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702

杜門洞七十二賢錄

■ 杜門洞七十二賢錄 휘(諱) 호(號) 본관(本貫) 휘(諱) 호(號) 본관(本貫) 정몽주鄭夢周) 포은(圃隱) 연일(延日) 김약항(金若恒) 척약재(척若齋) 광산(光山) 김 주(金 澍) 용암(龍岩) 선산(善山) 김약시(金若時) 시호충정(忠定) 광산(光山) 이존오(李存吾) 석탄(石灘) 경주(慶州) 이무방(李茂芳) 남곡(南谷) 영천(永川) 정 추(鄭 樞) 원재(圓齋) 청주(淸州) 이 행(李 行) 기우자(騎牛子) 여주(驪州) 최 양(崔 瀁) 장육당(藏育堂) 전주(全州) 변 숙(邊 肅) 길 재(吉 再) 야 은(冶隱) 선산(善山) 김광치(金光致) 상주(尙州) 남을진(南乙珍) 사천(沙川) 의령(宜寧) 이종학(李種學) 인재(麟齋) 한산(韓山) 임선미(林先味) 휴암(休庵) 평택(平澤) 이양소(李陽昭) 금은(琴隱) 순천(順天..

황현(黃玹)

■ 황현(黃玹) ↑석지 채용신이 그린 매천 황현의 초상화. 매천은 체구가 작고 병이 잦았지만 기상은 날래고 굳세어 가을매가 꼿 꼿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독립운동가박은식은 매천에 대해 “문장과 기개가 사림 가운데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1855(철종 6)∼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시인·문장가.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라남도 광양 출신. 시묵(時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 놓..

성씨별 인물 배출현황

■ 주요 성씨별 상신.문형.왕비.청백리.문과.무과.음관.진사.생원 배출현황. No 관 향 상신 문형 왕비 청백 문과 무과 음관 진사 생원 합 계 1 전주이씨 22 7 - 10 870 1,361 1,077 1,640 1,384 6,371명 2 밀양박씨 1 1 - 2 267 1,085 127 413 393 2,289명 3 김해김씨 1 - - 1 131 1,378 26 248 236 2,021명 4 남양홍씨 9 3 1 6 334 345 317 500 377 1,892명 5 파평윤씨 11 2 4 6 347 288 219 518 470 1,865명 6 청주한씨 12 1 5 3 290 464 227 419 436 1,857명 7 안동권씨 8 3 1 1 368 229 206 431 531 1,778명 8 경주김씨 6..

절신록/순절신(殉節臣)

■ 정묘호란 순절신(丁卯胡亂殉節臣) 1627년(인조 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 :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호란(胡亂)으로 순절한 인물. 24명 ◇이 완(李 莞) : 의주부윤(義州府尹). ◇최몽량(崔夢亮) : 의주판관(義州判官). ◇이희건(李希建) : 용천부사(龍川府使). ◇남이흥(南以興) : 평안병사(平安兵使). ◇박명룡(朴命龍) : 우후(虞侯). ◇김 준(金 浚) : 안주목사(安州牧使). ◇전상의(全尙毅) : 귀성부사(龜城府使). ◇송도남(宋圖南) : 영유현령(永柔縣令). ◇장 돈(張 暾) : 옥산군(玉山君)으로 증산군수(甑山郡守). ◇귄이길(權頤吉) : 본관은 안동(安東), 평양판관. ◇기 협(奇 協) :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상안(金尙安) : 강계부사(江界府使). ◇김양언(金良彦) : 태..

장계향 - 정부인 안동장씨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이 때 이름은 명명이라기보다는 명성에 가깝다. 명명이든 명성이든 간에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사람은 너무나 많다. 명명은 있되 명성이 없다면 그 이름이 역사의 기록에 남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명성이 있어도 명명이 불분명한 사례도 많다. 우리 역사 속의 여인들은 대부분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아버지의 딸로, 남편의 아내로, 아들의 어머니로 일컬어졌다. 부계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울타리 속에서 그 존재가 명명되어 왔다. 그래서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에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이 없었다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변별적 존재로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오화영(吳華英) - 독립운동가

1880년. 04월. 05일 ~ 1950년(납북), 호(號)는 국사(菊史). 일명 하영(夏英).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와 미국인 남 감리교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서울의 신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목사로 취임하여, 경성종교교회(京城宗橋敎會)의 주임목사로 재직하였으며, 광성소학교(光成小學校) 부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정춘수(鄭春洙)· 박희도(朴熙道)· 이승훈(李昇薰) 등과 연락하여 고종의 국장을 기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의하였다. 개성 남성병원(南星病院)의 동생 은영(殷英)과 김지환(金智煥) 등의 도움으로 개성지방의 연락을 담당하는 등 3·1운동 때,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일제에 잡혀 2년 6개월간 옥고를 ..

최북(崔北)

■ 최북(崔北) 1712(숙종 38)~ 1786(정조 10).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거기재(居基齋)·성재(星齋)·삼기재(三奇齋)·기암(箕庵)·기옹(奇翁)·좌은(坐隱)·반월(半月)·호생관(毫生館). 아버지는 계사(計士) 상여(尙餘)이다. 1747년(영조 23)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가로 일본에 다녀왔다. 서울의 여항(閭巷) 출신으로 이익(李瀷)·이용휴(李用休)·신광수(申光洙)·신광하(申光河)·정범조(丁範祖)·이광사(李匡師)·강세황(姜世晃) 등 당시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소론계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문사지식의 표방에 따른 초세적(超世的) 친자연주의의 실천과 함께 사의적(寫意的)인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하는 ..

박 대통령 '제65주년 국군의 날' 기념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친애하는 국군 장병 여러분,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제 65주년 국군의 날을 온 국민과 함께 축하합니다. 먼저, 창군 이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19만 5,306명의 순국장병께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군의 오늘을 만드신 창군 원로와 참전용사, 예비역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후방에서 국토방위에 땀 흘리고 있는 국군 장병들과 이역만리 세계 각지에서 국위선양에 힘쓰고 있는 해외 파병부대의 노고에도 감사를 보냅니다. 올해는 한미동맹 6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입니다. 오늘 기념식에 특별히 참석하신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과 마틴 뎀시 미 합참의장, 그리고 우리 국군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대한민국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주한미군 장병 여러분에게..

제15대 대인선(大諲譔) - 재위 907∼926

대인선은 발해의 제15대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재위 시절의 발해는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팽창주의에 두려움을 느끼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 대원수 요골(堯骨) 등을 이끌고 친정(親征)을 감행하자, 발해는 저항다운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다음해 정월에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포위되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건국 후 229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해 7월에 있었던 거란군의 회군시에 그는 왕후와 더불어 거란 본토로 끌려갔다. 그뒤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다. 그뒤 사용한 이름은 거란이 내린 오로고(烏魯古)였으며, 왕후는 아리지(阿里只)였다. 이 이름은 《요사 遼史》 국어해(國語解)에는 ..

제14대 대위해(大瑋瑎) - 재위 894∼906

연호와 시호·가계 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있다. 일본에는 전대의 현석(玄錫)때도 다녀왔던 문적원감(文籍院監) 배정(裵)을 894년에 파견하였으며, 905년 당나라에 오소도(烏炤度)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대위해는 발해왕계에서 빠져 있었으나, 김육불(金毓)의 노력에 의하여 《당회요 唐會要》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발해의 제14대왕으로 밝혀졌다. [참고문헌] ◇唐會要. ◇渤海國志長編(金毓,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