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구려 인물

고선지(高仙芝) 장군

야촌(1) 2013. 9. 11. 20:02

■ 고선지(高仙芝) 장군

 

고선지((高仙芝, 미상~755) 장군은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로 당나라의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 패했다. 755년 안녹산의 난에서 토벌군을 이끌고 수도인 장안을 지켰다. 

 

그러나 전투 중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적문제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로서,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 안서절도사 (安西節度使) 등을 지냈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 《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고, 또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이 고선지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같은 고구려놈’이라고 한 욕설에서도 알 수 있다. 

 

호삼성(胡三省)이 《원화성찬 元和姓纂》에 의한 주(注)를 단 것을 보면, ‘부몽(夫蒙)’이라는 성(姓)은 본래 서강인(西羌人)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중국에 동화된 이민족 사이에는 상대방을 욕할 때 종족적 멸시를 호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한 예가 호장(胡將) 안녹산(安祿山)과 가서한(哥舒翰) 사이에서도 보이는데, 그 기준은 한화(漢化)를 잣대로 하여 상대방을 업신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고선지는 한화된 호장이나 또는 주변인으로부터 시기를 받을 만큼 그의 전공과 업적은 빛나고 있다. 그에 대한 시기는 마지막 참형을 당하였을 때도 배후에 깔리고 있는 듯하다. 

 

●초기의 역사기록 

 

역사책에는 그가 말쑥한 용모로 무장답지 않게 수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사계는 그가 유완(儒緩)함에 늘 근심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는 영민하고 도량이 넓고 용감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 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 

 

20여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갔다. 

거기서 아버지가 세운 전공 덕분에 유격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곧 아버지와 같은 반열이 되었다고 하여,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모두 그를 보통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그가 안서군에 있을 때, 절도사 전인완(田仁琬) 및 개가운(蓋嘉運)은 그가 장차 큰 재목이 될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뒤 부몽영찰에 의하여 여러 차례 발탁이 되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개원(開元)말에 이르러 병력 2,000을 거느리고 천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었다가, 곧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 때문에 그에 관한 초기의 사적은 주목 받을 만한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 1차서역원정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원정하고 돌아 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 티벳)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토번족의 정벌 임무를 띠고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식닉국(五識匿國: 지금의 Shignan지방)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힌두쿠시준령을 넘어서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 (阿弩越城)을 점령하고, 사라센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의 제휴를 단절하였다. 

 

이 1차원정에서 불름(佛: 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의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홍로경어사중승(鴻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서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 2차 서역원정 

 

750년 제2차원정에 나가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Tasuhkent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한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그러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였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羅斯, 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막기 위하여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원정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을 하여 오히려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전투’이다. 제2차의 탈라스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 대장군(右羽林軍 大將軍)에 임명하였다.

 

755년에는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그리고 이해 11월 안녹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이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비기(飛騎), 확기와 삭방(朔方), 하서(河西), 농우(右) 등의 군대였다. 

 

여기에다 증원군을 더 보충하기 위하여 경사(京師)로 가 5만명을 뽑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봉상청(封常淸)과 교대하였다. 반란군이 동관으로 향하여 쳐들어오자 방어 담당지역인 합주(陜州)를 떠나 동관(潼關)으로 무단 이동한 사실을,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던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 관련문헌 및 업적 

 

고선지의 사적에 관한 자료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선지 열전>이 있다. 

이 두 문헌을 두루 살펴볼 때, 소발률(小勃律: 지금의 Gilghit부근)과 안서절도사 부몽영찰과의 관계 등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가 《신당서》보다 상세하다. 

 

최근에 와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 Ed.)가 종래의 중국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과 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하여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해 내어 밝힌 《서돌궐사료 Documents Sur les Tou―Kiue Occidentaux》가 발표되면서부터였다. 

 

또,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슈타인(Stein)은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선지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이와 함께 주목을 받은 것은 세계 최초로 섬유질의 제지법이 고선지에 의하여 유럽에 전파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즉, 751년 고선지가 제2차 탈라스전투에서 패하여 잡힌 포로 중에는 제지장(製紙匠)이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가 이룩한 빛나는 전적을 통하여 그의 뛰어난 지휘자로서의 통솔력과 전술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이 발견된다. 

 

① 서역에서 거둔 고선지의 탁월한 전과로서 소발률국을 토벌한 것,

② 당나라와 아라비아 두 나라가 석국과 탈라스성을 쟁탈하기 위하여 싸운 격전,

③ 탈라스전투 이후 제지법이 아라비아에 전파된 것 등은 그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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