변해갔으며, 지방관청에서 주관한 築城․治道 공사에 동원되는 농민들도 임금고용제로 바뀌어갔다. 완조 후기에 나타난 이같은 변화는 우선 왕조의 부역동원체제에 대해서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役 부담층의 避役저항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의 인구증가와 토지겸병의 심화, 그리고 농촌에서의 빈부차의 심화로 농토를 잃고 임노동자화할 수밖에 없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노비계급의 신분해방

 

조선왕조시대로 들어오면서 鄕․所․部曲은 소멸되어 그 주민이 양인 신분으로 해방되었으나 노비계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왕조의 전반기까지는 그신분해방의 길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조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특히 두 차례 큰 전잴을 겪으면서 노비신분해방의 길도 크게 확대되어갔다.

 

6) 전쟁에서 적을 베면 관노나 사노를 막론하고 從良될 수 있었으며, 이밖에도 임진왜란 때는 公․私賤 武科가 설치되어 奴들의 從良의 길이 되었다.

 

노들이 무과를 보아 합격하면 양인 신분을 얻는 이 과거제도는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 하여 반대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중의 군졸 충당에 고심하던 정부는 일시적으로나마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기회에 많은 노들이 양인신분으로 해방되었다.

 

조선왕조 정부는 재정적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납속보관과 함깨 納粟從良의 길도 열어놓아서 임진왜란 이전에도 이미 어느 사노비가 흉년에 곡식 3천 섬을 바치고 아들 셋을 종량시킨 기록이 있다.

 

노비들의 납속종량의 길은 전쟁시기를 통해 더욱 크게 열렸다. 전쟁초기(1592)의 募粟酬賞表에 의하면 공․사천인은 5백 섬 이상을 바치면 면천될 수 있었다. 납속면천 이외에도 공명첨과 같이 免賤帖이 있어서 지방을 순찰하는 관리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전쟁중이던 1596년의 경우 1울에 50장, 2월에 50장의 면천첩을 판 기록이 있다.

 

이밖에도 노비들이 해방될 수 있는 길은 代口免賤이 있었고, 훈련도감이나 束伍軍과 같은 군영에 들어가 면천의 기회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관노가 아닌 사노의 경우 전쟁공로나 납속을 통한 면천에는 정부가 그 소유주에게 대신 보상을 해주었다. 사노비의 경우는 아직도 면천의 길이 상당히 제한되었으나 관노비의 경우는 그 길이 헐씬 더 넓었다.

 

왕조 후기로 오면서 합법적인 면천의 길도 넓어졌으나 이 시기 노비해방의 더 넓은 길은 그들 스스로가 避役하거나 도망하는 길이었다. 특히 관노비의 경우 전쟁으로 인한 노비문서의 소실과 통치체제의 이완에 따른 행정상의 허점이 피역 및 도망의 길을 크게 열어놓았다.

 

임진왜란 때메는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이전에 백성들의 방화로 경복궁이 불탔는데, 그 불깅이 노비문서를 관장하는 掌隷院에서 먼저 솟았다.

 

또한 관노비가 소속 관청에 바치는 身貢은 곧 그 관청의 운영비에 충당되었으므로 소속 관노비가 도망하는 경우 그 관청은 재정적 곤란을 받았다. 예를 들면 成均館에는 1729년까지 약4천 명의 관노비가 소속되어 해마다 2필 내지 1필의 身貢을 바쳤으나 1755년에는 약 1400명밖에 남지 않았다. 25년 동안에 1분의 1이상이 奴婢案에서 누락된 것이다. 그 대부분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신분해방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노비신분 해방의 길이 합법적으로 혹은 불법적으로 넓어져감에 따라 그 신분세습법에도 하나의 변화가 나타났다. 노비종모법의 확정이 그것이다. 노비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전쟁포로, 형벌, 인신매매 등을 통해 생겨났다.

 

통일신라시대 이전에는 3국 사이의 전쟁이 빈번하여 포로의 노비화에 의한 1세 노비 공급원이 넓었던 것 같고, 이 때문에 노비의 신분세습제는 그다지 철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수모법 혹은 從母法이라 했지만, 실제는 從母從父法이 적용되어 부모 중 어느 한쪽만 노비라도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었다.

