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702

류성룡 - 징비록에서

임진왜란에 관해서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를 남기고, 류성룡은 징비록을 남겼습니다. 징비록은 시경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훈민정음과 함께 징비록과 난중일기만이 책중에 우리나라의 국보입니다. 오늘은 징비록 중에서 류성룡이 눈물을 흘린 대목만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그는 애국충정과 책임감 지혜와 통찰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가슴의 순수를 지닌 리더였습니다. 실로 그가 조정에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터였고,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류성룡은 조정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가며 임금을 모시고 목메어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전쟁 중 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남은 군량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

재벌, 그들은 누구인가?

3대孫 내다보는 재벌가 ‘墓’한 비밀 증조부모 묏자리가 증손 운명 결정 묏자리로 보는 ‘동네부자-거부-재벌’ 재벌家의 과거·현재·미래까지 점쳐 통계적이고 경험적인 연구에 따르면 묏자리는 묏자리 주인의 3대손(증손)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이의 미래를 점치고 싶다면 증조부모의 묏자리를 보면 된다는 말이다. 롯데가(家)의 경우, 그룹의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의 증조부와 증조모의 묘소가 명당이다. 특히 증조모의 묘소는 거대한 ‘재벌 산’을 거느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거대 기업을 일군 신 회장의 운명을 예고한 묏자리의 형세다. 그렇다면 신 회장의 2세들이 좌우할 롯데그룹의 미래는 신 회장 조부모의 묏자리에 암시돼 있을 것이다. 찾아가 확인해본 즉 조부모 묘소의 지형과 혈(시신을 안치하는 구덩이)의..

김종직 연보

인적사항 성명 김종직(金宗直) 생년 1431년(세종 13) 몰년 1492년(성종 23) 자 季昷, 孝盥 호 佔畢齋 본관 善山 시호 文忠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종 13 1431 신해 宣德 6 1 6월, 密陽府 大洞里에서 태어나다. 세종 24 1442 임술 正統 7 12 詩文을 잘 짓기로 이름나다. 세종 25 1443 계해 正統 8 13 高靈郡守로 나간 부친을 따라가 仲兄과 함께 「周易」을 배우다. 세종 28 1446 병인 正統 11 16 과거에는 낙방하였으나, 그때 지은 〈白龍賦〉가 임금의 마음에 들어 靈山訓導가 되다. 문종 1 1451 신미 景泰 2 21 昌山 曺氏와 결혼하다. 문종 2 1452 임신 景泰 3 22 伯兄 金宗碩ㆍ止止堂 金善源과 함께 開寧 甘文山에서 講學하다. 단종 1 1..

강국창(姜國昌)회장 특별 인터뷰

동국전자(주) 강국창(ROTC3기) 회장 한국 가전의 전설, 강국창 회장 특별 인터뷰 ​ 80년대 초 동국전자(주)를 설립한 이래 전자회사를 모체로 수산업과 레저, 관광산업에까지 진출하며 사업의 다각화에 성공한 강국창 회장.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르곤 한다. 힘들고 고되다는 이유로 남들이 흔히 가지 않는 길을 택해왔던 그에게 ‘최초’라는 수식어는 그간의 노력과 열정을 녹여내는 훈장이기도 하다. 1980년대 가전제품의 성능부품을 국산화해가는 과정에서도 그러했듯 강국창 회장은 ‘기본에 충실하자’는 경영방침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움에 도전해나가고 있다. 한국 가전산업의 역사를 새로 써온 강국창 회장, ‘기술보국’이라는 꿈으로 한 우물을 파온 강국창 회장의 특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

체원(體元)

■ 체원(體元) ◈속명 : 미상 ◈생졸년 : 미상 ◈본관 : 경주(慶州) ◈별칭 : 법호 목암(木庵)·향여(向如), ◈시호 : 각해(覺海) ◈활동분야 : 불교 승려 ◈주요저서 :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 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 ------------------------------------------------------------------------------------------------------------------------------------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법호는 목암(木庵), 향여(向如)이고, 시호는 각해(覺海)이다.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낸 이진(李瑱)의 아..

