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전주이씨 시조 이한 묘 조경단(肇慶壇)

야촌(1) 2013. 5. 5. 22:16

■조경단(肇慶壇)의 유례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후 전주이씨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만들기 위하여 그의 22대조가 되는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묘가 전주의 건지산(100.5m) 기슭 어딘가에 에 있다는 설에 따라 많은 지사들과 사람들을 동원하여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후 역대 왕들도 시조공의 묘를 찾기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영조는 묘지를 찾지못하자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조 47년(1771) 시조 이한과 배위 경주김씨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祠堂)을 오늘날의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慶基殿) 경내에 건립하였다. 

 

조경단(肇慶壇)은 덕진에서 약 1km 들어간 건지산(乾止山, 103m)에 있으며, 광무 3년(1899년) 5월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전주 이씨 시조의 묘소를 정하고 ‘대한조경단’이라 하였다. 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경기전은 전주(全州)의 주산인 기린봉(306m) 아래에 있으며,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서 태종 10년(1410)에 창건한 것이다.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난 대한제국 광무3년(1899) 고종황제 때인 어느날 우연히 전주시 덕진구 건지산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나뭇꾼의 칼퀴에 이상한 돌 하나가 걸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자가 세겨져 있었는데, 예사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은 나뭇꾼이 그자리에 표시를 해놓고 고을 현감에게 가지고 가서 아뢰었다. 현감이 살펴보니 다름아닌 왕실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고있던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지석(誌石)이였다.

 

묘지석(墓誌石)이라고도 하는 이 지석은 죽은이의 인적사항이나 생전의 전기, 무덤의 소재등을 기록해서 무덤의 봉분속에 묻은 돌을 말하는 것으로서 옛 사람들은 묘의 비석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지만 오랜세월이 지나 비바람에 훼손되고 멸실되더라도 행여 후손들이 묘지를 찾지못하는 일이 없도록 대비하는 목적으로 지석을 묻었던것이다.

 

이렇듯 지석의 중요성은 실로 대단해서 역사학적인 가치가 대단히 높다하겠다. 또한 이것은 무덤의 주인공을 알수있을 뿐만 아니라 무덤 조성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알수있다. 예로 공주의 백제 무녕왕릉은 지석문이 나와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실히 알수 있었고,  당시의 역사적 실체를 명확하게 복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고분들이나 신라왕릉들은 이 지석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많은 무덤의 주인공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조경단의 지석(誌石)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는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지석은 조경단 재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천보십삼재척하(天寶十三載九尺下)`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제35대 경덕왕13년(754)으로 추정한다.

 

천보는 당나라 현종의 연호다. 이 지석에는 후손 춘옥(春玉)이가 캐고 이 글을 곤옥(崑玉)이가 해석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과연 1000여년 후에 춘옥이가 캐내고 곤옥이가 이 돌이 사공공 묘의 지석임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지석문은 다음과 같다.

 

[전면]千一未白玉午 赤符秦文叔起 口或改三走三返 春玉採崑玉解 馬入海木石崇 天寶十三載九尺下

         (천일미백옥오 적부진문숙기 구혹개삼주삼반 춘옥채곤옥해 마입해목석숭 천보십삼재구척하)

 

[후면]千載之下 中山復起 黃海白馬 己亥五月

         (천재지하 중산복기 황해백마 기해오월)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의 설치

   나뭇꾼으로 부터 지석 발견을 보고 받은 현감은 즉시 한양으로 달려가서 보고하였다.

시조 묘를 애타게 찾던 왕실은 기뻤다. 그러나 어느 곳이 정확한 묘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여 지석이 발견된 능선 주변 남북 3520척의 경내의 다른 묘소를 모두 없애고 단(壇)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변 어디에는 틀림없이 시조 묘가 있으므로 경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시조 묘를 후손이나 타인들이 밟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한『고종실록』을 살펴보면 광무3년(1899) 1월25일,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며 관리를 두는 등 문제는 전부 종정원(宗正院)의 의견대로 집행하며 제단 이름은 조경단(肇慶壇)이라 부르고 수봉관(守奉官) 2명은 일가 중에서 특별히 둘 것이다.

