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신진 사림에 탄핵·언론권 주며 시대의 금기와 맞서다.

■신진 사림에 탄핵·언론권 주며 시대의 금기와 맞서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5호| 20100228 입력 역사는 모든 시대적 금기가 언젠가는 깨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금기는 혼자만의 단독행동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금기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과 이를 실천할 조직이 등장해 깨트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세조 시대에 만들어진 시대적 금기에 도전하는 세력이 재야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사림이라 불리는 신진 정치세력이었다. ↑예림서원 김종직은 훈구 공신들에 맞서는 사림이란 신진 정치세력을 최초로 형성했다. 김종직을 배향하고 있는 예림서원. 경남 밀양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 ④홍문관 설치 ▲남효온의 육신전 현덕왕후 권씨의 복위를 주장했던 남효온은 훗날..

대비 윤씨「권력남용」벽서 나붙자 권력이양 결심.

■ 대비 윤씨 「권력남용」 벽서 나붙자 권력이양 결심.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4호| 20100220 입력 한 체제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패했더라도 당위성만으로 그 체제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과 그 이념을 실천할 세력이 존재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세조 때 비대해진 공신집단을 대체하려면 왕권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왕권을 보좌하며 공신집단과 맞서 싸울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재야에서 그런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절반의 성공 성종 ③승정원 벽서 사건 ▲성종 어진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공신집단보다 왕권이 미약한 현정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때를 기다렸다. 성종 즉위 초는 공신들의 천국이었다. 성종 1년(1470) 1월 11일 한명회와 신숙주는 분경(..

권력은 공신들 손에 … 열두 살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 권력은 공신들 손에...열두 살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이덕일 |제153호| 20100212 입력 절반의 성공: 성종 ② 귀성군 제거 사건 현실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 못지않게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 때가 아닌데도 섣불리 나섰다가 불행한 종말을 맞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갓 즉위한 성종은 어리지만 ‘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실이 공신집단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성종은 공신집단에 맞서는 대신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 또한 정치의 일부라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터득했던 것이다. ↑압구정 한명회는 속세에 뜻이 없음을 표하기 위해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었으나 훗날 많은 문인들의 조롱을 받았 다. 예종의 급서에 의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종 즉위년(14..

계찰(季札) - 吳나라의 공자.

■ 계찰(季札 : BC 585년경) - 吳나라의 공자. 태백(太伯 : 고공단보의 아들)이 오나라를 세우고 14대 군주가 수몽인데, 수몽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다. 그중 막내아들인 계찰(季札)이 돈후(敦厚)하고 총명(聰明)했다. 수몽은 계찰을 후계자(後繼者)로 삼으려 했으나 계찰이 극구(極口) 반대했다. 별 수 없어 장자(長子)인 제번에게 물려주었는데 제번이 아버지 복상(服喪)을 치르고 나서는, 계찰에게 자리를 물려주려했으며 백성들도 계찰이 계승(繼承)하기를 바랐다. 계찰은 장남이 계승(繼承)해야 한다며 한사코 반대하고 들에 나가 농사를 지으니 더 강요(强要)하지 못했다. 뒤를 이은 여제가 계찰을 사절단(使節團)으로 하여 중원각국을 巡訪하도록 했다. 먼저 노(魯)나라로 갔는데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춤과 노..

오자서(伍子胥) - 吳나라의 大夫

■오자서(伍子胥 : BC 559? - 484)/吳나라의 大夫 ↑오자서(伍子胥) 이름은 원(員), 자서(子胥)는 그의 자(字)이다. 초(楚)나라의 대부를 지낸 오사(吳奢)의 둘째 아들이다. BC 522년(楚平王 7)에 오사가 살해되자, 그는 송(宋)나라와 정(鄭)나라를 거쳐 오나라로 들어갔다. 나중에 합려(闔閭)를 도와 오왕 요(僚)를 죽이고 왕위를 탈취했다. 그뒤 군대를 정비하여 국세가 날로 번성해갔다. 얼마 후 초를 함락시킨 공으로 신(申)땅에 봉해져 신서(申胥)로 불렸다. 합려가 죽은 뒤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부차(夫差)에게 월(越)의 화친 요구를 거절하고, 제(齊)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진언했다가 왕의 분노를 샀으며, 나중에 자결하라는 왕명을 받고 죽었다.

