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명재 윤증의 누이

야촌(1) 2014. 5. 17. 01:56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누이는 서계(西溪) 박서당(朴世堂, 1629~1703)의 형수이고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양 어머니였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1636년 12월에 호란(胡亂)이 발생하여 부친인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선생을 따라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1637년 1월에 강도가 함락되었는데, 22일에 오랑캐 병력이 강을 건너자 성안이 와해되었다.

 

이때 노선생(老先生)은 사우(士友)들과 모여서 대처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이씨 부인이 일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여종을 보내어 노선생을 모셔 오게 하였다. 노선생이 집에 이르자, “적의 손에 죽느니 일찌감치 자결하는 것이 낫겠기에 한번 뵙고 영결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하므로, 노선생이 차마 볼 수 없어서 사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부인이 어린아이들을 종들에게 맡겨 잘 보호하게 하고 뒷일을 조처한 다음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바로 23일 아침이었다. 이때 윤증 선생의 나이가 9세이고 누이(姊氏)는 겨우 10세였는데, 여종 동절(冬節) 등을 이끌고 시신을 거두어 의복을 반듯하게 겹쳐 입힌 뒤 판상(板商)의 집에서 관(棺)을 얻어 입관(入棺)하였다.

 

이어 거처하는 집의 대청 아래에 가매장하고, 흙을 모아 수북하게 덮은 뒤 돌덩이 8개를 사방 모퉁이에 묻고 가운데에는 숯가루를 뿌려서 표시하였다. 그런 다음 곡하며 작별을 고하고 떠났으니, 차분하게 정(情)을 다한 것이 어른과도 같았다

 

어지러운 군중(軍中)에 들어가게 되자,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풀어서 족보를 기록한 소첩(小帖)을 꺼내 자씨에게 주며 말하기를, “누이는 여자이니, 불행하게 서로 헤어지게 되면 이것으로 징표를 삼으시오.” 하였다.

 

오랑캐 진영으로 나가게 되면서 마침내 서로 헤어졌는데, 누이가 과연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첩을 펼쳐 보이며 하소연하니, 의주(義州)에 이르렀을 때 참판 이시매(李時楳)가 알아보고 속환(贖還)하였다.


어린 나이에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다가 풀려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뒤 남편, 자식, 아비를 앞세운 한 평생이 얼마나 허망했을까? 그래도 1688년(숙종14)에 박태보가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가게 되고, 그해에 환갑연을 파주 관아에서 치렀을 때가 행복했을까?


명재유고에 윤증이 쓴 그 누이의 묘지명이 있어 애틋한 글을 옮겨 본다.

오호라, 반남 박군(潘南朴君) 세후 숙후(世垕叔厚)의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바로 나의 누님이다.

 

나면서부터 현숙한 덕을 지녔으나 타고난 운명이 기구하여 10세에 모친을 여의고 23세에 과부가 되었으며, 늙어서는 또 양자 마저 비명에 죽어 슬픔과 고통 속에 일생을 마쳤으니, 너무도 애통한 일이다.


누님은 숭정 원년 무진년(1628, 인조6) 정월 10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나이 겨우 7, 8세에 내외 조상의 이름을 다 외었으며, 조금 자라서는 형제들이 글을 배우는 것을 보고 어깨너머로 익혔다.

 

이때부터 여러 책을 섭렵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이 15세에 선친이 배필을 가려서 박군에게 시집보냈다.

박군은 그때 벌써 뛰어난 재능과 높은 뜻에다 기량이 걸출하였고, 누님은 신중하고 유순하며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온 집안이 기뻐하여 부부가 똑같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누님은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집안에서 언제나 슬픔을 안고 지냈는데, 시집가서도 또 시아버지(朴炡, 1596~1632)를 섬기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이 점을 말하면서 슬퍼하였다. 시어머니 윤 부인(尹夫人)을 조심스레 예법에 맞게 섬겼으며 시어머니가 사랑해 준다고 해서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기축년(1649)에 박군이 윤 부인의 상을 당하고 그 슬픔으로 병이 들어 마침내 상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친이 몸소 가서 살려 보려 했으나 살리지 못하였다. 정조가 굳은 누님마저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박군을 김포(金浦)의 선영에 안장하고는 누님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집 한 채를 지어 신주(神主)를 받들고 지내게 하였다.


누님은 자신이 운명이 박해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는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선친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반드시 흘리던 눈물을 억지로 멈추고 박군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수습하여 감추었다.

 

박군이 병이 악화되었을 때 읊던 “인생은 잠시 붙어 있는 것이라 때로는 늙음을 근심하네.[人生若寄 憔悴有時]”라는 도연명의 시구를 매번 읊으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남편을 애도하였다.


