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 중국 최초 농민 봉기의 지도자

야촌(1) 2006. 4. 18. 02:45

■ 진승(陳勝)과 오광(吳廣)/(BC 209~208)  

 

 맨 처음 진(秦)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로. 진승은 하남(河南) 출신인데, 자(字)가 섭(涉)이므로 진섭(陳涉) 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머슴 살이를 하였으며. 오광(吳廣) 또한 같은 하남(河南) 출신으로 집이 매우 가난하였었다.

 

진승과 오광 이들 두 사람은 진시황의 아들이 황제를 계승한 기원전 209년에 변방의 성(城) 을 쌓는 노역자(勞役者)로 징발된 자들의 인솔(引率)을 맡은 책임자(責任者)인데, 미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홍수를 만나 길이 막혀 도저히 기일(期日) 내에 도착(倒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법은 목적지에 기일내 도착하지 않으면 참형(斬刑)에 처(處)하는 게 진(秦)나라의 법(法)이였으므로. 이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대책(對策)을 의논(議論)한 끝에, 진승이 여러 사람 앞에 이렇게 부르짖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한번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왕후(王后)와 장상(將相)이 어찌 따로 씨가 있겠소. 우리들도 하면 되지 않겠소.’ 하고, 반진(反秦) 세력을 모아 봉기(蜂起)를 한 후 진승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오광은 도위(都尉)가 되어 국호를 장초(張楚)라 정했다. 자신의 행동이 전국시대의 초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장초(張楚)는 중국 최초의 농민 정권 이었던 셈이다.

 

이 되고 오광은 도위(都尉)가 되어 반진(反秦) 세력을 모아 봉기(蜂起)를 했다. 처음에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목전의 이익만을 탐하다 봉기한 지 여섯달 만에 농민군은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그는 농민군 내의 반군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서 장초(張楚)의 농민정권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혁명의 불길은 전국에 널리 퍼져나가 각지에서의 봉기를 끝내 촉진 시키어, 얼마 안 가서 진제국을 타도하기에 이른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봉기의 지도자로서 새로운 시대를 연 선구자로 후세에 높이 평가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