 

지배계급이 그들의 노비소유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강행한 종모종부법은 고려시대를 거텨 조선왕조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종모종부법은 전체 인구 중 노비의 비율을 증가시키믐 반면 양인의 수를 감소시켜 軍役부담 인구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16세기에 李珥와 같은 사상가들이 군역부담 인구수를 늘릴 목적으로 종모법을 절저히 하여 奴가 良女와 결합하여 낳은 자녀는 양인이 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실시되지 못했다.

 

17세기에 들어돠서 宋時烈․趙翼 등에 의해 다시 종모종부법을 폐지하고 종모법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1669년에는 일단 실시되었다. 왕권이나 일부 진보적 관료들이 종보법 실시를 주장한 목적은 노비의 신분해방 문제보다 良役부담 인구의 수를 늘리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양인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한 사람을 다시 양인화하는 쪽에서 구하지 않고, 노비신분을 해방시켜 양인화하는 방향에서 구했다는 점에 조선왕조 후기의 시대적 추세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조 후기로 오면서 정부의 노비 추쇄가 거의 불가능해진 한편 정부가 관노비에게서 받는 身貢도 점점 들어들다가 결국 관노비의 대부분을 정부 스스로가 행방시키게 되었다. 더우기 노비의 신분해방 의욕이 높아져가는 추세였다.

 

1798년에 報恩 현감 李梯東이 “노비의 명칭을 영원히 폐지하고 양인으로 할 것과 어느 曹, 어느 侍의 노비라고 하지 말고 保人․役人 등으로 부르며 60세가 되어 除役하기를 良役과 꼭같이 하면 도망자․은둔자도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상소한 것은 이같은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1801년에는 宮奴婢와 各司奴婢를 해방시켜 양인으로 만들었다. 宮侍奴婢 해방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것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은 왕조 후기를 통해 노비들, 특히 상대적으로 예속도가 약했던 관노비들 스스로가 그 사회경제적 지위를 꾸준히 높여감으로써 이제 일반 양인과 다름없는 정치․사회․경제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궁시노비 해방이 실시된 것은 바로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성립된 1801년이었으나 그 정책이 확립된 것은 18세기 말의 正祖代였다. 이 시기는 일부 실학사상가들이 극히 제한된 조건 속에서 마나 정책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어느정도 마련되어가던 시기여서 그것이 노비의 사회․경제적 지위향상 및 신분해방투쟁과 합치되어 단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세도정권의 반동기가 있었으나 해방노비를 다시 묶을 조건은 아니었다. 문호개방 후 1894년의 갑오개혁에 와서 私奴婢 제도까지 혁하되어 적어도 법제상으로는 모든 노비의 신분해방이 이루어졌다.7)

 

2. 양반신분의 이동

 

(1)兩班戶의 移動

 

朝鮮後期의 兩班身分職役은 通時代的으로 把握할 것이아니라 時代에 따라 變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겠다. 앞서 推定한 基準에 의해서 調査한 時期別 身分構造의 增減現象을 보면 표3과 같다. 여기서 가장 顯著한 現象은 兩班戶의 激增과 奴婢戶의 激減에 있다. 즉 1678년(潚宗4)에서 1786年 (正祖10)까지 100餘年間 에 있어서 兩班 (13.6% → 31.4%) ․中人 (4.2% → 16.4%)․常民 (35.5% → 44.6%) 은 增加하고 反面에 奴婢(46.7% → 7.7%)는 激減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표3> 時期別 戶主의 身分構造 / %<實數>

구분

兩 班 中 人 常 民 奴 婢
肅宗 4년 13.6 <282> 4.2 <88> 35.5 <739> 46.7 <972> 100 <2081>
肅宗 43년 19.1 <477> 8.7 <219> 46.3 <1158> 25.9 <649> 100 <2503>
英祖 35년 24.4 <661> 10.6 <288> 47.4 <1282) 17.6 <475> 100 <2706>
正祖 10년 31.4 <956> 16.4 <497> 44.6 <1353> 7.7 <234> 100.1 <3037>

 

<표4>에서와 같이 前時期를 基準으로한 縱的인 身分構造層間의 移動率을 보면, 1時期에 比해서 2時期에 奴婢가 20.8%나 激減되었다는 것은 곧 常民으로 身分上昇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常民이 10.8%밖에 增加하지않았다는 것은 常民中에서 10%는 上級身分으로 上昇移動되었음을 意味하는 것이다.

