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유방(劉邦). 진평(陳平). 한신(韓信)

야촌(1) 2006. 4. 18. 01:22

■ 유방「劉邦 (BC247~BC195)」-漢나라를 통일

 

한(漢:BC 206~AD 220)나라를 세운 첫 번째 황제로. 자(字)는 유계(劉季), 묘호는 고조,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1911년까지 유지되었던 중국 황제제도의 특징은 대부분 이때 갖추어졌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진(秦:BC 221~206)의 하급관리인 쓰수이[泗水] 지방의 정장(亭長)으로 출발하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죽은 다음 모반을 일으켰다. 반군은 명목상 항우(項羽)의 지휘 아래 있었다. 항우는 진(秦)의 군대(軍隊)를 쳐부수고 많은 옛 귀족들을 복권시켰으며 자신의 장수(將帥)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면서 진나라이전의 봉건제도를 다시 시행(施行)했다.

 

그때 주요한 반군 지도자(指導者)였던 유방은 지금의 쓰촨 성[四川省]과 산시 성[山西城] 남쪽, 즉 중국 서부지역의 제후(諸侯)인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이들은 곧 적대관계가 되었으며 농민 출신의 경험과 영리함을 갖춘 유방(劉邦)은 군사적으로 뛰어났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고지식했던 항우를 패배시켰다.

 

유방(劉邦)은 학자들을 싫어하여 학자의 관에 오줌을 누어 혐오감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여 유교의 예를 채택했다. 그는 농촌경제를 부흥시키고 농민들의 세금부담을 덜어주는 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통치체제는 관제(官制)의 경우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했으나, 지방통치의 경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이것을 군국제(郡國制)였다. 그는 한나라 건설에 공이 큰 부하장수들과 친인척들을 제후왕(諸侯王)·열후(列侯)로 봉해 각지에 내보냈다.

 

그러나 후에 그는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가장 공이 컸던 한신(韓信)· 팽월(彭越)· 영포(英布) 등의 공신 제후들을 모두 처형하고 제후왕은 한나라의 일족에 한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왕조의 기초를 굳건히 했다. 

 

BC 200년 스스로 흉노(匈奴) 원정에 나섰다가 백등산(白登山)에서 패하여 포로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이후 흉노에 대해서는 화친정책을 취함으로써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한나라 초대황제 유방(劉邦)            ↑여황후((呂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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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평『陳平(미상 ~ BC 178)』 : 漢나라의 기틀을 다진 재상

 

한(漢) 왕조의 개국 공신의 한 사람으로 서한 초기에 승상(丞相)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책사)로 알려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황로학(黃老學)을 좋아하였으며, 진(秦)나라 말기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봉기하자 그는 위왕(魏王) 구(咎)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았다. 

 

다시 항우(項羽)에게 기탁하여 진(秦)나라 공격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그때까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자 후에는 다시 유방(劉邦)을 섬겼다. 그는 항상 유방의 막하에 있으면서 뛰어난 계책(計策)을 짜내어 몇 번이나 유방의 위난(危難)을 구했으며, 항우와의 승패를 건초 한전(楚漢戰)에서도 그는 타고난 지모를 발휘하여 유방의 중요한 참모(參謀)가 되었다.

 

혜제(惠帝) 6년(BC 189년) 좌승상에 임명되었다가 여황후(呂皇后-유방의 처)가 전권을 장악(掌握)하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BC 180년 여황후가 사망하자 여씨(呂氏) 일족을 주살하고 문제(文帝)를 옹립(擁立)하여 한왕실을 평정함으로써 현상(賢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문제 2년(BC 178년)에 세상을 떠났다.

 

↑陳平            ↑漢初名相陳平(來源:資料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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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韓信, 미상 - BC196)

↑한신 초상(韓信 肖像)

 

회음 후 한신은 전한(前漢) 시대의 뛰어난 장수(將帥)이며 한(漢)의 대원수(大元帥)로 발탁(拔擢)된 인물 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신은 지용(智勇)을 겸비(兼備)한 랑장(良將)이라고 할 수 있다.

 

한신 은 일찍이 집이 가난해 동네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한신(韓信)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보고 동네의 불량 배들이 조롱을 했었다. 어느 날 불량배 중 한 녀석이 한신 을 심하게 조롱하며 지나가려면 자신의 다리 밑으로 지나가라고 했다. 

 

한신은 분(忿) 을 꾹 참고 그 불량배의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고 한다. 비록 웃음꺼리가 되기는 했지만 여기서 '수과하욕(受袴下辱-다리 사이를 기어가며 욕을 참는다)' 이라는 고사가 생기기는 했다.

 

한신은 항우 밑으로 들어가지만 볼품없는 외모(外貌) 때문에 하찮은 벼슬을 하면서 보내지만 속으로는 천하를 측량하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일찍이 항우(項羽)의 군사 범증(范增)은 그의 큰 뜻을 알아보고 항우 에게 여러 차례 죽이던지 등용(登用) 하라고 간언(諫言) 했지만 항우 는 한신 의 용모(容貌)가 대수롭지 않음을 들어 그때마다 거절 했다.

 

항우(項羽)에게 실망한 한신은 그날로 유방을 찾아가 그곳에서 대원수(大元帥)로 발탁(拔擢) 되었다. 삼진왕을 깨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작은 자치국들을 하나하나 먹어가기 시작한 한신은 마침내 초나라와 자웅(雌雄)을 겨루게 되고 급기야는 1백 30만에 달하는 군세로 '해하'에서 초패왕 항우를 완벽(完璧)하게 섬멸(殲滅)시켜 버림으로써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 준다.

 

하지만 제(齊)나라의 王으로 임명(任命)되었던 한신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은근(慇懃)히 경계하고 있었던 유방과 유방의처인 여황후((呂皇后)가 결탁(結託)하여 한신을 모반사건(謀叛事件)에 연루 시켜 결국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이렇듯 한신은 장량(張良)과 같은 지략가(智略家)라기 보다는 천하의 명장(名將), 즉 장수(將帥)에 가깝다. 일기당천의 용장(庸將)이자 최고의 지장(智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