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홍익한(洪翼漢)

야촌(1) 2014. 7. 6. 13:33

홍익한(洪翼漢)

[생졸년] : 1586(선조 1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3학사(學士)의 한 사람이다. 찬성 숙(淑)의 현손이며, 관찰사 서주(叙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애(磑)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백부인 교위(校尉)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다.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1년(광해군 13) 알성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罷榜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함.)되었다.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사서(司書)를 거쳐, 1635년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제호(帝號)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상소하였다. 마침내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 난으로 두 아들과 사위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아내와 며느리도 적에게 붙들리자 자결하였다.

이 때문에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듬 해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청군(淸軍)의 화를 피해 평양부서윤으로 나갔다.

 

그러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그는 청장 용골대(龍骨大)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했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처형 장소나 매장처도 확실치 않아, 그가 평소에 타던 안마와 의금(衣衾)만을 수습해 경기도 평택 서쪽 경정리에 장사지냈다. 1653년 도승지가 추증되고, 1686년 이조판서와 충정(忠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 뒤 1705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경기도 평택시 팽성면 본정리로 이장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영천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 평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花浦集≫·≪북행록 北行錄≫·≪서정록 西征錄≫이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송자대전(宋子大全)』

『명배신고(明陪臣考)』

『병자일록(丙子日錄)』

『일사기문(逸史奇聞)』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77)

 

자료 : 민족문화대백과

 

 

 

 

↑소재지 :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本井里) 302번지

 

 

 

↑홍익한선생 묘비각

 

묘역에 있는 비각인 포의각은 1726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 안에 보존된 신도비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었다고 하나 마멸되어 내용을 알기 어렵다. 현재 비문 2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모두 화강암 재질에 뚜껑돌이 놓여 있다.

 

묘는 원래 함정리(咸井里)에 있었으나 1942년 현재 위치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묘비 등의 석물은 그대로 둔 채 묘만 이장시켜 흙과 풀 속에 덮여 있던 것을 1964년 비각을 지어 안치하였다.

 

 

 

 

↑홍익한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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