 

따라서 中人이나 常民 가운데에서 5.5%가 兩班으로 身分上昇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각도에서 볼때 兩班은 1 → 2時期에 5.3%, 3 → 4時期에 7%, 1 → 4時期에 17.8%가 중인과 소수의 常民 중에서 上昇移動되어 왔다. 이러한 現象은 肅宗朝以後 身分階層間의 後的인 移動이 어떠한 方法이던 間에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立證해 주고 있으며 身分의 上昇移動이 主가 되고 있었다.

 

<표4> 戶主의 身分 移動率

구분 兩 班 中 人 常 民 奴 婢
1시기 → 2시기 5.5 4.5 10.8 -20.8
2시기 → 3시기 5.3 1.9 1.1 -8.3
3시기 → 4시기 7.6 5.8 -2.4 -9.9
1시기 → 4시기 17.8 12.2 9.1 -39.0

 

이와 같은 현상은 他地域에 관한 硏究중 四方博․鄭奭鍾․金永謨․諸氏의 調査結果에 의하면 兩班戶는 激增, 常民戶는 減少, 奴婢戶는 激減되는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8) 그러나 常民戶의 경우, 丹城縣에서는 2․3시기에서는 增加(10.8%, 1.1%), 4시기에는 減少(-2.4%) 현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9) 兩班身分의 경우, 兩班으로 推定한 基準은 다르지만 丹城縣과 비교해 보면 地域別 增加率은 <표5>10)에서돠 같이 한결같이 增加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丹城縣과 같은 전형적인 農村地域의 경우에도 常民戶를 除外한 兩班戶와 奴婢戶는 他地域과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어 身分移動現象은 全國的인 보편현상임을 알 수 있다.

 

<표5> 地域別 兩班身分의 增加率(%)



구분


1678


1684


1690


1717
1732
1729


1747


1759


1765
1783
1786
1789


1795


1804


1858


1867
大 丘 府
(四方博)




9.2

18.7





37.5



70.3

蔚 山 府
(鄭錫鍾)








26.3



41.0



53.5

65.5
大 丘 府
(金永謨)


19.4





21.5





31.0



42.5
丹 城 縣
(筆 者)
13.6



19.1



24.4

31.4







 

兩班의 職役別 移動現象을 <표6>에서 보면 幼學 (5,6% → 29.7%)이 懸隔이 增加하고 있는 反面에 四足品官 (1.2% → 0.2%), 生員․進士․及第․士族出身 (0.5% → 0.2%), 寡婦(3.3% → 1.3%) 는 減少되고 있다.

 

<표7>에서와 같이 兩班戶 중에서 幼學 (41.5%, 78.4%, 87.7%, 94.5%)이 차지하는 比重은 後代로 올수록 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寡婦戶(24.1%, 6.7%, 7.1%, 4.2%)를 除外하면 兩班戶主의 職役은 거의 대부분이 幼學으로 上昇移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丹城地域의 兩班은 대부분이 幼學으로서 鄕班 내지 沒落兩班 및 中人․ 常民階層에서 上昇된 兩班 (상당수는 冒錄兩班)으로 사료된다.

 

<표6> 兩班戶主의 職役別 移動/%(戶主數)

구분

양 반



























生士
進族
及出
弟身














(氏)





1시기 1.2
(26)
0.5
(11)
5.6
(117)
1.1
(22)
1.8
(38)
3.3
(68)
13.6
(282)
4.2
(88)
35.5
(379)
46.7
(972)
100
(2081)
2시기 1.7
(42)
0.1
(3)
14.9
(374)
1.0
(26)


1.3
(32)
19.1
(477)
8.7
(219)
46.3
(1158)
25.9
(649)
100
(2503
3시기 1.0
(26)
0.3
(8)
21.4
(580)




1.7
(47)
24.4
(661)
10.6
(288)
47.4
(1282)
17.6
(475)
100
(2706)
4시기 0.2
(6)
0.2
(6)
29.7
(901)




