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기다렸다는 듯…예종 승하한 날에 성종 즉위식

야촌(1) 2010. 9. 19. 06:20

■ 기다렸다는 듯....예종 승하한 날에 성종 즉위식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2호 | 20100207 입력

 

정치가는 냉철한 현실인식 위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직업이다. 

예종은 공신 집단이 권력을 장악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추구하다가 역습을 당했다. 

 

반면 뜻하지 않게 왕이 된 어린 성종은 현실을 거스르면서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 없었다. 

예종이 왕위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면 성종은 공신들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큰 차이였다.

 

 

 ↑경기도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 정희왕후 윤씨는 장손 월산군을 제치고

     한명회의 사위 자산군을 예종의 후사로 결정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

① 밀실 담합

 

부왕 세조로부터 공신 집단이란 부채를 물려받은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공신들의 특권을 타파한 정상적인 왕조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예종은 즉위 초부터 분경 금지, 대납 금지, 면책특권 제한 등 공신들을 겨냥한 각종 개혁 조치를 쏟아 냈다. 공신들의 불법·전횡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신왕의 개혁 정치에 환호를 보냈다.

 

▲정인지가 몽유도 원도에 쓴 발문.
    정희왕후의 사위였던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는 성종을 추대한 공으로 좌리 1등 공신에 책봉됐다.

 

예종의 개혁 정치는 방향은 옳았지만 공신들의 권력이 왕권을 능가한다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어서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급서한 것은 반발의 강도를 말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급서하기 전날에도 예종은 여진족 추장 낭장가로(浪將家老)가 예조 정랑 신숙정(申叔楨)을 구타한 사건을 처리했다.  다음날 예종이 죽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예종은 재위 1년(1469) 11월 28일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사망했다. 그 날짜 『예종실록』은 “신숙주·한명회·구치관·최항·조석문과 영의정 홍윤성, 좌의정 윤자운, 우의정 김국광 등이 승정원에 모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는 예종의 사망 사실이 공표되기 전으로 좌의정 윤자운을 제외하고 모두 원상(院相)들이었다.원상이란 세조가 죽기 1년 전인 재위 13년(1467)에 백옹(白翁)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업무를 보게 한 것이 시초인데, 나중에 9명으로 늘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공신들이 승정원 업무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승정원에 모이기 전에 『예종실록』은 ‘승지 및 전·현직 정승과 의정부·육조의 당상관이 (예종에게) 문안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들 중 여덟 명만 선별적으로 승정원에 모인 것이었다. 무언가 다른 경로의 연락을 받고 모였음을 뜻한다. 

 

이들이 사알(司謁:내시)에 의해 사정전(思政殿)으로 안내된 직후 승전(承傳) 환관 안중경(安仲敬)이 울면서 “성상께서 훙(薨)하셨다”고 예종의 죽음을 알렸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망원정. 효령 대군의 별장으로 지어져 희우정(喜雨亭)이라고 불렀으나, 훗날 성종의 친형

     월산군의 별장이 되면서 망원정이라고 불렀다. -사진가 권태균-

 

『예종실록』은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재상들도 실성(失聲)하며 통곡하였다”고 전하지만 형식에 불과했다. 

신숙주는 곧 “국가의 큰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主喪)은 불가불 일찍 결정해야 한다”고 차기 임금 결정 문제를 거론했다. 차기 국왕 결정의 열쇠는 세조 비 정희 왕후 윤씨가 쥐고 있었다. 

 

『예종실록』은 이때 정희 왕후의 사위 ‘정현조(鄭顯祖)가 들어가 직접 아뢴 다음 서너 번 왕복하면서 출납(出納)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가 태비 윤씨와 여덟 명의 대신들 사이의 의견 조정 창구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 후 태비 정희 왕후 윤씨가 강녕전(康寧殿) 동북쪽 편방(便房)에 나타나자 신숙주는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未寧)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고 말했다. 정희 왕후도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朝覲:아침 문안)하였으므로, 내가 ‘병이 중하면 어찌 이렇게 하겠느냐?’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예종의 죽음이 뜻밖이란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뜻밖의 죽음에 놀라지 않았다. 

정희 왕후는 사위 정현조와 도승지 권감(權<744A>)을 시켜 대신들에게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라고 물어 이미 관심사는 예종의 후사임을 나타냈다. 대신들은 “원컨대 전교를 듣고자 합니다”고 정희 왕후에게 발표를 미뤘고 정희 왕후는 사위 정현조를 통해 차기 국왕을 발표했다.

 

“이제 원자(元子)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月山君)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 

자을산군(者乙山君=자산군)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께서 일찍이 그 기국과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에 비했으니 그를 주상(主喪)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말과 동시에 큰 소동이 벌어져야 했다. 

 

그러나 이는 윤씨와 대신들 사이의 합의 사안을 발표한 것에 불과했다. 

