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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훈춘시와 북한을 연결하는 권하통상 두만강 다리에서.

중국의 훈춘과 북한을 연결하는 권하통상교 다리(두만강)중간이 국경선 임으로 우리 일행은 훈춘 부시장의 안내로 두만강을 연결하는 다리 중간 지점에서 촬영할수 있었다.보이는 강이 두만강이고 건너편 보이는 산이 북녁땅이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이날도 양국의 무역상들이 이 다리를 통해(차량)..

카테고리 없음 2006.05.01

비암산 일송정 앞에서

↑중국 길림성 용정시 일송정 진달래시비 및 기념탑 앞에서 좌측 앞줄부터 김순무 前 농축산물 유통회사 사장, 민주평통 변경섭 운영위 간사, 다음이 이재정 민주평통수석부의장, 이준일 前 용정시부시장, 연길의 임호운 대우호텔사장, 뒷줄 좌측부터 손영훈(주)미래 CTI 사장, 다음이 미래노인요양원 김장일이사장, 다음은 황병직 GEP종합건설사장. 끝에 모자쓴 이는 필자이다.

■ 기타/포 토 2006.04.26

두만강 건너 북한의 회령시가 보인다.

↑황병직사장과 함께 중국 연변 삼합(三合/북한의 회령시와 마주보는 곳)에서 (2006. 04. 25) 2006년 4월23일 부터 4박5일간 중국 연변일보사.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선생전람관 및 그가 만주에 최초로 민족학교를 세운 서전서숙(용정실험소학교). 두만강, 훈춘시등의 중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삼합. 두만강 건너편 북녁의 회령시가 눈앞에 보인다. 좌측 네모난 야산뒤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 김정숙의 생가와 기념비가 있다는 현지인의 설명이 있었다

■ 기타/포 토 2006.04.25

제구의 종류

재기(祭器) ●병풍(屛風) 화려한 채색이 된 병풍보다는 좋은 글귀가 쓰여진 병풍을 쓴다. ●돗자리 무늬가 없는 자리를 쓴다. ●교의(交椅) 신주나 지방을 모시는 자리이다. ◇병풍에 지방을 직접 붙일 때는 교의가 없어도 된 다. ●제상(祭床) 다리가 높은 제상을 쓰거나 일반 교자상에 한지를 깔고 사용하기도 한다. ●축판(祝板) 축문을 끼워 놓는 뚜껑이 붙은 판이다. 크기는 사방 30㎝면적이 적당하다. 오늘날은 결재판이나 흰 봉투로 대체 하는 것도 무방하다. ●촛대(燭臺) 2개 제상의 초는 불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날이 밝으 면 끈다. 따라서 전등의 사용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힐 수 있어 촛대는 사실상 소용이 없다. 그러나 불을 밝힌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사 용하는 가정이 많다. ●작은상 2개 향로와 향..

제89주기 보재 이상설선생 제향 및 기념식.

새 생명이 꽃피는 봄에 귀하의 보람있는 일들이 이루어 지시기를 기원 합니다. 금년은 민족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이신 보재 이상설 선생 께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돌아오신후 나라를 되찿기 위한 독립 운동으로 중국 연길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신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래와 같이 제89주기를 기념하여 선생을 추도하고 선생의 높은뜻을 따라 이 민족의 앞날을 열어가고자 귀하를 초청 하오니 추도와 기념행사에 자라를 함께 하시어 빛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 래-------- [일 시] 2006년 4월22일(토) 오전11시 [장 소]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 숭렬사 [행사내용] 제89주기 향사 및 기념식. [주관] 국가 보훈처장 박유철 충청북도 도지사 이원종 (사)보재 이상..

사마천(司馬遷)

■사마천(司馬遷, BC 145경~BC 85경). 중국의 천문관, 역관(曆官),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歷史家)이다.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기원전(BC) 105년 무제(武帝)가 즉위한 후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誹謗嫌疑)로 심문(審問)을 당했다. 무..

유종원(柳宗元, 773~819)/중당기(中唐期)의 시인.

■ 유종원(柳宗元, 773~819) -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 자는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邊境地方)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이러한 좌절(挫折)과 13년간에 걸친 변경(邊境)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思想)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韓愈)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對立的)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傳統主義) 인데 반하여, 유종원(柳宗元)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參酌)하고 신비주의(神秘主義)를 배격(排擊)한 자유·합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