1.3
(40)
31.4
(953)
16.4
(497)
44.6
(1353)
7.7
(234)
100.1
(3037)

<표7> 兩班戶主의 職役別 比率



士族品官 生進及第
士族出身
幼 學 忠 義 衛 業儒業武 寡婦(氏)
%(戶數)
1시기 9.2 3.9 41.5 7.8 13.5 24.1 100(282)
2시기 8.8 0.6 78.4 5.5

6.7 100(477)
3시기 3.9 1.2 87.7



7.1 99.9(661)
4시기 0.6 0.6 94.5



4.2 99.9(953)

 

以上에서 兩班戶의 增加는 全國的인 普遍現象으로서 上昇移動이 主가 되어 上層身分構造에 일대 動搖를 초래하였고, 또 兩班의 階層分化를 초래하였으나, 上昇移動이란 側面에서 볼때 冒錄하는 데 妥協할 수 있었던 社會․經濟的 與件으로 보아 常民의 實力向上을 意味하고 있다.

 

또한 奴婢의 激減은 他身分으로 上昇移動 내지 下層構造의 身分混淆 現象을 초래하는 한편, 兩班들의 生活과 地位에 일대 變化를 초래하고 있다.

 

(2) 世代와 世代間의 移動

 

兩班의 世代와 世代間의 身分移動을 표8에서 살펴보면 兩班戶主의 三祖중 職役이 記載되지 않은 父․祖․曾祖를 除外-특히 4시기(3.1%, 3.8%, 4.3%)-하면 極히 소수이므로 대체로 兩班身分이 世襲移動되고 있었다.

 

<표8>兩班戶主의 三祖身分職役/%(實數)

구분

品 官 生進出身 學生
(幼學)
忠義衛 衛 屬 業儒
業武
職役無記
1시기 23.8(49) 3.9(8) 60.2(124) 11.7(24)

0.5(1)

100.1(206)
2시기 17.8(74) 4.6(19) 68.4(284) 7.7(32) 0.2(17) 1.5(5)

99.9(415)
3시기 13.1(80) 2.4(15) 81.1(497) 2.8(17) 0.3(2) 0.3(2)

100(613)
4시기 9.1(83) 1.0(9) 85.7(785) 1.0(9)

0.2(2) 3.1(28) 100.1(916)

 

구분

品 官 生進出身 學生
(幼學)
忠義衛 衛 屬 業儒
業武
職役無記
1시기 53.4(110) 2.9(6) 33.0(68) 9.2(19) 1.0(2)

0.5(1) 100.1(206)
2시기 34.2(142) 2.9(12) 52.8(219) 9.6(40)



0.2(1) 99.6(415)
3시기 18.3(112) 3.4(21) 73.2(449) 4.9(30)



0.2(1) 100(613)
4시기 12.3(113) 1.1(10) 79.3(726) 3.4(726)

0.1(1) 3.8(35) 100(916)

 


구분
曾 祖
品 官 生進出身 學生 忠義衛 衛 屬 業儒
業武
職役無記
1시기 67.0(138) 2.4(5) 19.4(40) 6.8(14) 3.4(7)

1.0(2) 100(206)
2시기 56.6(235) 5.1(21) 27.5(114) 9.4(39) 0.7(3)

0.7(3) 100(415)
3시기 26.3(161) 6.5(40) 60.0(368) 6.7(41) 0.2(1)

0.3(2) 100(613)
4시기 16.9(155) 3.1(28) 70.7(648) 4.7(43) 0.2(2) 0.1(1) 4.3(39) 100(916)

 

그리고 父․祖․曾祖로 올라 갈수록 學生(幼學)은 감소되고 反面에 品官은 增加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즉 幼學의 경우, 1시기(60.2%, 33.0%, 19.4%), 2시기(68.4%, 528%, 27.5%), 3시기(81.8%, 73.2%, 60.0%), 4시기(85.7%, 79.3%, 70.7%)에 걸쳐 일관된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는 反面에 品官의 경우는 1시기(23.8%, 53.4%, 67.0%), 2시기(17.8%, 34.2%, 56.6%), 3시기(31.1%, 18.3%, 26.3%), 4시기(9.1%, 12.3%, 16.9%)에 걸쳐 일관된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納贖에 의한 老職․贈職의 濫發에서 연유된 現象으로 보여진다. 老發과 曾職을 濫發하게 되었던 實例를 들어 보면 老職은 高齡者에게 授與하는 品階로서, 經國大典에서는 80세 이상이면 良․賤을 莫論하고 一品階를 주고 본시 品階가 있는 者도 또한 一品階를 陞級하였다

