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항우(項羽) 와 범증(范增)

야촌(1) 2006. 4. 14. 19:20

항우(項羽)

 

 BC 232 중국 초(楚)나라~202) 안후이 성[安徽省].

 

 

중국 진나라(秦 : BC 221~206) 말기의 장수이며, 진을 멸망시킨 반란군의 지도자이다.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한(漢 : BC 206~AD 220)을 세운 유방(劉邦)과 관중(關中)의 지배권(支配權)을 놓고 다투었다.  항우가 패(敗)함으로써 중국에서 봉건제(封建制)가 일소(一掃)되었다. 

항우(項羽)는 진나라가 전 중국을 통일하고 전국에 할거(割據)하던 제후국들을 폐지(廢止)시킬 때, 진에 흡수(吸收)된 나라가운데 하나인 초나라 유력가문의 후손(後孫)이었다. 

진에 대항(對抗)하는 반란(反亂)이 각지에서 일어났을 때, 항우는 삼촌인 항량(項梁)이 이끄는 초군(楚軍)에 합류(合流)했고, 나중에 그를 이어 초군의 최고 지휘자가 되었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는 결국 진(秦)의 수도를 점령(占領)하고 진의 마지막 황제를 처형(處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옛 통치체제(統治體制)를 회복(回復)시키려고 했다. 

우선 옛 초(楚) 왕실의 후예(後裔)를 맞아 회왕(懷王)이라고 했다가 의제(義帝)로 존중해주었고, 반란에 가담(加擔)했던 여러 장수(將帥)들에게 전국의 여러 지역을 분봉해주었다.

 

자신은 옛 초나라의 영토에 자리 잡고, 패왕(覇王)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항우는 곧 의제(義帝)를 살해(殺害)했고, 각지의 장수들이 패권(覇權)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强力)한 자가 중국의 서부 지역인 파(巴)· 촉(蜀)· 한중(漢中)에 분봉(分封) 받았던 유방이었다.

 

원래 농민 출신인 유방(劉邦: 중국 한나라 초대 황제(BC 256~BC 195, 재위 BC 206~BC 195))은 민심을 얻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차차 서쪽 지역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입지(立地)를 강화(强化)했다.

 

반면에 항우는 봉건제를 재현시키고 있었다. 그는 장신에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학식을 갖춘 시인이었으며, 탁월(卓越)한 군사 전략가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그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인간적 매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두 세력의 공존관계는 유방이 초를 공격함으로써 끝이 났다. 유방은 육박전(肉薄戰)으로 승부(勝負)를 내자는 항우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202년 항우는 패하여 포위를 뚫고 도망가던 중 자살했다. 항우의 영웅적 행동, 특히 마지막 전투에서 보여준 용감(勇敢)한 모습은 중국 시(詩)와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두주불사(斗酒不辭). 수자부족여모(豎子不足與謀). 부귀불귀고향 여의수야행(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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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증(范增(BC 277 ~ 204) - 항우의 군사(項羽의 軍師)

 

진(秦)나라 말기(末期) 항우의 모사(謀士-책사)이다. 범증(范增)은 어려서부터 기계(奇計)를 좋아했으며 70세 때, 항우를 도와 항우로부터 역양우에 봉해지고 아부의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홍문의 회 이후 유방의 술책(術策)에 빠진 항우로부터 유방의 내통자(內通者)로 의심을 받은 이후 실권을 빼 앗긴 뒤 항우를 떠나 팽성(彭城)으로 돌아가던 중에 등창이 터져 죽었다.

홍문의 회는 유방을 살해하기 위해 홍문(鴻門)에서 배푼 연회(宴會)로 장량(張良)과 번쾌(樊噲) 때문에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