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측천무후(則天武后,625-705?) -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재(女帝)
▲측천무후(則天武后)
본명은 무조(武曌). 무후(,武后), 무측천(武则天)이라고도 한다. 당(唐)나라고종(高宗)의 비(妃)로 들어와 황후(皇后)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實際的)으로 통치(統治)했다. 생애(生涯)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다. 무후는 당조의 기반(基盤)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統一)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入闕)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 한 시기였다. 태종의 후궁으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649년 태종이 죽을 무렵 이미 태자(太子/훗날 高宗 : 태종 이세민의 9남)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죽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어 불사(佛寺)에 은거하고 있던 중 신임황제인 고종(高宗 : 李治,649~683)이 그곳을 자주 방문(訪問)했다. 고종은 마침내 무후를 궁중으로 데려와 소의(昭儀)라는 비(妃)의 지위를 주었다.
무후는 먼저 궁중 내의 비빈(妃嬪)들을 제거(除去)하고, 마침내 황후를 폐위(廢位)시키고 655년에는 자신이 황후(皇后)가 되었다. 무후와 고종 사이에 4남 1녀가 태어났다. 무후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肅淸)했다.
이들은 무후가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던 대신들이었다. 그들이 반대한 주된 이유는 무후가 고관(高官)의 딸이기는 하지만 귀족가문의 태생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들은 또한 무후가 선제(先帝)인 태종의 후궁이었다는 점을 들어 무후와 고종의 관계는 근친상간(近親相姦)이 되므로 그 관계를 청산(淸算)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60년이 되어 무후는 반대파를 파직·추방·처형시킴으로써 모두 제거했다. 황족인 고종의 숙부마저 주살(誅殺)했고 그의 일가도 모두 유배(流配)당하거나 몰락(沒落)했다. 고종이 오랫동안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무후가 전권을 장악(掌握)하여 고종의 병약함을 핑계로 통치를 해나갔다. 천성이 나약(懦弱)했던 고종은 무후에게 전적으로 의지(依支)하게 되었고, 고종이 죽기까지 23년 동안 무후가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무후는 모반(謀叛)의 가능성이 있는 정적(政敵)들을 계속 제거해나갔고 그 정적이 자신의 피붙이일 때도 숙청(肅淸)을 주저(躊躇)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도전세력이 있을 때 자신을 지원(志願)한 사람들 중 인재들을 중용하여 제국의 행정을 효율적(效率的)으로 운영해나갔다.
무후는 뛰어난 행정수완(行政手腕,), 용기(勇氣), 과단성(果斷性) 및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태도 등으로 인하여 궁중 내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은 받지 못했으나 존경(尊敬)은 받았다. 655~675년에 당제국은 무후가 중용 하여 승진시킨 군사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에까지 영향력을 확대(擴大)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태자인 철(哲)이 즉위하여 중종(中宗)이 되었다. 중종은 위씨(韋氏) 가문의 여자를 황후로 삼았는데 위 황후는 중종이 선제인 고종만큼이나 유약(懦弱)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무후와 같은 지위로 격상시키려 했다. 한 달 뒤 무후는 중종을 폐위시켜 추방(追放)해버리고 둘째 아들인 예왕단(豫王旦)을 즉위시키니 이가 곧 예종(睿宗)이다.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고 실권은 모두 무후의 손에 있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당조지지 세력과 야심만만한 젊은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몇 주 지나지 않아 황실을 지키는 충성스런 관군에 의해 진압(鎭壓)되었다.
무후가 관군을 동원하여 손쉽게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지지(支持)하는 세력의 규모(規模)를 과시(誇示)하자 무후의 정치적 기반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인 것처럼 보였다. 6년 뒤인 690년 65세의 무후는 왕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15년 동안 황제로서 통치했다.
이 시기에 황위계승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무후의 친정인 무가(武家)의 조카들은 무후가 이미 국호를 주(周)로 바꾸었으니 이가(李家)의 당조 후계자들을 제치고 무씨의 조카들 중 한 사람에게 황위를 물려주리라고 기대(期待)했다.
그러나 무씨 조카들이나 그 아들 중에는 대중적 인기가 있거나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한편 무후의 친아들인 전 황제 중종과 예종은지지 세력이 없었고, 능력은 더욱 형편없었다.
그러나 무후의 충성스런 측근들 사이에서도 당조를 세운 이가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커져갔다. 698년 무후는 충성스런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유배된 중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책봉했다.
이 같은 결단을 내린 것을 보면 무후가 대단한 성품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무후는 황위계승에 있어서 자신의 가문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조카를 후계자로 지목하지도 않았다. 무후는 자신의 가문을 흥성하게 하겠다는 야망은 없이 단지 임종 시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진 듯했다.
699년경 말년의 무후는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의 장 씨 형제에게 총애(寵愛)를 베풀었다. 이들은 기예(技藝)를 가진 간신들로서 기발(奇拔)한 연회와 수단(手段) 좋은 아첨(阿諂)으로 무후의 총애(寵愛)를 받았다.
장 씨 형제들은 궁중사람들과 대신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게 되었고, 이들은 무후에게 장 씨 형제의 해악을 경고(警告)했다. 무후는 이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병에 걸려 전보다 더 장 씨 형제에게 의존(依存)하게 되었다.
705년 2월 대신들과 장수들이 모반을 일으켜 궁중을 장악하고 장 씨 형제를 처형한 뒤, 늙고 병든 무후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무후는 중종에게 양위한 뒤 다른 궁으로 옮겨가 살다가 705년 12월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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