 

비석 앞면의 글은 내가 직접(고종을 말함) 써서 내려보낼 것이니 뒷면의 글은 전 대학사(大學士)가 지어 바치도록 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같은 해, 3월11일 궁중내부 특진관인 조경단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 이재곤(李載崑)이 전주에 와서 건지산 묘소 검분(檢分)이 실시되었다. 설단(設壇), 수비(竪備), 건재(建齋)의 후보지는 따로 지관이 정하기로 했다.

 

동시에 창경 토지나 단의 좌우계곡에 건립된 접단을 본단 수봉궁(守奉宮)에 속하게 할 것을 제언, 마침내 고종어필의 전제(篆題)와 찬문(撰文)으로 대한조경단비 건립이 준비되었다. 6월21일, 궁내부대신의 대리 민영기(閔泳琦)는 회계원 검사과장 오현기(吳顯耆)와 흥덕군수 오응선(吳應善)을 특별감독으로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들은 장인(匠人)과 공인(工人)들을 잘 정비하여 수일 내에 대한조경단을 준공하게 된다. 7월11일, 고종은 시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조경묘(肇慶廟)와 묘지인 조경단(肇慶壇),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慶基殿)의 관리를 맡을 제조(提調)는 해당 도(道)의 관찰사로 겸임시킨다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해마다 한 차례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한층 높이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왕릉이나 왕실의 묘에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예컨대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의 묘를 준경묘(濬慶墓), 그의 부인 평창이씨 묘는 영경묘(永慶墓)다.

 

조경단(肇慶壇)에서 조(肇)란 `시작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경(慶)은 `경사스럽다`라는 뜻이다.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

 

   현재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은 237본이라고 한다. 이씨는 대체로 한국계와 중국계, 그리고 기타로 나눈다.

한국계는 신라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다. 6성이란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9년(서기32년) 6촌을 개정하여 사성(賜姓)한 성씨들을 말한다.

 

양산촌장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에게는 정씨(鄭氏), 가리촌장 기타(祈陀)에게는 배씨(裵氏), 고야촌장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하사했다.

 

중국계로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고성이씨(固城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등과 같이 시조가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기타계로는 안남국(월남)에서 망명해온 화산이씨(花山李氏),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전주이씨는 현재 인구가 240만 명에 이르는데 한국계인 이알평의 후손이라는 설과 중국에서 귀화한 설로 나누어져 있다. 이 두 가지 설 모두 근거가 모호하여 정확한 생성유래는 전주이씨 종친들조차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작자와 연대 미상인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전주이씨 시조 한(翰)의 자는 견성(甄城)으로 본디 중국에서 살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였다. 그때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나타난다는 동요가 유행했는데 배씨 성을 가진 자가 이를 모함하였다. 이에 한(翰)이 바다를 건너 신라에 오니 당시 나이 18세였다.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니 신라 문성왕이 불러 사공(司空) 벼슬에 임명하였다. 1년 남짓에 국정을 공평하게 다스리니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리고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여 자연(自延)을 낳았고 자연은 천상(天祥)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翰)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이상으로 볼 때, 전주이씨가 중국에서 왔는지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기록이 애매 모호하여 단언할 수 없다. 중국에서 왔다는 설은 아마도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것 같다.

 

 

●왕실의 족보 - 선원선계(璿源先系), 선원세계(璿源世系), 선원파계(璿源派系)

   임금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 선(璿)이란 옥구슬이라는 의미이므로 임금의 조상을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 같은 뿌리`라는 뜻에서 이런 용어를 썼다. 임금은 한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을 1세로 하여 세대(世代)를 따지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다. 이를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표현하였다. 그래서 전주이씨는 시조부터 17세 이양무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한다.

 

17세까지의 직계와 방계를 모두 포함하는데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추존왕인 목조(穆祖) 이안사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역대 왕의 세계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한다.

 

추존왕 4대와 태조부터 순종까지 20세를 합치면 모두 24세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조의 5왕자부터 대군(大君)이나 군(君)의 파계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한다. 예컨대 양녕대군파, 효령대군파 등이 이에 속한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현재 86개 파종회가 있다고 한다.