안자(晏子) -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정치가.

■ 안자(晏子), BC578~BC 500. -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정치가. ↑안자(晏子) 중국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영(嬰). 자는 평중(平仲) 관중(管仲)과 함께 훌륭한 재상(宰相)으로 이름을 떨쳤다. BC 556년 아버지 안환자(晏桓子)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제나라의 대부(大夫)가 되었다.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을 섬겼으며, 근검절약하고 힘써 노력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최서가 장공을 살해했을 때 장공의 시체 위에 엎드려 곡(哭)을 했지만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 BC 517년 혜성이 나타나 두려워 떨고 있는 경공(景公)에게 사치를 삼가고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가볍게 하면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간(忠諫)했다. 이..

정자산(鄭子産) - 춘추시대 鄭나라의 宰相

■정자산(鄭 子産 : BC 585~523) - 춘추시대 鄭나라의 宰相. ↑정자산(鄭 子産)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교(僑). 정(鄭)나라 목공(穆公)의 손자요. 자국(子國)의 아들이다. BC 554년 정경(正卿)인 자공(子孔)이 내란으로 죽은 뒤 경(卿)이 되었다. BC 543년 백유(伯有)의 내란 이후 정경의 위치에서 난을 수습한 뒤, 죽을 때까지 정나라의 정치를 지배(支配)했다. 당시 정나라는 북방의 覇者인 晉과 남방의 패자(覇者)인 초(楚)사이에 끼여 고초(苦楚)를 겪었으나, 자산은 그의 박식과 웅변으로써 두 나라의 세력 균형을 이용하여 일시적인 평화를 누렸다. 진·초 두 나라에 대한 공납(貢納)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국내의 농지를 정리(定理)· 개척(開拓)하여 토지세(土地稅)를 징수함으로써 국..

기다렸다는 듯…예종 승하한 날에 성종 즉위식

■ 기다렸다는 듯....예종 승하한 날에 성종 즉위식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2호 | 20100207 입력 정치가는 냉철한 현실인식 위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직업이다. 예종은 공신 집단이 권력을 장악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추구하다가 역습을 당했다. 반면 뜻하지 않게 왕이 된 어린 성종은 현실을 거스르면서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 없었다. 예종이 왕위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면 성종은 공신들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큰 차이였다. ↑경기도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 정희왕후 윤씨는 장손 월산군을 제치고 한명회의 사위 자산군을 예종의 후사로 결정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 ① 밀실 담합 부왕 세조로부터 공신 집단이란 부채를 물려..

“옥새를 세손에게…” 새 군주의 시대 열리다.

■ “옥새를 세손에게...” 새 군주의 시대 열리다. 절반의 성공 영조⑩ 마지막 遺詔 [이덕일] 제151호 | 20100131 입력 지도자가 후세에 기여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좋은 후계자의 선택이다. 영조는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사도세자를 죽임으로써 노론 일당독재 체제를 수립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아들마저 제거하려는 노론의 당론을 거부하고 세손(정조)을 즉위시켰다. 이로써 경종독살설을 비롯해 각종 부정적 사건으로 얼룩졌던 재위 시의 오점 가운데 상당 부분을 씻어낼 수 있었다. ①원릉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②정순왕후 생가 효종이 김홍욱에게 내려준 집인데, 김홍욱은 소현세자 부인의 신원을 주장하다. 사형당했다(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

열다섯살 계비가 왕실 ‘불행의 씨앗’ 될 줄이야.

■ 열다섯살 계비가 왕실 ‘불행의 씨앗’ 될 줄이야.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50호 | 20100124 입력 왕조국가나 대통령제 국가의 큰 문제는 외척이나 측근의 발호 가능성이었다. 영조는 말로는 외척의 전횡을 비판했으나 행동으로는 이들을 정국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또 말로는 탕평책을 주창했지만 행동으로는 소론을 대거 쫓아내 탕평책을 붕괴시켰다. 말과 행동이 달랐던 영조의 이중적 정치 행보는 고스란히 국가적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절반의 성공 영조 ⑨두 외척의 대립 ▲홍봉한 초상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은 세자 사후에 동정론으로 돌아서서 노론 벽파의 비판을 받았 다. 소론의 정견을 갖고 있던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가 그를 보호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