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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王莽)/신(新)나라 건국자

■왕망(王莽, BC 45~AD 23) ↑왕망화상(王莽画像) 자 거군(巨君). 산둥[山東] 출생.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왕(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 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되어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王莽)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王鳳)의 인정을 받았다. BC 33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BC 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되었다. 그 뒤 왕씨 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BC 8년 38세로 ..

측천무후(則天武后,625-705)

■ 측천무후(則天武后,625-705?) -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재(女帝) ▲측천무후(則天武后) 본명은 무조(武曌). 무후(,武后), 무측천(武则天)이라고도 한다. 당(唐)나라고종(高宗)의 비(妃)로 들어와 황후(皇后)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實際的)으로 통치(統治)했다. 생애(生涯)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다. 무후는 당조의 기반(基盤)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統一)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入闕)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 한 시기였다. 태종의 후궁으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649년 태종이 죽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 중국 최초 농민 봉기의 지도자

■ 진승(陳勝)과 오광(吳廣)/(BC 209~208) 맨 처음 진(秦)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로. 진승은 하남(河南) 출신인데, 자(字)가 섭(涉)이므로 진섭(陳涉) 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머슴 살이를 하였으며. 오광(吳廣) 또한 같은 하남(河南) 출신으로 집이 매우 가난하였었다. 진승과 오광 이들 두 사람은 진시황의 아들이 황제를 계승한 기원전 209년에 변방의 성(城) 을 쌓는 노역자(勞役者)로 징발된 자들의 인솔(引率)을 맡은 책임자(責任者)인데, 미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홍수를 만나 길이 막혀 도저히 기일(期日) 내에 도착(倒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법은 목적지에 기일내 도착하지 않으면 참형(斬刑)에 처(處)하는 게 진(秦)나라의 법(法)이였으므로. 이에 진승(陳..

유방(劉邦). 진평(陳平). 한신(韓信)

■ 유방「劉邦 (BC247~BC195)」-漢나라를 통일 한(漢:BC 206~AD 220)나라를 세운 첫 번째 황제로. 자(字)는 유계(劉季), 묘호는 고조,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1911년까지 유지되었던 중국 황제제도의 특징은 대부분 이때 갖추어졌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진(秦:BC 221~206)의 하급관리인 쓰수이[泗水] 지방의 정장(亭長)으로 출발하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죽은 다음 모반을 일으켰다. 반군은 명목상 항우(項羽)의 지휘 아래 있었다. 항우는 진(秦)의 군대(軍隊)를 쳐부수고 많은 옛 귀족들을 복권시켰으며 자신의 장수(將帥)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면서 진나라이전의 봉건제도를 다시 시행(施行)했다. 그때 주요한 반군 지도자(指..

한유(韓愈,768 鄧州, 824長)

■ 한유(韓愈,768 鄧州, 824長) 산문(散文)의 대가(大家)이며 탁월(卓越)한 詩人. ↑한유(韓愈,768鄧州, 824長) 자(字)는 퇴지(退之).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이다. 어려서 고아(孤兒)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 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時期)에 유학(儒學)을 옹호(擁護)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參拜)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

제89주기 보재 이상설 선생 제향 및 기념식.

새 생명이 꽃피는 봄에 귀하의 보람있는 일들이 이루어 지시기를 기원 합니다. 금년은 민족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이신 보재 이상설 선생 께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돌아오신후 나라를 되찿기 위한 독립 운동으로 중국 연길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신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래와 같이 제89주기를 기념하여 선생을 추도하고 선생의 높은 뜻을 따라, 이 민족의 앞날을 열어가고자 귀하를 초청 하오니 추도와 기념행사에 자라를 함께 하시어 빛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 래----------- [일 시] 2006년 4월22일(토) 오전11시 [장 소]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 숭렬사 [행사내용] 제89주기 향사 및 기념식. 국가 보훈처장 박유철 충청북도 도지사 이원종 (사)보..

呂太后-漢 高祖 劉邦의 아내.

■ 여 태후(呂太后, BC 241~180) - 한고조 유방(漢 高祖 劉邦)의 아내. ▲여태후(呂太后) 기원전 241~180 시대의 한고조 유방의 아내이다. 이름은 여치(呂雉). 산둥성(山東省=산동성) 단현(山東省 單縣) 출신으로, 어렸을 때 아버지는 원수를 피하여 장쑤성(江蘇省=강소성) 패현(沛縣)으로 피난와서 살았다. 첫 번째 만난 연회때 유방(劉邦)의 비범한 기도에 반하여 기쁘게 반려로 맺어졌다. 일테면 평범한 인간이었던 유방의 부인인 셈이다. 기원전(BC) 205년 유방은 항우(項羽)를 이기기 위하여 여치(呂雉)와 유방의 부모는 이년간이나 인질로 있었다. 203년 여치는 한나라로 귀환하여 관중에 머물렀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후 칭 제후에 여치는 황후로 봉하여졌다. 둘 사이에는 그녀가 낳은 (盈)이..

항우(項羽) 와 범증(范增)

■항우(項羽) BC 232 중국 초(楚)나라~202) 안후이 성[安徽省]. 중국 진나라(秦 : BC 221~206) 말기의 장수이며, 진을 멸망시킨 반란군의 지도자이다.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한(漢 : BC 206~AD 220)을 세운 유방(劉邦)과 관중(關中)의 지배권(支配權)을 놓고 다투었다. 항우가 패(敗)함으로써 중국에서 봉건제(封建制)가 일소(一掃)되었다. 항우(項羽)는 진나라가 전 중국을 통일하고 전국에 할거(割據)하던 제후국들을 폐지(廢止)시킬 때, 진에 흡수(吸收)된 나라가운데 하나인 초나라 유력가문의 후손(後孫)이었다. 진에 대항(對抗)하는 반란(反亂)이 각지에서 일어났을 때, 항우는 삼촌인 항량(項梁)이 이끄는 초군(楚軍)에 합류(合流)했고, 나중에 그를 이어 초군의 최고 ..

제의례(祭儀禮)

1. 제례의 뜻 제의례는 조상을 제사 지내는 의식절차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존재하게 한 근본에 보답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효도이다. 보답은 조상이 살아 계신 동안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살아 있는 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 가신 조상을 살아계신 조상 섬기듯이 뫼시는 것이며 그와같이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 제의례이다. 그러나, 이 제례는 복잡한 형식보다 그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것은 현대 문물에 의해 조상에 대한 현대인들의 공경심이 희박해진 결과라 할 것이다. 생활이 복잡하고 일에 쫒기는 현대인일지라도 1년에 한번 돌아오는 기일이라도 보은의 뜻으로 예를 지켜야 할 것이다. 2. 제의례의 변천 제사의 근원은 먼 옛날에 천지변, 질병, 맹수의 공격을 막기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