 

.11) 時期別로 보면 1시기에서 4시기에 결쳐 幼學(學生)은 父(60.2% → 85.7%)․祖(33.0% → 79.3%)․曾祖(19.4% → 70.7%)가 後代로 오면서 일관된 激增現象을 보이고 있지만, 品官은 父(23.8% → 9.1%)․祖(53.4% → 12.3%)․曾祖((67.0% → 16.9%) 가 後代로 오면서 일관된 激減現象을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데, 이같은 현상은 贈職을 買爵하여 手帖하였다고 하더라도 점차 身分上 向上된 待遇를 받을 수 없었음을 暗示하고 있어 品官者의 數가 減少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兩班戶主와 率子와의 身分繼承率을 보면 표9, 표10과 같다. 여기서 率者의 職役이 記載되지 않은 者를 除外한 兩班의 身分繼承率을 보면, 표9에서와 같이 朝鮮後期 百餘年間에 있어서 84.7%, 90.8%, 97.1%, 99.6%로 後代로 올수록 兩班의 率子중 거의 절대다수가 兩班身分으로 繼承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고, 中人(12.2% → 0.4%) 및 常民(3.1% → 0%)으로 低落되고 있는 者는 激減되고 있다.

 

그러나 率子의 職役이 記載되지 않은 者를 包含했을 경우 표10에서와 같이 兩班으로 世襲되고 있는 者는 절반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표9> 父․子間의 身分繼承率(職役無記載를 除外한 경우) / %(實數)

구분 兩 班 中 人 常 民



1시기 84.7(83) 12.2(12) 3.1(3) 100(98)
2시기 90.8(108) 7.6(9) 1.7(2) 100.1(110)
3시기 97.1(106) 2.3(4) 0.6(1) 100.1(171)
4시기 99.6(264) 0.4(1)

100(265)

 

<표10> 父․子間의 身分繼承率(職役無記載를 包含한 경우) / %(實數)

구분 兩 班 中 人 常 民 無 記



1시기 41.6(83) 6.5(12) 1.6(3) 47.3(88) 100(186)
2시기 49.3(108) 4.1(9) 0.9(2) 45.7(100) 100(219)
3시기 47.4(166) 1.1(4) 0.3(1) 51.1(179) 99.9(352)
4시기 48.3(264) 0.2(1)

51.6(282) 100.1(547)

 

以上에서 每時期마다 父․曾․曾祖로 올라 갈수록 品官者가 增加하는 현상은 老職․贈職의 濫發에 연유된 것으로 보이나 後代로 올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兩班戶가 激增되는 狀況下에서도 戶籍上에서 冒錄의 헛점이 별로 보이지 않고 있으나, 率子의 경우에 職役의 無記載가 父의 冒錄兩班을 暗示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원래의 兩班은 世代와 世代間의 世襲이 維持되고 있었다.

 

(3) 兩班姓氏(本貫)의 移動

 

身分制 社會에서 신분을 가름하는 한 特性으로 姓氏를 들수 있고, 또 本貫의 如何에 따라 身分上의 優劣을 가름하는 傾向이 있어 온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그러나 名門世族이 될려면 한 家門에서 累代 文翰과 仕官을 거듭 배출했을 경우이고, 반대로 累代를 寒微하게 보내거나 兩班相間에 身分內婚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면 身分上의 低落現象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특히 朝鮮後期에는 身分의 上昇移動과 더불어 많은 本貫이 兩班으로 編入되고 있어 주목된다.

丹城帳籍 중에서 選定된 4개 式年에 登錄된 兩班職役의 本貫은 總 52姓 131本貫이나 되는데, 그 중에 李氏가 18개 本貫, 金氏가 17개 本貫, 鄭氏가 11개 本貫, 朴氏가 7개 本貫, 崔氏가 5개 本貫 등이고, 丹城(江城)을 本貫으로 하는 姓氏는 文氏뿐이다.

