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죽유 오운(竹牖 吳澐)에 대한 소고(小考)

야촌(1) 2014. 6. 1. 19:43

竹牖 吳澐(죽유 오운) - 허사렴(호은공파)의 맏사위

 

죽유 오운은 허사렴(딸만 둘)의 맏사위이다.

창계 문경동(아들이 없음)이 맏사위 허찬에게 거대한 재산을 물러 주었듯이 맏사위로서 거대한 재산을 물려받았고, 고창오씨 집안을 일으킨 분이라 한다.

 

그리고 허권수(許捲洙) 경상대한문학 교수는 김해허씨로서 유계와 학계 모두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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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牖 吳澐에대한 小考

<경상대학교 한문학과교수 허권수>

 

차례

 

1.서론

2.생애

가.가계

나.행적

3.재지사족과의 관계

4.사우관계

5.학문과 시문

6.임진왜란 때의 활약상

7.결론

 

1.서론.

 

조선중기에 영남에서는 거유(巨儒)인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이 나왔다. 두 사람은 독자적인 학풍으로 제자들을 교육하여, 그문하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남명의 제자가운데에는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을 한사람이 많았다.

 

남명의 제자로서 의병활동을 한 사람가운데 죽유 오운(竹牖 吳澐)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양문에 모두 출입하여 두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두 문하의 제자들과 폭넓은 교유(交遊)를 가질수 있었다.

 

오운은 증조 때부터 함안에 세거해 오면서 혼인을 통하여 경상도 일원의 강력한 재지사족들과 유대를 맺었다.

이는 뒷날 곽재우가 의병활동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인물인 오운(吳澐)에 데해서. 그의 가계, 재지사족과의 관계, 행적, 학문과 시문 등을 고찰해 보고 나아가 임진왜란 때 그의 활약상을 밝혀 보고자한다. 지금까지의 임란에 관계된 인물의 연구가 너무 한사람 중심인물에 편중되어 왔던 것을 지양하여, 임란관계 연구의 시야를 넓이 는데 이러한 연구가 도움이 되었으면한다.

 

2. 생애

 

가.가계

죽유 오운은 자는 대원, 호는 죽유. 죽계. 백암노인 ,本貫은 고창(高敞)이다. 시조는 고려 때 한림학사를 지낸 학린 이고 고려 중기에 동각학사를 지낸 복양 오세문은 그의 10대조가 된다.

 

강좌칠현의 한사람인 오세재의 형이 오세공의 아우인데, 삼형제 모두 문장의 대가로서 당시의 이름을 날렸다.

집안 대대로 유학을 업으로 삼아 왔다.

 

조선조에 들어와 6대조 오육화가 예의 판서를 지내면서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 살았다.

증조 석복이 의령현감을 지내고서 고령인 관계로 인근 고을인 함안의 모곡 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함안은 부인 김씨의 외향이 였기 때문이고, 아들 오언의는 문과에 급제하여 전의 현감을 지냈는데, 퇴계의 숙부인 송제 이우의 사위로 함안지방의 비중 있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부친 오수정은 일찍부터 병이 있어 벼슬에 진출하거나 학문을 하지는 못하고 조행(操行)에 힘쓰며 가정에서 지냈다.

모친은 취우정 안관의 따님인데, 안관은 고려말기의 근제 안축의 후손으로 막 서울에서 낙향하여,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넓혀가고 있던 시기였다. 안관은 또 오운의 처숙부 허윤엽과 동서관계였다.

 

나. 행적

오운은 1540년 함안 모곡리에서 태어났다. 6세때 조부에게서 처음으로 수학 하였는데 문재가 탁월하였다.

18세때 생원 허사염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다. 허사염은 의령에 세거하던 사족으로서 많은 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퇴계의 맏 처남으로서 퇴계를 따라 배웠고,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 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허사염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오운은 그 맏사위로서 많은 전장을 과 집을 상속받았다.

이때부터 의령현 가례에도 집이 있게 되었는데, 그의 일호인 백암은 처가가 있는 가례 마을에서 연유한 것이다.

퇴계의 처남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퇴계의 처질서가 된다.

 

19세때 김해 산해정으로 남명 조식을 찾아뵙고서 제자가 되었다.