최두기(崔杜機)

靑莊館全書>제33권> 淸脾錄 二/ 이덕무(李德懋) 著 ●최두기(崔杜機) 두기 최성대(崔成大)의 자는 사집(士集)이요, 벼슬은 승지(承旨)에 이르렀는데, 詩를 짓는 데 있어 구성(構成)이 매우 선명(鮮明)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습관을 잘 벗어났다. 그는 특히 고시(古詩)와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뛰어났는데, 청천(靑泉) 신유한 주백(申維翰周伯)은 두기의 산유화시(山有花詩)를 보고, 너무 기뻐 일어나 춤을 추고 이어 두기를 찾아가 만나보고는 제금(題襟)의 친구를 맺고, 서로가 막역(莫逆)의 사이로 여겨지기(知己)로 결탁하였다. 청천이 말하기를, “사집(士集)의 시야말로, 망천[輞川-왕유(王維)를 가리킴]의 한적(閒寂)한 것과 양양[襄陽-맹호연(孟浩然)을 가리킴]의 담박한 것과 저위[儲韋-저광희(儲光羲..

靑泉 申維翰 年譜

靑泉申維翰年譜 皇明崇禎紀元五十四年 我肅宗大王七年 辛酉四月十五日。先生生于密城竹院里第。先生生有異質。先是母夫人夢。甞有靑鶴遊竹林。竹林間有泉源出石坎。淵澄活動。歲旱無减。而在臨月。七日斷流。嶽降之夕。復溢如故。又有異香繞室。經夜不歇。擧家異之。而後先生之稱號也盖以此。 我肅宗大王八年 壬戌。先生二歲。 初度日。設翫好等物與筆墨書冊于前。先生先把孝經。向母夫人請學。知孝經二字。母夫人金氏性行淑烈。壼範齊整。經禮之博通。罕見於藝苑。先生之敎誨成德。有自來也。 我肅宗大王九年 癸亥。先生三歲。 從母夫人受孝經。 我肅宗大王十年 甲子。先生四歲。 誦琵琶行與五十九首。 我肅宗大王十一年 乙丑。先生五歲。 讀孝經立敎諸篇曰。此人子之常職。其孝友盖天性也。 我肅宗大王十二年 丙寅。先生六歲。 善楷字。讀離騷經不輟口。至袴衣幵壞。爲忠憤所激。或泣下或起舞。不勝感慨。 我肅宗大王十三年 丁卯。先..

일연(一然)스님 - 삼국유사 저자

■ 일연(一然) 스님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승려.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 아버지는 언정(彦鼎)이다. 왕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214년(고종 1) 해양(海陽: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

신유한의 저작 및 행력

●가계도 申省吾 竹溪 ┃ ┣━申泰始 ┃ ┃ ┃ ┗━━繼子 申維翰 ┃ ║ ┃ 高陽金氏 ┃ 金鼎重의 女 ┃ ┃ ┃ ┣━━━申夢騏 ┃ ┃ ║ ┃ ┃ 金鳳章의 女 ┃ ┃ ┃ ┣━━━申夢駿 出系 ┃ ┃ ║ ┃ ┃ 金天柱의 女 ┃ ┃ ┃ ┗━━━女○○ ┃ ║ ┃ 金世鍵 ┃ ┃ ┗━申泰來 ║ 金海金氏 金碩玄의 女 ┃ ┣━━申維翰 出系 ┃ ┣━━申維楨 ┃ ┗━━女○○ ║ 張孝曾 기사전거 : 墓誌銘(李瀰 撰), 行狀(崔重純 撰)에 의함. ●저자 성명 신유한(申維翰) 생년 1681년(숙종 7) 몰년 1752년(영조 28) 자 周伯 호 靑泉, 伽倻樵叟 본관 寧海 특기사항 崔成大, 李秉淵 등과 교유 ●형태서지 권수제 靑泉集(原集) 판심제 靑泉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70年刊 권책 6권 3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8..

호당록(湖堂錄)

호당록(湖堂錄) 조선조때 세종-숙종 간에 인재양성제도의 하나로 호당(湖堂)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글재주와 덕이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초급관리 중에서 대제학이 엄히 선발하여 장기 휴가를 주어서 공부 즉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래서 이를 독서당(讀書堂) 또는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내려서 독서하게 한다)라고도 불렀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초급관리 연수 또는 보수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 20년(1428)에 임금이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을 시켜서 권채 등 3인을 뽑아서 장의사(藏義寺: 지금의 서울 구기동 구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함)에서 공부하게 한 것을 시작으로 총 38회 269인이었다. 최초는 장의사, 세종24년의 2차는 진관사(현재 북한산 비봉 북쪽 진관내동에 있음) 등 한적한 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