 

時期別로는 1시기에 41개 本貫, 2시기에 65개 本貫, 3시기에 83개 本貫, 4시기에 97개 本貫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1時期를 基準으로 하면 2․3․4時期에 각각 58.5%, 102.4%, 136.6%가 增加하고 있어 後代로 올수록 상당수의 本貫이 兩班身分으로 上昇하고 있는 現象」을 볼 수 있다.

 

시기별 本貫․戶數의 移動狀況을 보면 표11에서와 같다.1시기에 비해서 2시기에 새로 兩班身分으로 編入된 本貫은 75.6%, 戶數는 31.6%를 차지하였고, 1시기에는 兩班身分에 包含되었으나 2시기에 兩班에 登載되지 않은 本貫은 11.1%, 戶數는 7.3%를 차지하였다.

 

3시기에 兩班으로 編入된 本貫이 50.8%, 戶數는 11.6%, 脫落된 本貫이 23.1%, 戶數는 5.5%, 4시기에 兩班으로 編入된 本貫이 39.8%, 好數는 4.9%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本貫의 增加比率은 높지만 戶數의 比率은 서로 比例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 本貫의 極히 소수가 身分的인 上昇 내지 冒錄에 의해 일시 上昇 또는 脫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표11> 時期別 兩班의 本貫․戶數의 移動 / %(實數)

 

구분 上 昇 編 入 脫 落 移 居
本 貫 戶 數 本 貫 戶 數
1시기 → 2시기 75.6(31) 31.6(65) 11.1(7) 7.3(15)
2시기 → 3시기 50.8(33) 11.6(48) 23.1(15) 5.5(23)
3시기 → 4시기 39.8(33) 7.8(48) 22.9(16) 4.9(30)

 

5%以上의 兩班戶數를 보유한 本貫을 보면 표12에서와 같이 安東權氏․晋州(晋陽)柳氏․景州(景山)李氏․陝川(江陽)李氏․密陽朴氏․南原梁氏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總戶數를 各 式年의 兩班 總戶數에 비하면 1시기에 55.8%, 2시기에 48.0%, 3시기에 46.7%, 4시기에 49.0%로서 전체 兩班戶數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 이들이 이 地域에 있어서의 名門氏族임을 알 수 있다.

 

<표12> 5%以上 戶數의 姓氏(本貫) / %(實數)

구분 安東權氏 晋州․晋陽
柳 氏
景州․景山
李 氏
陝川․江陽
李 氏
密陽朴氏 南原
梁氏
1시기 15.0(31) 12.2(25) 9.7(20) 6.9(14) 6.9(14) 5.4(11) 55.8(115)
2시기 11.6(48) 9.4(39) 10.6(44) 9.6(40) 6.7(28)

48.0(199)
3시기 15.3(94) 5.7(35) 10.3(63) 6.6(40) 8.8(54)

46.7(286)
4시기 149(136) 6.0(55) 10.5(96) 10.8(99) 69(63)

49.0(449)

 

그러나 金永謨氏가 英祖時 大丘府와 尙州牧의 戶籍調査를 통해서 만든 「戶主 身分別 本貫」에 관한 표 가운데에서 安東權氏․密陽朴氏․景州李氏를 拔萃해 보면 표1312) 과 같다. 여기에서 身分을 分類한 根據는 다르지만 이들 姓氏가 兩班身分 外에도 中人․ 良人․ 賤役良人․ 賤人․奴 등의 各 身分에 散在하고 있어 本貫을 통해서 身分을 規定하기는 어려웠다.

 

원래 本貫은 族의 分支를 이루어 그 分支의 始原을 밝히는데에서 발달한 것이었는데, 차차 그 中始祖의 發祥地를 表示함으로써, 門閥의 優越性을 標榜하려는 것이 되어 本貫으로써 兩班士族임을 表明한 것이 되었다.

