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언어 혁명→생활 혁명, 쉬운 법률 용어로 백성을 구하다.

■ 언어 혁명→생활 혁명, 쉬운 법률 용어로 백성을 구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7호]2010.05.23 입력 언어는 그 민족의 거울이다. 세종은 말과 글이 다른 언어생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소리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인간의 구강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언어정책으로 훈민정음의 발음체계가 크게 제한되면서 특정 발음을 못하는 절름발이 언어가 되었다. 훈민정음의 창제정신으로 우리말을 돌아봐야 할 때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⑨훈민정음 창제정신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표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온 천하에 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인 세종 27년(1445..

당대 최고 언어학자 세종, 말과 글의 혁명 이끌다.

■ 당대 최고 언어학자 세종, 말과 글의 혁명 이끌다. 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6호] 20100516 입력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문화 수준이 낮으면 강국이 될 수 없다. 일시적으로는 세상을 지배할지 모르지만 곧 높은 문화에 의해 녹아내리게 마련인 것이다. 세종은 외교정책상으로는 중국에 사대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독자성을 추구했다. 금속활자를 만들고 아악(雅樂)을 정비했다. 무엇보다 훈민정음을 직접 만들어 백성들의 언어생활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⑧훈민정음 창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하고 이를 토대로 용비어천가를 제작하게 해서 조선의 무궁한 번성을 기리게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세종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훈민정음(訓民正音) ..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택하다.

■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 문화 르네상스와 국력 신장을 이루다. 이덕일의 事思史 | 세종, 신분보다 능력을 택하다 [제165호] 20100509 입력 입지전적 인물이 많이 출현하고 그런 인물이 대접받는 사회가 희망 있는 사회다. 태종·세종이 정점인 조선 전기는 능력만 있으면 천인(賤人)이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역동적인 사회였고 이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만인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대한민국에서는 과연 능력이 학벌이나 연줄보다 우선되는지 600년 전의 시대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⑦ 천인 등용 앙부일귀 세종은 천인 장영실을 명나라에 유학까지 보내면서 과학기술을 익혀 오도록 했다.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귀는 전하지 않는다. 사진은 후대에 만든 앙부일귀의 모습이다..

통합의 리더십, 왕비 집안 무너트린 신하까지 껴안다.

이덕일] 제164호 | 20100502 입력 작성일 : 2010. 11. 03 통합의 리더십, 왕비 집안 무너트린 신하까지 껴안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⑥ 용인술 인재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보면 한 조직이나 국가의 현 상태와 미래를 진단할 수 있다. 세종은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취하는 방식으로 인재를 활용했다. 심지어 자신을 모욕하거나 반대했던 사람들까지도 중용해 높은 관직을 주었다. 세종은 정치보복을 단절시키는 화해의 정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능력을 국가 발전에 활용하는 동참의 정치로 승화시켰다. ↑황희 초상. 황희는 세자 양녕의 비리를 비호하다가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당했다. 하지만 세종은 그를 중용해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재상으로 만들었다. 사진가 권태균 인재를 중시한 세종은 과거 자신..

明 신뢰 얻으며 실리 외교, 북방영토 확장 결실

■ 明나라 신뢰 얻으며 실리 외교, 북방영토 확장 결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2호] 20100418 입력 흔히 외교는 평화적 수단이고 군사는 전쟁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양자는 모두 국제정치의 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세종은 국제무대에서 목소리의 크기는 실력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명나라에 사대해 국체를 보존하는 한편 신뢰를 획득해 북방 강역 확대에 나설 수 있었다. 실리를 중시하는 외교가 세종 외교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종이 취한 명과의 사대 외교는 다양한 포석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④ 사대교린 조선 외교정책의 기본원..

