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정자산(鄭子産) - 춘추시대 鄭나라의 宰相

야촌(1) 2010. 9. 19. 06:42

■정자산(鄭 子産 : BC 585~523) - 춘추시대 鄭나라의 宰相.

 

↑정자산(鄭 子産)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교(僑). 정(鄭)나라 목공(穆公)의 손자요. 자국(子國)의 아들이다. BC 554년 정경(正卿)인 자공(子孔)이 내란으로 죽은 뒤 경(卿)이 되었다. BC 543년 백유(伯有)의 내란 이후 정경의 위치에서 난을 수습한 뒤, 죽을 때까지 정나라의 정치를 지배(支配)했다.


 당시 정나라는 북방의 覇者인 晉과 남방의 패자(覇者)인 초(楚)사이에 끼여 고초(苦楚)를 겪었으나, 자산은 그의 박식과 웅변으로써 두 나라의 세력 균형을 이용하여 일시적인 평화를 누렸다. 진·초 두 나라에 대한 공납(貢納)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국내의 농지를 정리(定理)· 개척(開拓)하여 토지세(土地稅)를 징수함으로써 국가경제(國家經濟)를 부흥(復興)시켰다.

 

또 국내 귀족(貴族)의 항쟁을 방지(防止)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을 만들고 중국 最初의 成文法을 완성했다. 그는 전통적인 봉건적 통치에 대하여 법치주의(法治主義)에 의한 통치(統治)를 실현했다. 자산은 유능한 정치가·외교가일 뿐만 아니라 합리주의적인 사상(思想)을 지니고 있었다.

 

종래의 구복(龜卜)과 무사(巫師)등을 통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서 탈피(脫皮)해 法을 토대(土臺)로 하여 합리주의적(合理主義的)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이 합리주의 사상은 이후 공자의 원시유교(原始儒敎)에서 주장(主張)한 인간 자각의 선구가 되었다.

 

자산이 정치, 통치술로 인용(引用)한 것은 관맹상제(寬猛相濟 : 너그러움과 엄격함의 調和)였다. 자산(子産)의 공적(功績)은 봉건시대(封建時代)의 지도자들에게 높이 평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