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강맹경(姜孟卿)

야촌(1) 2014. 5. 22. 20:45

●강맹경(姜孟卿)

   (어머니께 종아리 맞은 宰相)

 

1410(태종 10)∼1461(세조 7). 조선 전기의 문신.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장(子章). 문하찬성사 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회백(淮伯)이고, 아버지는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 우덕(友德)이며, 어머니는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蕙)의 딸 재령이씨(載寧李氏)이다.

 

정창손(鄭昌孫)의 뒤를 이어 좌의정(左議政) 강맹경(姜孟卿)이 영의정(領議政)에 오르니,세조(世祖) 4년(1459) 11月 1日 강맹경(姜孟卿)의 나이 아직 50세(歲)가 채 안된 비교적(比較的)이른 나이였다.

 

강맹경(姜孟卿)은 고려(高麗)때, 재주가 넘쳐 한강이남제일학동(漢江以南第一學童)으로 칭송(稱頌) 받던 한림원(翰林院)의 직한림(直翰林) 강창서(姜彰瑞)의 후손(後孫)으로, 증조부(曾祖父) 강기(姜蓍)는 공양왕(恭讓王)과 사돈(査頓)으로 문하찬성사(文下贊成事)였고, 조부 강회백(姜淮伯)은 조선(朝鮮) 태조(太祖)때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였는데, 함경도(咸鏡道)를 총괄(摠括)한 지방장관(地方長官)인 셈이었다.

 

강맹경(姜孟卿)은 이처럼 융성(隆盛)했던 명문가(名門家)에서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지창령현사(知昌寧縣事-오늘날 창녕군수) 강우덕(姜友德)의 두 아들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나,세종(世宗) 11年(1429) 문과(文科)에 올라 스무 살 약관(弱冠)의 나이로 관직(官職)에 들어섰다,

 

그 후 벼슬길은 순조 로와 사인(舍人-正四品)·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從三品) 등 요직(要職)을 거치며 세종(世宗)의 신임(信任)을 받았고,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자 42세(歲)의 나이로 도승지(都承旨-正三品 堂上官)에 올랐다.

 

빈례(賓禮)와 제례(祭禮)등 큰 예식(禮式)이 있을 때 마다 임금은 반드시 강맹경(姜孟卿)을 찾았다. 영상(領相) 황희(黃喜)의 막하(幕下)에 있을 때 황희(黃喜)가 칭찬(稱讚)하기를“내 늙은 몸으로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강랑(姜郞) 같이 훌륭한 사람은 보질 못했다. 10年이 지나지 않아 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果然) 그의 말대로 된 셈이었다.

 

세조(世祖)의 신임(信任)이 두터운 데다, 청백(淸白) 하기까지 하여, 그야말로 그의 운명(運命)은 금상첨화(錦裳添花) 격으로 다듬어졌다. 강맹경(姜孟卿)이 영의정(領議政)에 갓 올랐슬 때, 세조(世祖)가 양녕대군(讓寧大君)과 걸음을 같이하여 강맹경(姜孟卿)의 집을 찾았다.

 

기둥이 낡아 쓰러져가는 초옥(草屋)의 뜰에는 질그릇 두어 개가 놓여 있을 뿐, 집안은 곤궁(困窮)함이 가득 하였다.

이에 양녕대군(讓寧大君)은 “기둥이 썩어가고 있구려! 사람이 다칠 것 같소. 일국(一國)의 수상(首相)집이 이와 같으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오!” 하고 경탄(慶歎)하였다.

 

강맹경(姜孟卿)의 어머니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귀감(龜鑑) 이었으며, 모도(母道)가 준엄(峻嚴)한 여걸(女傑)로 고향(故鄕)인 진주(晉州)에서 살기를 고집(固執)했다. 어느날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강맹경(姜孟卿)이 고향(故鄕)의 어머니를 찾아보고 잔치를 베풀려 진주(晉州)로 내려오다가, 도중(途中)에 지방관청(地方官廳)에 들려 쉬면서 오느라, 미리 어머니께 전해드린 고향 도착 예고(豫告) 날짜보다 하루가 늦게 집에 닿았다.

 

이에 마음이 상(傷)한 노모(老母)는, 재상(宰相)인 아들의 관대(冠帶)를 벗기고 긴 회초리로 재상(宰相)의 종아리를 사정(事情)없이 치면서, 강맹경(姜孟卿)의 경솔(輕率)했던 행동(行動)을 꾸짖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라고 찬탄(讚歎)하였다.

 

4月 17日, 강맹경(姜孟卿)은 51歲의 비교적(比較的) 젊은 나이로 눈을 감으니,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다.

오늘날의 경기도(京畿道) 양평군(楊平郡) 옥천면(玉泉面) 신복리(新福里)에 그의 유택(幽宅)이 안장(安葬) 되었고, 이듬해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문(碑文)은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가 짓고, 종제(從弟-4촌동생)인 호조참의(戶曺參議) 강희안(姜希顔)이 전자(篆字)와 함께 글씨를 썼다.

 

강맹경(姜孟卿)의 묘역(墓域)은 경기도기념물(京畿道記念物) 제154호로 지정관리(指定管理)되고 있다.  아우 강숙경(姜叔卿)은 강원도사(江原道事-오늘날의 부지사급)를 거쳐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從三品)에 올랐는데, 세조(世祖)가 특별(特別)히 고향(故鄕) 진주인근(晉州隣近)의 함안군수(咸安郡守職)로 제수하여 가까이서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그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그의 치적(治積)이 조정(朝廷)에 보고되기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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