기득권층 반발에 從母法 복원, 노비제 확대 ‘시대 역행’

■ 기득권층 반발에 從母法 복원, 노비제 확대 ‘시대 역행’ 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1호] 20100410 입력 왕조시대의 국왕은 의민(依民=by the people)보다는 위민(爲民=for the people)을 추구했고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또한 사대부 계급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 때문에 ‘수령고소금지법’처럼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중시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해가 직결된 문제는 일반 백성들의 의사도 중시하는 선진적 측면을 갖고 있었다. ↑경직도(耕織圖) 노비들이 탈곡하고 지붕을 잇는 것을 노비 주인이 손자를 데리고 구경하는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부분, 작자 미상)하고 있다. 세종은 태종이 제정한 종부법을 종모법으로 환원했다. 사진가 ..

책에서 찾은 聖君의 길, 지식경영의 시대를 열다.

■ 책에서 찾은 聖君의 길, 지식경영의 시대를 열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60호 | 2010.04.04 입력 세종은 지식경영자였다.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축적된 지식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세종은 공리공론보다는 역사처럼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산 지식’을 선호했다. 그리고 독서를 여가가 아니라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도 세종처럼 방대한 독서와 사색을 통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하는 인물일 것이다. 경복궁 경회루 앞 수정전. 그 앞에 집현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현전 초석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석재를 감싸고 있던 사진 속 나무는 2년 전까지 서 있었으나 최근 ‘정비’라는 이름으로 베어졌다. 언제까지 ‘정비’ 라는 명목으로 유적 파괴가 계속..

오기(吳起,BC440년∼BC381년)

■ 오기(吳起 : BC440∼BC381) 손자병법(孫子兵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자(吳子)의 저자(著者). 법가(法家). 정치가(政治家)임. 원래 위(衛)나라 사람이었는데 노(魯)나라에 가서 관직생활을 했다.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치자 오기(吳起)를 장수로 임명하려다 오기의 처(妻)가 제(齊)나라 출신이라 임명을 주저(躊躇)하니까 처(妻)를 죽이고 장수가 되었다. 노나라에서 자기를 비판(批判)하는 소문을 듣고 주저(躊躇)나라가 인재(人才)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위나라로 와서 장수가 되어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대승(大勝)을 거둔다. 오기는 병졸과 의식을 같이하고 병사(兵士)가 종기가 있으면 직접 입으로 빨아[옹지치(癰之痔)] 치료하는등 병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싸움터에서 용기(勇氣)를 진작(振作)시..

이회(李悝) : BC455 - BC395)/文侯,

■이회(李悝)-중국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재상/法家의 祖 ↑이회(李悝) ↑이회 묘(李悝 墓) 국시대 초기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재상으로 법가사상을 토대로 개혁을 추진하여 위나라의 부강에 공헌한 정치가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 : BC 507~BC 420?]는 이회(李悝) 정치의 특징은 첫째 신분, 관직의 높고 낮음을 떠나 신상필벌(信賞必罰)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농업 생산력향상에 힘쓰고 농산물 가격을 조절하고 경쟁력 강화와 안정을 꾀했다. 또 다른 공적으로는 법경(法經) 6편을 만들어 법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법경(法經)은 상(商)이 진(秦 : 진나라(秦,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에 전했고 한(漢)의 구장률(九章律)로 이어졌다. 이리하여 법률(法律)은 이회(李悝)에게..

문후(文侯) -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군주이다.

■ 문후(文侯) -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군주. ↑위문후 석상(魏文侯 石像) ↑위문후 상(魏文侯 像)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군주(재위 BC 445∼BC 396). 위환자(魏桓子)의 손자. 초(楚)를 저지, 중원제국 주도권을 장악했다. 관료에 의한 집권적 통치 완성하고, 중국 성문법의 기본을 정했다. 개명군주로 유명하다. 그를 위사(魏斯/魏都)라고도 불리우는데 . 조(趙). 한(韓)과 함께 진(晉)의 가장 유력한 귀족 지백(知伯)을 멸하고 진을3분하는 데, 기초를 세운 위환자(魏桓子)의 손자이다. 일설에는 아들이라고도 한다. 조부의 업을 이어받아, 신흥국가 진(秦)의 동진을 황허강[黃河]에서 방어하고, 조(趙). 한(韓)을 설득하여 동방의 강국 제(齊)의 내란에 간섭하였다. 남으로 초(楚)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