남명은 이때 삼가(三嘉) 토동에 주용정. 계복당을 짓고서 강학하고 있던시기였는데 , 젊은 시절 강학하던 곳인 산해정에도 가끔 왕래하고 있었다. 오운은 이 이후로 김해나 삼가로 남명을 찾아가 수학을 하였다.

 

22세때 생원에 합격하였고, 25세때 는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찾아뵙고 제자가 되었다.

27세때 별시문과 병과 제 7인으로 합격하여, 권지성균관 학유에 제수되었다.

서애 류성룡. 개암 김우굉 등 당시의 명현들과 동방급제 하였다.

 

31세 때까지 벼슬하여 학록까지 승진했다가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해 있는 동안에 퇴계 남명의 상(喪)을 차례로 만났고, 이어 조모 이씨 상(喪)과 부친상(喪)을 만나 37세때 까지 상중에 있었다. 복을 마치자 조정의 부름에 호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옮겼다.

 

겨울에는 명천현감으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 봄에 퇴직되어 돌아와 의령에 우거하였다.

의령은 처 향이자 퇴계의 처 향으로 퇴계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고, 산수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그는 백암대를 쌓고서 참된 신수의 정취를 얻어 즐겼다.

 

41(1580)세때 다시 성균관 전적으로 나아가 정선군수를 거쳐 충주목사 겸 춘추편수관 에 제수되었다.

이때 그는 팔봉서원을 세워 음애 이우. 관수 이연경을 향사하였다.

 

지방장관으로 나가서 서원을 세워 성현을 향사하고 후진을 교육하는 운동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 퇴계였는데, 오 운도 그 스승 퇴계의 영향을 받아 서원 창설운동을 적극적으로 이어 받았던 것이었다.

 

45세 되던 해에 외증조부인 송제 이우의 시집인 송제시집을 간행하였다.

송제의 시 원고를 퇴계가 편집하여 친필로 정사(淨寫)하여 두었는데, 오운이 이때 봉록을 출연하여 간행하였다.

 

이해 겨울에 파면되어 의령으로 돌아왔다. 이때 충주목에는 감사일가와 관련된 송사가 있었는데 여러 전임목사들이 판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운이 이일을 원칙되로 처리하다가 감사의 뜻을 거슬리어 파면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함안 의령 두 곳을 오가면서 함안 군수로부터 부임한 한강 정구와 함께 함주지를 편찬하였는데, 이책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지방지이다. 49세 되던 해에 성균관사성에 제수되었다가 그 이듬해 공주목사로 나갔다.

 

2년 만에 파면되어 돌아왔는데, 그가 이처럼 파면을 당한 것은 정의를 지켜 시속에 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은 남명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1592년 의령 집에서 임진왜란을 만났다. 여러고을이 와해되고 고을 원들은 모두 도망가 버려, 왜적들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처 들어 왔다. 이에 망우당 곽제우와 함께 창의하여 낙동강이나 남강을 거슬러 오르는 왜적을 무찔렀다.

이 때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온 김성일 중도에 서 영접하자,

 

김성일은 오운을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으도록 했다. 이때 오운은 개인적으로는 , 증조부 이래로 살아오던 집은 전란으로 패허가 되었고 집안에 전래해 오던 문적은 한자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조상의 산소도 왜적의 손에 도굴이 되었다.

 

다행이 숙부 오수영이 예안에 살고 있었으므로 얼마간의 문적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 다음해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얼마있지 않아 병으로 사퇴하고서 영주 초곡으로 돌아왔다.

영주 초곡은 본래 허사염의 부친인 진사 허찬의 처가인사성 문경공이 살던 곳이었다.

 

문경공은 많은 전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으므로 맏사위인 허찬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거기서 살게 되어, 의령과 영주 두 곳에 집이 있게 되었다. 오운의 장인 허사염은 허찬의 맏아들로서 의령과 영주에 있는 집과 전장으을 물려받았다.

 

허사염도 아들이 없었으므로 맏사위인 오운이 많은 재산을 물려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지방은 전화에 휩 사이게 되었으므로 , 오운의 가족들은 비교적 안전한 영주에서 살았다. 이때 영주에 살면서 임진 계사년에 있었던 전쟁 상황을 정리하여 용사난이록(유실됨)을 저술하였다.