13)고 하나 표13에 의하면 이와 같은 槪念은 朝鮮後期에 와서는 成立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13>%

구분 兩班 準兩班 中人 良人 賤役/良人 賤人 其他 寡婦 不記 合計
安東權氏 3.6 1.6 0.2 2.4 1.2 0.8 0.3 4.4 2.2

1.2
(42)
密陽朴氏 6.2 4.2 5.1 9.8 9.3 14.4 2.7 4.4 10.8 9.4 7.0
(239)
景州李氏 2.4 1.9 1.9 1.7 0.8 1.1

2.2 0.4 3.1 1.2
(41

 

[결론]

 

身分移動을 糾明하는데 先行되어야 할 가장 基本的인 問題는 身分構造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있다. 身分階層間의 移動 및 混淆現象이 激甚했던 朝鮮後期 百餘年間의 身分構造를 이해하기 위해 文獻資料와 帳籍 上의 職役을 通해서 미흡하나마 한 근거를 삼을 수 있었다.

 

兩班은 正職에 나아갈 수 있는 身分 즉 生員․進士․幼學․有蔭者와 前․現職役을 通稱한 身分으로 그들의 族黨까지도 포함된 上層支配層으로서 以後에는 軍役을 회피하여 免役되었고 武業도 즐기지 않았으며 오직 儒學만을 닦아 仕官코자 하였다.

 

그러나 점차 農業에도 從事하는 등 生業과 관련을 가지면서 儒學과 農業을 겸한 農村知識人이 되기도 하여 身分的 地位가 低下되어 왔고, 또한 이들 身分으로 上昇移動이 일반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피지배계층의 의식이 성장하여 분해 및 신분해방이라는 방법으로 上昇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前述한 兩班職役을 推定하는 데에서 몇가지 結論點을 보면,

 

첫째로, 朝鮮後期 百餘年間의 兩班身分을 通時代的으로 把握할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點이다.

           즉 士族品官․生員․進士․士族出身․幼學․寡婦는 調査된 全時期를 통해서 兩班이었고, 忠義衛와 業儒․業도 원래

           兩班職役이었으나, 忠義衛는 2時期以後, 業儒․業武는 2時期以後 각각 中間階層的 性格을지닌 中人으로 身分上

           의 低下를 가져왔다.

 

둘째로, 戶籍上에 나타난 兩班職役 가운데 品官․出身은 班․常을 區別해야 한다는 點이다.

            品官者 중에는 納粟에 의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으나 納粟이란 但書가 붙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것도 있으

            며, 士族 및 常賤도 納粟品官을 받았다.

 

            그러므로 四祖 및 率子의 職役과 妻의 號稱을 통해서 班․常의 分別이 가능했으며, 士族의 品官․出身兩班으

            로, 그 外에는 兩班과 常民의 中間階層으로서의 中人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戶主의 職役울 통해서 推定된 兩班身分은 이 分野의 先學 들의 見解와는 다소 見解差를 견할 수

            있었고, 이와 같은 分析을 근거로 하여 兩班身分의 移動을 조사해 본 결과,

 

첫째로, 兩班戶의 增加는 全國的인 普遍現象으로서 上昇移動이 主가 되었고, 班․常을 中心으로 하는 身分制점차 崩壞

            되어 上層身分構造에 일대 動搖를 초래하였으며, 양반의 階層分化를 초래하였다.

 

            또한 兩班戶 중에서 幼學이 차지하는 比重은 後代로 올수록 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에 상당

            수는 中人․常民이 幼學으로 冒錄된 兩班으로 推定된다. 이들 冒錄兩班은 避役者의 增加로도 이해할 수 있으나,

            冒錄할 수 있었던 社會․經濟的 與件으로 보아 常民層의 實力向上을 의미하기도 하여 上昇移動이란 側面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들째로, 奴婢는 兩班들의 生活에 있어서 필수적인 존재였으나, 이들의 激滅은 他身分으로 上昇移動 내지 下構造의 身

            分混淆 現象을 초래하는 한편, 兩班들의 生活과 地位일대 變化를 초래하여 生業에 從事가능성을 示唆하고 있으

            며 儒業을 主로 하여 仕官코자 하던 兩班들의 特性을 잃게 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셋째로, 小數의 兩班戶를 가진 本貫이 대거 진출하고 있어 兩班身分으로 上昇이 폐쇄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數의 兩班

            戶를 가진 名門氏族도 있었으나 職役이 各 身分에 散在하고 있어 本貫 自體로써 신분의 尊卑를 가름하기는 어

            려웠다.