 

 

●선원선계(璿源先系) - 시조에서 17세 이양무까지

   신라 사공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 전주에 터를 잡은 이후 17세 양무(陽茂)까지 호족세력으로 살아왔다. 2세 자연(自延)은 시중(侍中) - 3세 천상(天祥)은 복야(僕射) - 4세 광희(光禧)는 아간(阿干) - 5세 입전(立全)은 사도(司徒) - 6세 긍휴(兢休)는 사공(司空) - 7세 염순(廉順)은 호장(戶長) - 8세 승삭(承朔)은 생원호장(生員戶長) - 9세 충경(充慶)은 생원(生員) - 10세 경영(景英)은 생원호장(生員戶長) - 11세 충민(忠敏)은 장사(長史) - 12세 화(華)는 추밀원사(樞密院使) - 13세 진유(珍有)는 생원호장(生員戶長) - 14세 궁진(宮進)은 한림(翰林) - 15세 용부(勇夫)는 대장군(大將軍) - 16세 인(璘)은 내시집주(內侍執奏) - 17세 양무(陽茂)는 장군(將軍)을 지냈다.

 

이양무는 부인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이안사(李安社), 이영필(李英弼), 이영밀(李英謐), 이영습(李英襲)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안사는 후에 목조대왕(穆祖大王)으로 추존 되어 선원세계(璿源世系)가 된다. 영필과 영밀은 자손이 없었고, 넷째 영습은 주부동정(主簿同正) 벼슬을 해 `주부동정공파`의 파조(派祖)가 된다. 

 

선원선계의 조상들 중에서 풍수와 관련되어 살펴볼 인물은 3세 천상(天祥)과 17세 양무(陽茂)다. 『완산실록(完山實錄)』에 의하면 "천상은 젊어서부터 매우 호탕했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을 좋아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앙관서에 들어가서 천문지리를 연구하다가 9년 만에 이를 달통하여 만물의 이치를 깨달았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에 산소를 쓰면 우리 후세 자손들 중에서 반드시 왕이 나오리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대로 천장하지 말라” 고 하였다. 양무는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로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濬慶墓)의 주인공이다.

 

전주에 살다가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자 그곳에서 살다가 고려 고종18년(1231)에 죽었다. 

신좌을향(辛坐乙向)인 준경묘에는 `백우금관(白牛金棺)`이라는 유명한 설화가 전한다.

 

▲조경단 전경/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지정(지정일 : 1973. 06. 23)

   사진 출처 ⓒ전주시문화관광과

 

  조경단은 광무 3년(1899) 5월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소로

  정하고 대한 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고 이름 하였다. 조경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담을 쌓았으며, 동.서.남.북에 문이 있다.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대문을 내고, 남향의 문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대리석으로 너비 180센티미터 두께 30세티미터, 높이 202 센터미터이다.

  앞면에 고종의 어필로 『대한조경단』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 변이 7.2미터의 정방

  형의 3칸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조경단 관리자 : 전주시

 

  ■ 시 대 : 광무(光武) 3년(1899)

  ■ 규 모 : 일원(30,248제곱미터)

  ■ 연락처 : (063)281-2790

 

▲ 조경단 전경. 사진제공=국립전주박물관

 

건지산(乾之山 또는 乾芝山/높이 : 105미터)에 조성된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역이다. 태조 이

성계는 조선 왕조를 세운뒤 건지산에 있는 이 묘역을 각별히 지키게 했으며 그후 역대 왕들도 이곳의 보호

에 정성을 다하였다.

 

특히 고종 황제는 광무 3년(1899)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관리(官吏)를 배치하고, 매년 한차례씩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건지산에는 조경단(肇慶壇)을 발산(鉢山)에는 목조(穆祖,李安社/이성계의 고조

부)의 유허비를 오목대(悟木臺)에는 태조의 주필 유허비를 세웠으며, 이것은 경기전(慶基殿) 조경묘(肇

慶廟)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고 있다.

 

조경단 남쪽 20미터 지점에는 고종(高宗)이 세운 비석이 비가에 안치되어 있다. 거북등 위에 세워진 비

은 너비 180센티 두께 30센티 높이 202 센터미터로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다. 비석 앞면에 새

겨진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란 글씨와 비문은 고종의 어필이다. 비각은 한 변이 7,2미터인 정사각

형 3칸 팔작지붕이다.

 

   

▲ 조경묘 정묘. 사진제공=국립전주박물관

 

↑조경단 비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남향의 문에서 20m 떨어진 곳에 비석이 있다.

  비석은 대리석이며 너비 180cm, 두께 30cm, 높이 202cm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대한조경단’이라고 새

 겨져있다. 비각은 한 변이 7.2m인 정방형의 3칸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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