 

56세(1595)되던해에 협천 군수로 부임하였다. 전란으로 잔폐해진 고을을 복구하고 백성들을 위무하고 완전한 고을로 만들었다. 이해 4월에는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그는 사재를 인정받았으므로 외직에 있으면서도 늘 사관을 겸임하였다.

 

60세(1599)되던 때 장예원 판결사로서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소를올리고 함안으로 돌아와 선영을 개수하였다.

그의 증조 이하 3대의 산소가 함안에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적들이 발총을 해버렸다.

 

오운은 당시 나라일이 급하므로 대충수습 하였다가 이때 완전히 개수하였다.

61세 되던 해에는 토계문집 간행에 참여하여 퇴계연보를 교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문집고성제에도 참여하여 여러 동문들과 함께 강론하였다.

 

69세 때 정주부윤으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72세 때는 주자문록을 완성하였다.

주자의 다른 문체의 글들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운은 주자의 글 가운데서 봉사.소차.잡저. 서기 등의 문체가운데서, 후학들에게 절실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글들을 절선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67세때 편찬하였던 동사찬요를 75세때 개찬하여 완성하였다.

이는 단군조선에서 고려말 까지의 우리나라의 역대사였다. 77세 되던 해에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다.

 

앞서 여러차례 제수된 관직에 부임하지 않아 임금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려워 부임했는데, 광해조에 들어와 처음으로 부임한 관직이었다. 대북파가 정권을 오로지 하던 광해조에는 그는 영주에서 은거하면서 주로 저술과 유림의 일로 여생을 보냈다.

 

다음 해2월에 병을 얻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가 3월에 78세를 일기로 죽었다.

광해군의 예관을 보내어 부의를 내리고 치제하였다.

 

오운은 27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적에 50여년 동안 올라 있었지만 최종의 직위인 부사는 44세 때 제수 된 목사보다 더 낮았다. 이렇게 환로가 순탄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사환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점과 그의 성격이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은 점 때문이었다.

 

3.재지사족과의 관계 앞에서 밣였듯이 ,그의 증조부 오석복이 의령현감에서 물러나 함안에 정착하면서 경상우도의 사족이 되었고, 또 그의 조부 오언의가 퇴계의 숙부인 송제 이우의 사위가 됨에 따라, 경상좌도 지방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갖는 가문이 되었다.

 

그의 부친 오수정은 함안의 사족 안관의 사위가 되었고 오운 자신은 의령의 사족인 허사염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맏아들 오여은은 주세봉의 아들인 주박의 사위가 되었고 , 둘째아들 오여벌은 김성일의 아들 김집의 사위가 되어섰고, 셋째 아들 오여영은 점필제 김종직의 현손인 김성율의 사위이다.

 

그의 사위는 생육신 조여의 5대손인 군수 조형도이다. 그도 화왕산성의 곽제우의 휘하에서 싸웠다.

그의 손자 익환은 사인 문홍달의 사위이고, 익황은 대사연 권태일의 사위이고, 손녀는 그의 가까운 처족인 허종무의 부인이다.

 

그의 매부는 고려 말부터 함안에 세거하던 재령이씨 집안의 판결사 이대형으로서, 임란초 김해성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이처럼 오운의 가문은 경상도 지역의 함안. 의령. 칠원. 고령. 합천. 안동. 예안등과 혼인을 통한 유대관계는 임진왜란 때 그가 창의하는데 크게 원동력 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홍의장군 곽재우를 위시하여, 그 휘하에서 활약하던 17 의병장가운데 수병장 오운, 전군향. 허언심. 치병기 강연용등이 오운의 처가와 인척 관계를 맺고 있고, 화왕산성 전투에서 활약하던 허도라는 사람도 오운의 처족이자 그의 손서이다.

 

이런 관계에서 볼때 , 오운이 곽제우를 도와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여 의병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한데는 , 오운자신의 가문과 처가를 통한 재지사족과의 강력한 유대가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4.사우관계

 

오운은 19세때 남명을, 24세때 퇴계를 찾아 뵙고서 제자가 되었다. 본디 퇴계는 할머니의 사촌동생이자 처고모부 였으므로 어릴적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퇴계의 영향을 먼저 받았다고 할수있겠다.

