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王莽, BC 45~AD 23)
↑왕망화상(王莽画像)
자 거군(巨君). 산둥[山東] 출생.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왕(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 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되어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王莽)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王鳳)의 인정을 받았다.
BC 33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BC 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되었다. 그 뒤 왕씨 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BC 8년 38세로 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다음의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애제(哀帝)가 1년 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사마에 복귀하였다.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자기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자기에게는 안한공(安漢公)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를 붙여 평제의 보정자(輔政者)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그는 평제의 어머니를 비롯한 외척세력을 모두 숙청하였고 자신의 아들 왕우(王宇)도 독살하였다.
AD 5년에는 평제를 독살한 뒤 2세의 유영(劉嬰: 宣帝의 현손)을 세워,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다.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벌였다. 이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하여 인간에게 표시되는 천명(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AD 8년 유영(劉嬰)을 몰아내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新)’이라 하여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성공하였다. 황제 왕망은 유교를 중시하였고 주나라 시대의 정책을 폈다. 주(周)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은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하여 주는 사대제도(賖貸制度)를 두기도 하였고 노비 매매를 금지시켰다. 이것도 사상적으로는 유교 교전인 《주례(周禮)》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인 것이나,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 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이었다. 왕망의 이러한 정책은 후세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하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이해(利害)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사회혼란을 증대시켰다.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 나라가 그를 이반(離反)하였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이와 같이 내외정세가 악화된 속에서 18년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22년에는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난양[南陽]의 호족 유수(劉秀:後漢의 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河南省 葉縣)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한 왕조의 혈통을 이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9대손 유수[劉秀, 광무제(光武帝)-후한의 초대 황제(재위 25∼57)]가 후한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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