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702

태조 이성계 어진(太祖李成桂御眞)/朝鮮國

[생졸년] 1335 ~ 1408 [재위] 1392 ~ 1398 [본관] 전주(全州) [자] 중결(仲潔) [호] 송헌(松軒) 조선의 건국자로 이름은 성계, 호는 송헌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晋)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출생. 자춘(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1. 집안 내력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도끼만행으로 사망한 미 육군의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 도끼만행으로 사망한 미 육군의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의 대한민국에 대한 희생과 용기 에 감사드리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희생된 미군 보니파스 소령(33살)과 바레트 대위(25세)에게 한국정부는 보니파스 소령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을 바레트 대위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졌던 미루나무자리는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비석이 세워져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지도 이 사건은 일명 북한군 도끼만행 사건이라고 불려진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에 일어난 사건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남쪽 국제연합군(UN군)측 제3초소와 그 ..

독립유공자 명단

■ 독립유공자 명단 그동안 정부로 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약 만명 가까이 됩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공적이 특히 다대하다고 인정되는 1급 29명, 2급 89명, 3급 779명계 897명의 명단만 싣습니다. 단, 독립유공자 한 분 한 분의 애국심이나 희생의 크기는 누가 함부로 잣대로 따지고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이 명단은 말 그대로 단순한 참고용일 뿐 절대적인 평가일 수는 없습니다. ●1급 : 대한민국장(29명) 강우규(姜宇奎). 김구(金九/(舊)安東金氏). 김규식(金奎植). 김좌진(金佐鎭). 김창숙(金昌淑). 민영환(閔泳煥). 서재필(徐載弼). 손문(孫文,중국인). 손병희(孫秉熙). 송미령(宋美齡,중국인). 안중근(安重根). 안창호(安昌浩). 오동진(吳東振). 윤봉길(尹奉吉). 이강년(..

신건식(申健植). 오건해(吳健海) - 부부 독립운동가

■ 신건식(申健植) - 고령신씨 25世 ▲ 신건식·오건해 선생 가족사진(왼쪽부터 오건해, 신순호, 신건식) 1889년(고종 26)∼1963년. 독립운동가. 일명 환(桓)· 두흥(斗興). 호는 삼강(三岡). 본관은 고령(高靈). 예관 신규식(申圭植)의 아우로.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다. 1912년 4월에 중국 저장성(浙江省) 성립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국내에 밀파되어 정보수집과 군자금 등을 모집하면서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취한 뒤 상해로 귀임하다가 신의주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잡혔다.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중에 신병치료를 이유로 낸 병보석이 허가되어 석방과 동시에 상해로의 귀임을 모색하던 중 다시 잡혀 청주에서 복역하였..

신익희(申翼熙)

■ 신익희(申翼熙) ● 요약 1894년(고종 31)∼1956년, 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海公)이다. 이명으로 임방호(壬邦乎)를 사용했다.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조선시대 때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 외무차장 등을 역임했고, 귀국 후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학을 익혔고,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官立漢城外國語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유학시절 『학지광』(學之光)이라는 잡지 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1913년 와세다 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동학교(中東學校)에..

고려시대의 여인들

■ 사랑과 욕망 ●법과 상식을 뛰어넘어 사랑과 욕망에 빠진 여인들 ◇고려시대 대표적인 자유부인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 ◇혼인을 두 번씩 한 순비 허씨 ◇세상의 법을 어겨가며 싱글맘마의 꿈을 이룬 박씨부인 ◇자신이 원하는 사랑은 모두 얻은 장씨 부인 ◇법도와 금기를 넘어서서 상상을 초월한 왕태후의 사랑 ●로맨스와 스캔들을 넘나든 여인들 ◇멋진 선비를 보고 거침없이 추파를 던진 어느 과부 ◇술과 노래에 취해 스캔들을 일으킨 덕령궁주 ◇아버지의 정적(政敵)과 자유연애를 펼친 정중부의 딸 ●불륜과 추문의 향연을 벌인 여인들 ◇재상들과 겹겹으로 사통(私通)한 여인들 ◇자신이 모시는 남자의 동생과 사통한 김군정(金君鼎)의 애첩(愛妾) ◇자신이 모시는 남자의 사위와 사통한 이배중(李培中)의 첩(妾) ◇간통으..

박근혜 대통령, 칭화대 연설문

[뱍근혜대통령 칭하대연설문] 2013-06-29 11:34 '새로운 20년을 여는 한중 신뢰의 여정'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천지닝(陳吉寧) 총장님과 교직원 여러분!, 그리고 칭화대 학생 여러분!, 오늘 중국의 명문 칭화대학의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칭화대 학생 여러분을 보니, 곡식을 심으면 일년 후에 수확을 하고, 나무를 심으면 십년 후에 결실을 맺지만, 사람을 기르면 백년 후가 든든하다는 중국 고전 관자(管子)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이곳 칭화대의 교훈이 '자강불식 후덕재물(自强不息 厚德載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교훈처럼 쉬지 않고 정진에 힘쓰고, 덕성을 함양한 결과 시진핑 주석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치지도자들을 배출했고, 중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했습니다. 앞으로도 여..

이육사(李陸史)

↑이육사(1943년 모습) ↑이육사는 중국에서 화장한 후 서울 미아리에 초장하였다가 1960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부인 순흥안씨(안일향)와 쌍분이다. 이육사의 묘역은 전순(氈脣)이 짧아서 한 화면으로 잡히 기 힘들다. ↑경북 안동의 이육사 생가 ↑이육사의 친필서한(1942년) ↑이육사의 묵난도 이 작품은 육사가 절친했던 신석초(申石艸.1909-1975)에게 준 것으로 1974년 육사의 미발표 유고인 ‘바다의 마음’과 함께 잡지 ‘나라사랑’ 16집에 사진이 실리면서 공개됐다. [이육사 가계] ◇안동 입향조(安東入鄕祖) : 이황의 5대손 이구(李榘, 1681~1761) ◇곤조부(昆祖父) : 이수원(李守元, ?~?) ◇래조부((來祖父) : 이세익(李世翊, ?~?) ◇현조부(玄祖父) : 이구운(李龜雲, 17..

이위종(李瑋鍾)

이위종(李瑋鍾) 1887(고종 24)∼?.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범진(李範晉)이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순회하였으며,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일찍이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인 아버지 범진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각국 주재 한국공사관이 폐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고 이범진과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비공식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하는 3명의 특사 중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정사 이상설(李相卨)과..

고종(高宗 )

■ 고종(高宗) [생졸년] 1852(철종 3)∼1919. [조선 제26대 왕]. 재위 1863∼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생애] 1. 즉위과정 1852년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조·헌종·철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