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702

홍익한(洪翼漢)

홍익한(洪翼漢) [생졸년] : 1586(선조 1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3학사(學士)의 한 사람이다. 찬성 숙(淑)의 현손이며, 관찰사 서주(叙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애(磑)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백부인 교위(校尉)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다.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1년(광해군 13) 알성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罷榜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함.)되었다.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사서(司書)를 거쳐, 1635년 장령이 되..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 조선의 왕족

■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생졸년] : 1688년(숙종 14)∼1729년(영조 5) 본관은 전주(全州), 소현세자(昭顯世子>인조의 長男)의 셋째아들인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의 손자이며, 임창군(臨昌君) 이곤(李焜)의 아들이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자 인조는 왕권에 위협을 느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맏아들 경선군(慶善君)과 둘째아들 경완군(慶完君)은 그곳에서 죽고, 경안군만이 혼자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밀풍군 이탄은 소현세자의 혈손이기도 하다. 경종 3년(1723)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영조 2년(1726)다시 사은사 겸 동지사가 되어 다녀왔다. 영조 4년(1728) 소론인 이인좌(李麟佐) 등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자 반란을 일으켰을 때 훈..

이건창(李建昌)

■ 이건창(李建昌) [정의] 1852(철종 3)~1898(광무 2). 조선 말기의 문신· 학자· 대문장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시원(是遠)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상학(象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할아버지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다.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장성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 생활에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정제두(鄭齊斗)

●정제두(鄭齊斗) [정의] 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유성(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상징(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기조(基祚)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현종 13)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영의정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부시주부..

이인임(李仁任)

■ 이인임(李仁任) 이인임(미상~ 1388)은 고려 말기의 중신(重臣)이자 권신으로, 정치가(政治家)이다. 조부는 성산군 대제학 이조년(李兆年)이고, 아버지는 성산 후 이포(李褒)이다. 그는 관향이 성주(星州)로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에서 태어났고, 호(號)는 승암(勝巖),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인데 훗날 황무(荒繆)로 바꾸었으나. 이성계 집권 후 추탈 당하였다.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숙부이기도 하다. 아버지 이포는 인복(仁復). 인임(仁任). 인미(仁美). 인립(仁立). 인달(仁達). 인민(仁敏)의 6형제를 두었는데, 이인임은 둘째 아들이고 고려 멸망 후 은거한 이숭인(李崇仁)의 5촌 당숙이기도 하다. 그는 음보(蔭補)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되고,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공민왕때 좌부승선(佐副承..

최성대(崔成大 ) - 전의인(全義人)

■ 최성대(崔成大) [생졸년] :1691(숙종 17)∼1761년(영조 37) 조선 후기의 文臣. 詩人. 본관은 전의(全義-선계는 全州崔氏). 자는 사집(士集). 호는 두기(杜機). 영세(永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항제(恒齊)이고, 아버지는 정랑 수경(守慶)이며, 어머니는 이동근(李東根)의 딸이다. 수원부 남곡면(南谷面,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출신이다. 음사로 별제(別提)가 되었으며, 1732년(영조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지평·장령을 지낸 뒤에 춘방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김창흡(金昌翕) 이후의 제일인자라 칭해졌다. 신유한(申維翰)과 친교를 맺고 화답한 것이 많았다. 그의 시 11수를 모아 엮은 『두기시집(杜機詩集)』 『두기시집속집(續集)』 등이 있다...

죽유 오운(竹牖 吳澐)에 대한 소고(小考)

竹牖 吳澐(죽유 오운) - 허사렴(호은공파)의 맏사위 죽유 오운은 허사렴(딸만 둘)의 맏사위이다. 창계 문경동(아들이 없음)이 맏사위 허찬에게 거대한 재산을 물러 주었듯이 맏사위로서 거대한 재산을 물려받았고, 고창오씨 집안을 일으킨 분이라 한다. 그리고 허권수(許捲洙) 경상대한문학 교수는 김해허씨로서 유계와 학계 모두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 竹牖 吳澐에대한 小考 차례 1.서론 2.생애 가.가계 나.행적 3.재지사족과의 관계..

강맹경(姜孟卿)

●강맹경(姜孟卿) (어머니께 종아리 맞은 宰相) 1410(태종 10)∼1461(세조 7). 조선 전기의 문신.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장(子章). 문하찬성사 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회백(淮伯)이고, 아버지는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 우덕(友德)이며, 어머니는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蕙)의 딸 재령이씨(載寧李氏)이다. 정창손(鄭昌孫)의 뒤를 이어 좌의정(左議政) 강맹경(姜孟卿)이 영의정(領議政)에 오르니,세조(世祖) 4년(1459) 11月 1日 강맹경(姜孟卿)의 나이 아직 50세(歲)가 채 안된 비교적(比較的)이른 나이였다. 강맹경(姜孟卿)은 고려(高麗)때, 재주가 넘쳐 한강이남제일학동(漢江以南第一學童)으로 칭송(稱頌) 받던 한림원(翰林院)의 직한림(直翰林) 강창서..

명재 윤증의 누이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누이는 서계(西溪) 박서당(朴世堂, 1629~1703)의 형수이고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양 어머니였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1636년 12월에 호란(胡亂)이 발생하여 부친인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선생을 따라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1637년 1월에 강도가 함락되었는데, 22일에 오랑캐 병력이 강을 건너자 성안이 와해되었다. 이때 노선생(老先生)은 사우(士友)들과 모여서 대처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이씨 부인이 일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여종을 보내어 노선생을 모셔 오게 하였다. 노선생이 집에 이르자, “적의 손에 죽느니 일찌감치 자결하는 것이 낫겠기에 한번 뵙고 영결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하므로,..

현덕왕후 안동권씨(顯德王后 安東權氏)

현덕왕후 안동권씨(顯德王后 安東權氏) 1418(태종 18)~ 1441(세종 23).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비(妃), 단종의 생모. 본관은 안동(安東).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이다. 1431년(세종 13) 세자궁 궁녀로 입궐하여 승휘(承徽)·양원(良媛)에 진봉되었다. 1437년 순빈봉씨(純嬪奉氏)가 부덕하여 폐빈 된 후 세자빈이 되었다. 1441년 원손(元孫:뒤의 단종)을 낳았으나 3일 뒤에 죽었다. 그해 현덕의 시호를 받고, 경기도 안산군 치지고읍산(治之古邑山)에 묻혔다. 1450년(문종 즉위) 왕후에 추봉(追封)되었으며, 능호는 소릉(昭陵)으로 명명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문종과 함께 양주(楊州)에 합장되어 현릉(顯陵)으로 개호되었고, 1454년 인효순혜(仁孝順惠)의 존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