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가야국 인물

가야 제2대 거등왕(居登王)~제10대 구형왕(仇衡王)

야촌(1) 2013. 9. 10. 17:53

제2대 거등왕(居登王) 재위 199∼253

 

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과 허왕후(許王后)의 아들이다.

비는 천부경(泉部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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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마품왕(麻品王) 재위 253∼291

 

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가락국기 駕洛國記〉에 따르면 253년에 즉위, 39년을 다스리고 291년 1월 29일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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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거질미왕(居叱彌王) 재위 291∼346

아버지는 제3대 마품왕(麻品王)이며, 어머니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다. 비는 아간(阿干)의 벼슬을 지낸 아궁(阿躬)의 손녀인 아지(阿志)이며, 이품왕(伊品王)을 낳았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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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이시품왕(伊尸品王) 재위 346∼407

 

이품왕(伊品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거질미왕(居叱彌王)이며, 어머니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 아지(阿志)이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인 정신(貞信)으로, 좌지왕(坐知王)을 낳았다.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400년에 왜가 신라를 침범함에 고구려가 구원군을 보내어 왜적을 물리치고 임나가라(任那加羅)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이시품왕대의 사실로 주목된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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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좌지왕(坐知王) 재위 407∼421

 

김질(金叱) 또는 김토(金吐)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5대 이시품왕(伊尸品王)이며, 어머니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이고, 비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다.

취희왕(吹希王)의 아버지이다.

 

즉위한 뒤 용녀(傭女)와 혼인을 하고 그녀의 척당을 관리로 등용하니 나라 안이 소란하여졌다.

이 틈을 타서 신라가 가야를 치려고 모의하였다. 이때 박원도(朴元道)의 충고로 용녀를 귀양보내고 정치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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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취희왕(吹希王) 재위 421∼451

 

질가(叱嘉)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좌지왕(坐知王)이며, 어머니는 대아간(大阿干) 도녕(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다. 비는 각간(角干)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이다.

질지왕(知王)의 아버지이며, 451년 2월 3일에 죽었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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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질지왕(질知王) 재위 451∼492

 

김질왕(金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7대 취희왕(吹希王)이며, 어머니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 인덕(仁德)이다.

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이다.

 

즉위한 이듬해에 시조인 수로왕과 왕후 허황옥(許黃玉)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 왕후사(王后寺)라는 절을 짓고 전(田) 10결을 주어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고 한다. 

 

《남제서 南齊書》 동남이전(東南夷傳)에 “가라국(加羅國)은 삼한종(三韓種)이다.

건원(建元) 원년(479)에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냈다. ……

이에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하였다.”고 하였는 바, 하지왕이 혹 질지왕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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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겸지왕(鉗知王) 재위 492∼521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김(金)은 성이고, 겸지(鉗知)가 이름이나, 지(知)는 가야와 신라인의 이름에 붙는 어미로서 실제의 이름은 ‘겸’이다. 아버지는 질지왕(知王)으로 김질왕(金王)으로도 불리었으며, 어머니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다.

 

왕비는 각간 출충(出忠)의 딸로 숙(淑)이며, 아들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다.

492년에 즉위하여 30년간 재위하였다.

 

일본인 학자들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 駕洛國記〉의 사료적 신빙성을 부정하고, 제7대 취희왕(吹希王), 제8대 질지왕, 제9대 겸지왕을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하는 가실왕(嘉實王, 또는 嘉悉王)과 모두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대가야 등과 같은 금관가야 이외의 가야국을 인정하지 않은 견해로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49
◇洪淳昶, 金官國의 世系에 대하여, 三國遺事硏究 上, 嶺南大學校 民族文化 硏究所, 1983
◇今西龍, 加羅疆域考, 朝鮮古史の硏究, 國書刊行會,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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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구형왕(仇衡王) 재위 521∼532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으나, 또한 〈개황력 開皇曆〉을 인용하며 법흥왕 19년에 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무도(茂刀)·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써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 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三國遺事, 日本書紀

 

 

 

 

↑가야제10대 구형왕릉(仇衡王陵)/소재지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

 

 

사적 제214호 경남 산청(山淸)의 가야 제10대왕 구형왕(仇衡王)의 돌무덤으로으로 전해오고 있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王陵)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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