 

그는 퇴계를 존모하여, 그도덕과 문장은 태산북두와 같고 이세상에 모범이 된다, 주자 이후로 “제일인자다” 라고 하였다. 특히 퇴계에 대해서는 제자이기 이전에 친척으로서 인간적인 관계가 더 두터웠다.

 

그래서 퇴계 사후, 퇴계의 초취부인의 묘갈명인 퇴계선생 배 정경부인 허씨 묘갈명과 진성이씨 족보서를 퇴계의 손자 동암 이영도의 부탁을 들어 지었다. 퇴계, 남명 양문을 출입한 제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시간적 차이를 두고 양문에 동시에 출입하여, 두 선생이 타계할 때 까지 계속 출입하였으므로 두 선생의 훈도를 가장 많이 받은 샘이다. 그래서 광해군의 사제문에서 이른바, 도학은 퇴계를 존모하고 학문은 남명을 종주로 삼았다.

 

「도모퇴도 학숭산해(道慕退陶,學崇山海)」라는말에서 그의 학문적인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사위이자 제자인 조형도는,“남명의 마루에 오르고 퇴계의 방에 들어갔다.(승상해당, 입퇴계실)”라고 하여 그의 학문 수준이 퇴계.남명에 가까이 접근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양문을 출입하여 퇴계에게 받은 영향으로는, 과거로 진출하여 벼슬에나갔으면서도 물러나기를 좋아하였고, 저술을 좋아하였다는 점이다. 남명에게 받은 영향으로는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아, 자주 파직을 당했고, 사환에서 현달하지 못했다는 점과. 왜적의 침입에 분연히 창의하였다는 점이다.

 

양문을 출입하는동안 문하의 많은 인사들과 가까이 사귀었는데, 대표적인 벗과 그관계는 다음과 같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 문하의 동문우인데, 김성일이초유사로서 임명되어 왔을때 그의 막하에서 소모관으로서 그를 도왔다. 1593년 4월 김성일의 진주에서 병몰하자. 조종도, 이로, 박성 등과 염습을 하고서 지리산에 가매장하는 등 의리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아들 오여벌은 김성일의 아들 김집의 사위이다. 오운은 임란직후인 1600년에「서김학봉용사사적후(書金鶴峯龍蛇事蹟後)」라는 글을 지어 송암 이로가 지은 용사일기에 실린 학봉관계 기사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한강 정구는 양문을 같이 출입한 친구인데 , 오운이 고향에서 살 때 정구가 함안 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때 그는 산관으로서 향교의 재독관으로 있으면서 학문을 장려하였고. 함께 사직단을 중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함께 함주지를 엮었다.

 

서애 유성룡은 퇴계 문하의 동문이면서도 동방 급제하였다. 그리고「퇴계문집」을 편찬 하는 일에 함께 종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사 3수를 지어 그의 국가를 위한 큰 충절과 정주의 도통을 이은 학문을 칭송하였다.

 

또 류성룡은 김성일의 행적을 전할 문자를 지을 것을 요청한 오운 의 편지에 , “자기는 바야흐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므로 김성일에게 누를 끼치게 된 다라고 완곡히 거절하는 답을 보낸 적이 있었다.

 

류성룡이 오운의 동사찬요를 얻어 보고서 선조에게 추천하자, 선조는 이 책을 ,유림에 표준이 되는 책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초야에 물러나 있던 류성룡이 사찬 사서를 자진해서 임금에게 올린이유는 , 당시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가 점점 세력을 형성하고 퇴계 계열의 인사들이 배척당하던 시기였으므로 , 퇴계학파의 학문적 우수성을 선조에게 인식 시키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소고 박승인은 퇴계 문하의 동문이면서 손아래 동서인 박 혼의 아버지이다.

같이 영주에 살면서 절친했다. 박승임이 죽은뒤 오운은 그의 문집인 숙호집을 교정했다.

 

망우당 곽제우는 남명 문하의 후배인데, 임란 때 같이 창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또 인척 관계로는 곽제우는 오운의 처 종고종이 된다.

