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발해 인물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야촌(1) 2013. 9. 17. 22:19

제2대 무왕(武王)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다. 발해국의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713년(고왕 15) 당나라가 고왕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할 때, 대무예도 같이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719년(무왕 1) 3월 고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발해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722년 송화강(松花江)하류에서 흑룡강(黑龍江)유역에 걸쳐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당나라는 그곳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는 흑수말갈이 외교관계를 취할 때는 발해의 사전양해를 얻었던 전통을 파기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통모하여 복배(腹背)에서 발해국을 공격하려는 심산으로 단정하고, 아우인 대문예(大門藝) 등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일찍이 볼모로 당나라의 수도에 머무른 바 있었던 대문예는 발해국의 국력으로서 당나라와 겨루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을 고구려의 예를 들어 간(諫)하였으나, 무왕이 듣지 않자 국경선에 이르러 다시 간하였다.

 

그러자 무왕은 크게 노하여 종형(從兄) 대일하(大壹夏)로 하여금 교체하게 하고 대문예를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니 당나라는 그에게 좌요위장군(佐驍衛將軍)직을 주었다.

 

무왕은 당나라에 대문예를 죽이도록 외교적 교섭을 폈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무왕은 723년에 장군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해적을 이끌고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이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무왕은 예상되는 당나라와의 충돌에 대비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72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때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밝히고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에 가서 군사를 모아 발해를 치게 하고, 한편으로는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신라는 732년 발해의 남쪽 국경지역을 공격하였으나, 추위와 눈으로 반 이상의 병사를 잃고 돌아왔다.

 

당나라의 앞잡이로 전락한 대문예를 제거하기 위하여 무왕은 자객을 보내어 그를 살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무왕은 당나라와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수말갈족의 토벌을 결행하지도 못하고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 舊唐書]

◇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 華文書局, 1934)

◇續日本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