 

넷째로, 兩班身分의 家系나, 世代와 世代間의 身分繼承關係를 통해서 볼때, 兩班은 身分上의 世襲이 維犢되왔으며, 良

           妾所生의 다음 世代는 幼學으로 上昇移動되고 있었다.

 

다섯째로, 階層移動의 方法이 學問과 知識에 의존하기 보다는 富力과 결탁된 非理와 같은 물리적 요인에 의하는 경향

               이 커지고 非理에 의한 冒錄의 方法이 社會移動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여섯째로, 兩班의 階層分化 現象을 엿볼 수 있었는데, 丹城縣 帳籍의 경우, 兩班職役의 대부분이 幼學으로서 域社會에

               서만 影響力을 미칠 수 있는 鄕班이거나, 別로 影響力을 미칠 수 없는 沒落兩班(賤班) 내지 冒錄兩班이었다.

 

              以上과 같이 朝鮮後期 社會의 移動的인 一面을 보았다. 身分의 移動現象이 常民層의 實力向上과 더불어 上昇

              移動됨에 따라 兩班의 數的 增加는 上層構造의 階層分化와 下層構造의 身分混淆하는 構造的 變化를 초래하

              였다.

 

<참고문헌>

1. 이준구, 『조선후기 양반신분이동에 관한 탐구』, 1981

2. 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3.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탐구실, 「조선신분사 탐구」, 현문사, 1987

4. 정석종, 「조선후기 사회신분의 붕괴」, 성대대동문화연구원, 1972

5. 강만길, 「조선후기 고립제 발달」, 한국사연구, 1976

6. 최영희,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사회변동, 신분제도」, 사학연구, 1963

    1)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창작과 비평사 1994

    2).정석종, 「조선후기 사회심분의 붕괴」, 19세기의 한국사회, 성대 대동문화연구원, 1972

    3).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4).정석종 「조선후기 사회신분제의 붕괴」, 19세기의 한국사회, 성대 대동문화연구원 1972.

    5).강만길, 「조선후기 고립제 발달 - 차비군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976.

    6).최영희,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사회변동, 신분제도」, 사학연구, 1963.

    7).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8).四方博氏의 大丘府戶籍 調査에 의하면 1690年 (肅宗16)에서 1858年 (哲宗9)間 兩班戶는 9.2%에서 70.3%로 激增

        되었고, 常民戶는 53.7%에서 28.2%로 減少, 奴婢戶는 37.1%에서 1.5%로 激減되었다. (前揭論文, pp. 387~389).

        鄭奭鍾氏의 蔚山府戶籍 調査에 의하면 1729年 (英祖5)에서 1867年 (高宗4)間 兩班戶는 26.3%에서 65.5%로 激增

        되었고, 常民戶는 59.8%에서 34.0%로 減少되었고, 奴婢戶는 13.9%에서 0.6%로 激減되었다. (前揭論文, p.33.).

 

       金英謨氏의 大丘府戶籍 調査에 의하면 1684年 (肅宗10)에서 1867年 (高宗4) 間에 兩班戶는 19.4%에서 42.5%로

       激增, 中人戶는 24.8%에서 16.6%로 激增되었고, 常民戶는 24.8%에서 16.0%로 減少되었으며, 賤民戶는 47.9%에

       서 13.0%로 激減되었고 그 外에 寡女 및 其他로 나타나 있다. (前揭論文, p.69)

 

   9).丹城縣에서의 이와 같은 현상은 身分構造를 推定하는 基準에서도 차이가 있겠지만 , 그것보다도 이 地있어서는

        他地域보다 常民에서 上級身分으로 上昇되는 比率이 奴婢에서 常民으로 上昇하는 率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까닭

        으로 思料된다.

   10).四方博氏의 前揭論文, pp.388 ~ 389와 鄭奭鍾氏의 전게론문, p.33과 金永謨氏의 前揭論文, p.69를 하여 만

         든 表이다.

   11). 「經國大典」, 老人職條

   12). 金永謨, 前揭論文, pp.98~99. 參照

   13). 金斗憲, 前揭書, p59. 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