 

이밖에도 창석 이준 , 우복 정경세. 동악 이안눌 등은 후배이면서도 절친하게 지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처럼, 그는 당시 조정에서나 영남에서 영향력이 큰 인사들과의 교류가 많았다.

 

5.학문과 시문

 

그는 토계, 남명 양문을 출입하였지만, 학문적으로는 토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급은 죽유전집에서, “주용정에서 출발하여 암소현에서 졸업 하였다” 라고 그의 학문역정을 요약하였다.

 

학문의 시작은 남명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퇴계에게서 마무리를 지었다는 것이다.

두 선생의 영향을 받은 바탕위에서 그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적 성추를 얻었다.

 

그 결과 그는 주로 사학. 주자학, 문학에 관심이 많아 각 분야의 저서를 남겼다.

사학 분야에 있어서는 , 우리나라 역사서인 「동사찬요」를 저술하였다.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을 참고하여 , 단군부터 고려 공양왕까지 1449년에 걸친 기전체사서를 저술하였다.

동사찬요를 저술하게된 동기는 다음 네가지로 요약 될 수 있겠다.

 

첫째 우리나라사람들은 대개 우리나라역사에 관심이 없고 또 잘모르기 때문에 이런 풍토를 시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둘째 옛사실을 밣혀 현재의 일을 해석하는데 거울을 삼으려는 것이다. 셋째 각각의 인물들을 명신관 반아(叛兒)으로 선악에 기준하여 구분하고 권선징악 하려는 데 있다.

 

넷째 당시 까지 나와 있던 여러사서의 병통을 시정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 사관은 공자의 춘추나 주자의 강목등의 유가사서에 바탕을 두었다.

다만 그가 참고한 서적이 주로 동인 측의 자료에 국한되어 있다는 결점이 없지 않다.

 

당시 우리나라 주변정세는 임진왜란을 겪은지 얼마안된 시점에서 명나라가 기울고 신흥 청나라가 발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적 자주심을 길러주고, 오랑케인 왜나 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필요에서, 오운은 이책을 저술하게 된 것이다.

 

이 책 가운데서 유일한 지(志)인 지리지는 고대 인문지리서로서 가치가 크다.

삼국사기지리지가 신라위주로 편찬된 것을 탈피하여, 삼국을 각각 독립적으로 지리지를 편찬하여 당시의 지명을 그대로 군현명의 표제로 내세우고, 경덕왕때 고친지명에 대해서는 주(注)로 처리하였다.

 

이는 고구려 때의 광대한 요동을 우리영토로 보는 민족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삼국사기. 지리지 에 실리지 않은 지명에 대해서는 고려사 지리지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오운은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게 할수 있는 방법을 ,주자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광해군에게 주자대전의 진강을 건의하는 상소를 하기도했고, 자신은 주자학에 경도되어 깊이 연구하였고, 늙어서도 개을리 하지 않았다.

 

주자의 글은 후세의 학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고, 그 가운데 소차에는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경론이 더욱 많이 들어있다고 오운은 생각하였다. 주자의 서간은 퇴계가 절선한 주자서 절요가 있어 학자들이 쉽게 얻어 보고 주자학의 정수에 접근 할 수 있지만, 나머지 봉사, 진차. 잡저. 서. 기 등의 글은 워낙 방대하여 학자들이 쉽게 접근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주자대전을 쉽게 구해 볼 수 없었으므로, 서간을 제외한 주자문장의 선집을 만들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이런 사업은 그가 후세를 보급하는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오운은 이렇게 주자학에 심취하고 주자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 그 보급에 힘썼지마는, 당시 학계를 풍미하던, 성리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는 임진왜란을 직접 겪으면서 성리학이 국가 민족의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인식했던 것이다.

 

그 대신 주자학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를 바로하는 현실 문제에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오운의 문집인 죽유집은 그의 후손사중이 영주,예안 등지에서 널리 수집하여 그의 수고 율계 난고와 합쳐 문집을 만들고, 연보와 부록을 붙여 3책으로 1885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청신. 준영(준영: 우수하다, 맛이좋다)하고 온 온. 심원하여 소식과 황정견에 대적 할만 했다.

문장은 간결, 고아하여 한유, 류종원에 가까웠다.