원래는 예종의 장자 제안 대군이나 세조의 장손 월산군이 후사가 돼야 했다. 

세 살짜리 제안 대군이 불가하다면 고(故) 의경 세자의 장남이자 세조의 장손인 열다섯의 월산군이 돼야 했다.

 

그러나 예종의 장남도, 세조의 장손도 아닌 열두 살짜리 자을산군이 지명된 것이었다. 

뜻밖의 조치였으나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진실로 마땅합니다(允當)”고 찬동했다. 

그러더니 신숙주는 “외간(外間)은 보고 듣는 것(視聽)이 번거로우니, 사정전 뒤뜰로 나가 일을 의논하고자 합니다”고 청했다. 사관(史官)의 붓을 피해 뒤뜰로 나가 후속 조처를 의논하겠다는 말이었다.

 

정희 왕후는 월산군이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고 말했지만 세조 10년(1464) 월산군은 임금과 사장(射場)에 가서 활을 쏜 기록이 있고, 세조 12년(1466)에도 세자였던 예종과 동교(東郊)에서 사냥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거짓이었다. 

 

세조가 자을산군을 더 사랑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세조는 장손 월산군의 혼인 행차 때는 사복시(司僕寺) 담 밑에 높은 비루(飛樓)를 만들어 정희 왕후와 함께 구경했으나 자을산군의 혼인 때는 그러지 않았다. 세조가 자을산군을 태조와 비교했다는 말도 『세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다가 100년 정도 후대의 인물인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등에 나올 뿐이다.

 

월산군과 자을산군의 운명을 가른 것은 장인들이었다. 월산군의 장인 박중선은 신공신인 적개공신 출신으로,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구공신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구공신은 신공신 세력의 사위를 왕으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신숙주가 사관의 눈을 피해 뒤뜰에 나가 후속 대책을 논의했던 것 자체가 무리한 후사 책봉임을 말해 준다.

 

후속 대책은 무엇이었을까? 도승지 권감은 대신들과 의논한 뒤 “당일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해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계달했다. 문종은 세종 사후 엿새 후, 단종은 문종 사후 나흘 후 즉위했는데 성종은 당일 즉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관의 눈을 피해 결정한 후속 조치의 핵심이었다. 

성종의 즉위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놓아야 했을 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국왕의 즉위식은 간단한 절차가 아니었다. 

뜻밖에 급서한 예종의 장례식 준비만 해도 조정은 날벼락 맞은 것처럼 경황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승정원에 모인 대신들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후속 절차를 진행했다. 

하지만 자을산군을 모셔 오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다. 

 

『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자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자산군(者山君)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다.

 

조정에서 국왕으로 결정됐음을 통보하기 전 자신이 국왕으로 결정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궁중 세력의 대표인 정희 왕후와 공신 세력의 대표인 한명회·신숙주·정인지 사이의 사전 합의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예종이 죽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당일 아침 승정원에 모였고, 정희 왕후와 새 국왕에 대해 의논하고 새 국왕 즉위 절차를 주도했다. 그래서 얼마 전만 해도 국왕이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자산군이 예종 사망 당일 신시(申時:오후 3~5시)에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즉위한 성종은 재위 2년(1471) 3월, 75명의 좌리(佐理:임금이 되는 것을 도움) 공신을 책봉해 보답했다. 

성종이 좌리 공신 책봉을 명하자 사헌부에서 “금번의 좌리 공신은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면서 “만약 태조·태종 때라면 공신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종의 태평한 조정에서는 공신이 없었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공을 보답하려고 하십니까?”라고 거듭 반대했다. 

성종은 “대역복(大歷服:왕위)을 이어서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 공이 없겠는가?”라고 솔직히 자신을 즉위시킨 공로라고 고백했다.

 

좌리 1등 공신9명은 신숙주·한명회·최항·홍윤성·조석문·윤자운·김국광·정현조·권감 등으로서 예종 사망 당일 승정원에 모였던 명단에 정희 왕후의 사위 정현조와 도승지 권감이 추가된 것이었다. 구치관만 2등 공신으로 떨어졌다. 

 

그는 공신 중 특이하게 청백리(淸白吏) 출신으로서 원래는 승정원에 모이는 명단에 없었는데, 우연히 만나 합류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종이 뒤늦게 좌리 공신을 책봉한 것은 공신들이 대가를 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종은 “우리 자성(慈聖) 대왕 대비께서 세조 대왕을 추념하시고 나 소자를 돌아보시고 이에 큰 책명(策命)을 정하시니, 내가 들어와 큰 왕업을 잇게 되었다”며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 준 데 대한 보답임을 분명히 했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성종은 조선의 진정한 권력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숙부 예종의 전철에서 서글픈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절반의 성공 성종① 밀실 담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