상복을 벗은 후에도 나물만을 먹고 지내며 선친을 효성으로 받들어 음식과 의복 등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의 아내가 일찍 죽자 어미 없는 두 아이를 맡아 장성할 때까지 길렀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여자가 시집가면 부모 형제와 멀어지는 법인데, 나만은 운명이 박하여 부모님 곁에 오래 있게 되었으니, 한편으론 불행 중 다행이다. ”누님은 처음에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박군의 아우(박세당)의 아들인 태보(泰輔)를 양자로 삼게 되자, “부모님이 점점 연로하여 차마 멀리 떠나기 어렵지만,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사람으로서 도리상 아들을 따라야 할 것이다.”하고는 마침내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선친의 상을 당하자 또다시 내려와서 아우들과 함께 삼년상을 치르고 돌아갔다.

태보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럽고 재능이 뛰어나서 누님이 아끼고 기특해하며 자신이 낳은 자식이나 다름없이 언제나 인자하게 대하였다. 태보가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누님은 자신의 운명이 박하여 그 영화가 오래가지 못할까 항상 걱정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 봄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근래 벌어지는 일들이 마치 바람에 날아다니는 불똥과 같아서 누구 집에 떨어질지 모르겠다.”하면서, 화를 멀리해 보려는 마음을 가졌으나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참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태보를 저승으로 보낸 뒤 자신의 신세를 애통해하며, “이것도 나의 운명이다.

 

삼종지도(三從之道)가 모두 끊어져 버렸으니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신미년(1691, 숙종17) 3월 25일에 양주(楊州)의 누원(樓院) 시골집에서 별세하였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5월 21일에 수락산(水落山)의 서쪽 기슭 갑좌(甲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듬해 9월 19일에 김포(金浦)에 있는 박군의 묘를 옮겨다가 합장하고 태보의 묘는 그 뒤에 두었다.
아, 누님은 효성과 우애가 깊고 총명하고 단정하여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모두 여칙(女則)에 맞았다.

 

말을 신중히 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며 집안일에 부지런하고 자신에게 검소하여 옛날 어진 부녀자들이 지닌 덕을 거의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맞는 보답을 받지 못하고 온갖 재앙을 다 겪고는 결국 불행하게 세상을 마쳤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 무슨 이치란 말인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박태보묘 : 박세당의 둘째아들로서 박세당의 형인 박세후의 양자로 입적 박세당 묘 서쪽 능선

 

 朝鮮通訓大夫弘文館副應敎贈吏曹判書文烈公朴泰輔之墓

(조선통훈대부홍문관부응교증이조판서문열공박태보지묘)

貞夫人全州李氏祔右(정무인전주이씨부우)

 

*박태보[朴泰輔, 1654~1689] 본관 반남(潘南). 자 사원(士元), 호 정재(定齋). 시호 문열(文烈). 박세당(朴世堂)의 둘째아들. 박세당의 형인 박세후의 양자로 입적. 조선 후기의 문신. 예조좌랑, 교리, 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 영의정추증. 기사환국 때 서인을 대변,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진도(珍島)에 유배가던 중 노량진(鷺梁津)에서 36세에 죽었다. 숙종20년 모든 죄를 사면받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주요저서 정재집, 주서국편 世垕

 

 

박세후묘/묘비 處士朴公世垕之墓처사박공세후지묘 孺人坡平尹氏祔左유인파평윤씨부좌 박세후묘

백세당의 형 박태보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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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의 혹한이라는 예보때문에 장암 박세당고택은 다음에 가야하나 생각하고 집을 나섰는데 따스한 햇살이 추위를 못느끼게 해 그냥 장암으로 향했다. 지하철 7호선 종점역이다. 장암역에 내리니 황량했다.

 

도로를 건너 쌀쌀한 길을 걷는데 만두집 앞의 만두찜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걸음을 멈추고 나중에 먹을 요량으로 만두 일인분을 샀다. 서계박세당 사랑채, 노경서원, 서계박세당 묘역, 석림사 안내판 4개가 가리키는 길로 올라섰는데 찾으려는 박태보 묘역이 박세당종가 안에 있었다.

 

무작정 들어가 박태보선생의 묘가 있어 보이는 서계사랑채 뒷길로 걸어갔는데 개들이 짖어대고 사람이 나와서는 이곳은 개인 사유지라며 미리 연락을 하고 와야 된다고 했다. 박태보선생의 묘를 찾아왔다고 하니 승락을 하며 종가 뒤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고, 주인의 도움으로 짖어대는 개들 옆을 겨우 지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 박필모, 박세후, 박태보의 묘가 나란히 있었다. 박세후, 윤씨부인의 묘비 뒷면에는 박세당이 쓴 묘표가 새겨져 있었다. 이 내용은 서계집 14권 '셋째 형 처사군의 묘표(第三兄處士君墓表)'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박세당의 묘가 웅대하게 양지 바른 곳에 있었고 왼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니 박세당의 큰 아들 박태유의 묘도 찾을 수 있었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장암역 앞에서 산 만두를 먹었는데 그렇게 추운줄 모르겠다. 내려 가려다가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들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오른쪽 뒤로 더 들어가니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올라가면 석림사로 향하는 길이어서 그 길을 따라갔다. 노강서원을 지나 석림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서계 박세당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계당의 일부인 궤산정과 박세당선생의 친필로 바위에 새긴 글들을 둘러보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