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백제 인물

계백장군(堦伯將軍)

야촌(1) 2013. 9. 12. 17:22

계백장군[堦伯將軍, ?∼660(의자왕 20)]

 

 

●황산벌의 한

 

계백(堦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천명으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70만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하여 세 진영으로 나뉘어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5,000 결사대의 용맹은 신라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신라군과의 네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戰死)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적었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한편, 권근(權近)은 계백이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인 것이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패하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며, 계백의 그러한 행동은 난폭하고 잔인무도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것은 특이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서거정(徐居正)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그 평가는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에 그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와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

 

↑부여 충곡사(忠谷祠)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산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