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702

제3대 문왕(文王) - 재위 737∼794

제3대 문왕(文王) 이름은 대흠무(大欽茂). 무왕의 아들이다. 1980년에 발견된 정효공주묘비(貞孝公主墓碑)에 의하면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 (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의 존호를 사용하였다 한다. 737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였고, 774년(대흥 38) 보력(寶曆)으로 개원(改元)하였다가 다시 대흥의 연호를 쓰게 되어 병몰할 때까지 그 연호를 지켰다. 1948년 돈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에서 출토된 정혜공주묘의 비문을 보면 ‘보력’이라는 연호가 7년 이상 쓰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왕은 고왕 대조영(大祚榮)이래 30년간의 수도였던 지금의 돈화분지(敦化盆地)안에 있는 오동성(敷東城)의 비좁은 지역을 벗어나 두만강 하류로 흘러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유역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목단강..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제2대 무왕(武王)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다. 발해국의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713년(고왕 15) 당나라가 고왕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할 때, 대무예도 같이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719년(무왕 1) 3월 고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발해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722년 송화강(松花江)하류에서 흑룡강(黑龍江)유역에 걸쳐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당나라는 그곳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는 흑수말갈이 외교관계를 취할 때는 발해의 사전양해를 얻었던 전통을 파기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통모하여 복..

제1대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 재위 699∼719

대조영(大祚榮) 본명 대조영(大祚榮). 고구려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의 영주(營州)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와 거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하여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오자,..

민진강(閔鎭綱)

■ 민진강(閔鎭綱) [생졸년] 1659년(효종 10)~1727년(영조 3). ● 요약 [자] 사정(士正) [호] 애일당(愛日堂) [시호] 효간(孝簡) [시대] 조선후기 [본관] 여흥(驪興) [활동분야] 문신 ----------------------------------------------------------------------------------------------------------------------------------------------------------------- 1659년(효종 10)~1727년(영조 3).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정(士正), 호는 애일당(愛日堂). 증조부는 민환(閔桓)이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

우암 송시열의 고종일기(考終日記)

「송시열」의관 갖춘뒤 세그릇 사약 의연하게 받아 오용원 교수 ‘考終일기’ 분석 “서리(書吏)가 선생에게 ‘임금께서 약을 내리셨습니다.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제자) 이후진(李厚眞)이 서리에게 ‘대감의 병환이 위중해 들을 수가 없으니 가까이 다가가서 크게 말씀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서리가 조금 앞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다시 고하니, 선생이 곧바로 몸을 움직여 일어나 앉아 상의를 가져오게 하셨다. 직령(直領·두루마기)을 찾아 가져다 드리니 선생이 팔을 들면서 입히라고 명하셨다.” 1689년 6월 8일 유배지인 제주에서 한양으로 압송 도중 초산(楚山·현 정읍)에서 사약을 받은 우암 송시열(1607∼1689·사진)의 임종 순간을 담은 고종일기(考終日記) ‘초산일기’의 한 대목이다. 제자 민진강이 ..

계백장군(堦伯將軍)

계백장군[堦伯將軍, ?∼660(의자왕 20)] ●황산벌의 한 계백(堦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천명으로 오왕(吳王) 부차(夫差..

양만춘(楊萬春) 장군

■ 양만춘(楊萬春) 장군 ●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의 성주 그는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 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히고 있다. 어떻든 그는 지금의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소재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난 바 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에 의한 정권장악에도 불구하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

고선지(高仙芝) 장군

■ 고선지(高仙芝) 장군 고선지((高仙芝, 미상~755) 장군은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로 당나라의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 패했다. 755년 안녹산의 난에서 토벌군을 이끌고 수도인 장안을 지켰다. 그러나 전투 중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적문제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로서,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 안서절도사 (安西節度使) 등을 지냈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 《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

가야 제2대 거등왕(居登王)~제10대 구형왕(仇衡王)

제2대 거등왕(居登王) 재위 199∼253 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과 허왕후(許王后)의 아들이다. 비는 천부경(泉部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 제3대 마품왕(麻品王) 재위 253∼291 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가락국기 駕洛國記〉에 따르면 253년에 즉위, 39년을 다스리고 291년 1월 29일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며, 태자 거질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