 

6.임진왜란 때의 활약상

 

오운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당시에는 산관으로 있었는데. 이 이전에 정3품직인 광주목사를 역임한 전직관료였다.

그리고 경상도일원의 재지사족들과의 혼인을 통한 강력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임란 발발 이후 최초로 창의했던 곽제우가 감사김수와 병사 조대곤에게 토적으로 몰려, 휘하의 병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곽제우도 어떻게 할 수 없어 한때 모든 일을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으려고 하였다.

 

이 때 곽제우는 오운이 살고 있는 가례마을을 지나다가 오운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오운은 곽제우가 창의한 일을 칭찬하면서 같이 일할 것을 약속했다.

자기의 전마와 날쌘 노비 7.8명을 내주었다.

 

또 인근마을의 사우들에게 권유하여 장정들을 내게하여 곽제우를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자신은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아, 곽제우가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까지만해도 곽제우는 양촌의 일개 서생에 불과했지만 ,오운은 이미 3품관을 지냈고, 나이도 12살 위이며 처가로 쳐서 곽제우에게 매형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곽재우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 자신은 그 휘하의 수병장으로서 곽재우를 도왔다. 여기에서 그가 국가대사를 위한 겸허한 자세를 볼 수 있다.

 

학봉김성일이 경상도 초유사로 부임해 왔을때, 그는 이지역의 사족들과 유대를 갖고 있지못했고, 또 이지역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다. 퇴계. 남명 양문에 다 출입한 오운은 김성일과 이지역의 지리와 제반 사정을 안내해 주어 초유사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활약했다.

 

1594년 군공으로 합천군수에 임명되어서는 군사를 규합하여 많은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웠다.

도원수 권률이 그의 공을 임금에게 장계하여 가자 되였다.

 

그리고 고을원으로서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을을 잘 복구하였다.

1598년 명나라 수군감독 진린의 접반사가 되어 호남 해안 지방에서 활약하면서 대명외교에 공헌하였다.

이 밖에도 오운이 임진왜란때 많은 공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가 지은 임란관계 기록인 「용사란이록」등의 문헌이 일실되어 그의 활약상은 별로 밝혀지지 않아 주목받지 못했다.

 

7. 결 론

 

죽유 오운은 함안에 세거하면서 혼인을 통하여 강력한 재지사족들과 유대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 관계는 뒷날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의병활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오운이 이러한 사족 들과의 유대관계를 활용하여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유사 김성일을 도와 이 지역 사족들과 연계를 시켜주고, 이지역의 지리적 상황을 안내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특히 낙동강 남을 통해서 침입하는 왜적이 북상하거나 서진하지 못하도록 하여 왜적의 전세를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드는데 공헌하였다. 오운은 어릴 시절부터 퇴계. 남명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두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퇴계에게서는 학문하는 자세와 저술하는 방법을 배웠다. 문과출신이 지만 ,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늘 초야에 물러나 학문을 즐기며 저술에 힘쓴 것은 퇴계의 영향이라고 할수있겠다.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고 시세에 영합 하지 않은 점이나, 임란때 국가민족을 위해서 창의한 일 등은 남명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학문적으로는 주자학 .사학. 문학 방면에 관심이 있었는데, 특히 주자학에 경도 되었다.

그는 정치를 올바르게 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길을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임금에게 주자대전의 진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또 주자학에의 접근을 쉽게 하기위하여 주자의 문장을 절선하여 주자문록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자의 성리설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는데, 이는 그가 성리학이 국가민족의 현실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기전체사서인 동사찬요를 지어 당시까지 나와 있던 여러 사시의 잘못된 제례를 바로잡고, 우리나라역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지리지에서 고구려 강역에 대한 관심은, 민족적 자존심의 발로라고 볼수있다.

 

오운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오랫동안 사적에 있었지만 중앙의 현 요직에는 있지 못했으므로 관찬사서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집안에 전해 오던 자료도 가화(家禍)를 겪는 바람에 많이 없어졌다.

 

이런 관계로 그는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이면서도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연구가 거의 없었다.

앞으로 그의 시문(詩文)이나 저서인 주자문록, 동사찬요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망된다.

 

<모양보록 502페이지.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허권수(許捲洙) 논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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