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대리청정 덫에 걸린 세자의 뜨거운 가슴.

■ 대리청정 덫에 걸린 세자의 뜨거운 가슴.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49호]20100116 입력 세자 대리청정은 제왕수업이란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지만 2인자로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즉위 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무인 기질의 세자는 속내를 감추고 있기에는 너무 가슴이 뜨거웠다. 세자는 섣불리 노론에 손을 댔고 노론은 세자 제거를 당론으로 정했다. 영조가 여기에 동조한 것이 비극의 본질이었다. 절반의 성공 영조 ⑧ 사도세자(下) ▲사도세자 영정 사도세자는 반(反) 노론의 정견을 표출하다가 영조와 노론의 합작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영조는 재위 25년(1749) 2월 16일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 나가 ‘오늘은 세자가 처음..

영조의 왕위이양 ‘쇼’ , 4살 세자는 석고대죄했다.

■ 영조의 왕위이양 ‘쇼’ , 4살 세자는 석고대죄했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8호] 20100109 입력 세자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당선자다. 다만 현재의 임금이 사망해야 즉위하기 때문에 즉위 날짜를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다를 뿐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세자는 시강원에서 왕도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자 역시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결정판이 사도세자다. ↑함춘원지의 함춘문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 사당을 창경궁 동쪽 후원 함춘원으로 이전하고 경모궁으로 개명 했다. 일제는 1924년 이 자리에 경성제대 의학부를 건설하면서 그 원형을 파괴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다. 함..

소론은 희망을 잃고, 임금은 이성을 잃었다.

■소론은 희망을 잃고, 임금은 이성을 잃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47호 | 20100102 입력 세상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경쟁할 때 발전하는데 정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반대세력을 말살하고 독존하려는 성향이 존재한다. 가끔 현실의 권력으로 반대세력을 말살하고 독존에 성공하는 정치세력이 나타났지만 그 결과는 반대세력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 전체까지 공멸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윤지의 벽서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은 토역경과사건과 맞물리면서 탕평책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독주 체제를 만들었다. 절반의 성공 영조 ⑥ 나주벽서사건 영조는 재위 17년(1741)의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자신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임인옥안』을..

화난 영조 “양반의 나라니 경들이 다스리시오”

■ 화난 영조 “양반의 나라니 경들이 다스리시오” [제146호] 20091227 입력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 말은 조선 후기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승자인 노론과 패자인 여타 당파에 관한 기록이 그런 것처럼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와 라이벌 희빈 장씨 이야기도 시종 승자인 최씨의 자리에서 기록되었다. 노론은 최씨를 우호적으로 묘사했지만 영조의 모친 추숭 작업에도 제동을 걸었다. 국왕의 생모라도 신분제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①숙빈 최씨의 소령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숙종 당시 묻힐 때는 소령묘였으나 영조 즉위 후 소령원으로 격상 되었다. ②육상궁 현판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곁에 있다. 영조는 즉위 후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승격 시켰는데 현판 은 아직도 육상묘인 것이 이채롭다. 이..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진 못했다.

■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진 못했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5호] 20091219 입력 군주가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궁극적 길은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군주는 백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는 제도개혁에 앞장서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앞장서 실천하는 유학 군주였으나 백성들은 물론 시대도 그런 개인적 실천보다는 잘못된 제도의 개혁을 요구했다. ↑박문수 초상 흔히 뛰어난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는 경주이씨 구천공 이세필(龜川公 李世弼)의 외손으로 이인좌의 봉기 토벌에 가담한 소론 온건파로서 고른 인재 등용과 군역제도 개혁에 앞장섰던 개혁정치가였다. ↑순무영진도 조선후기 군사들의 군진 모습을 그린 ..

과거사를 지우고 싶은 영조, 탕평을 제안하다.

■ 과거사를 지우고 싶은 영조, 탕평을 제안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4호] 20091213 입력 현재의 권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 행위의 결과물인 미래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까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神)의 영역이자 역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조의 왕세제 책봉 죽책문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에 책봉되고, 노론은 대리청정까지 주장했으나 이는 훗날 영조에게 두고 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절반의 성공 영조 ③신유대훈 소론 강경파(峻少)와 남인 일부가 이인좌를 중심으로 군사봉기까지..

결국 봉기한 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緩少가 있었다.

■ 결국 봉기한 준소(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완소(緩少)가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3호] 20091206 입력 사회 불안요소 해소의 최선의 방법은 불안요소를 정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6·25 때 농민들의 동조 봉기가 거의 없었던 것은 발발 직전 단행됐던 토지 개혁 덕분이었다. 영조도 재위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 온건파에 정권을 넘기는 것으로 소론의 불만을 수용했기에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되돌아봐야 할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무신(戊申) 봉기 영수’ 이인좌는 세종 대왕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전형적인 남인 명가 출신이었다. 절반의 성공 영조② 이인좌의 난 영조 4년(1728) 3월 15일 ..

‘난 경종의 충신’김일경은 뻣뻣했다.

■ ‘난 경종의 충신’ 김일경은 뻣뻣했다. 이덕일 [제142호] 20091129 입력 절반의 성공 영조 ①소론 강경파 숙청 격렬한 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하면 반대 당파의 재기를 막기 위한 정치 보복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치 보복은 권력 강화가 아니라 권력 약화의 길이었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를 인정하면서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타협과 화해를 통해 권력 강화의 길을 선택한 정치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세상을 떠났다. ↑연잉군의 세제 시절 초상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로 세제가 되고 왕위에 올랐지만 소론 강경파는 경종 독살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 를 거두지 ..

왕에게 毒을 먹이고도 수사망 빠져나간 궁인.

■ 왕에게 毒을 먹이고도 수사망 빠져나간 궁인.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1호] 20091122 입력 헌정 질서를 무시하는 세력이 권력 장악에 나서면 격렬한 투쟁이 발생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는 권력욕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주는 명분도 이미 사치이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집안에서는 선현(先賢)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학자들이 정치 현장에서는 시정잡배도 주저할 수단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유교 정치체제는 이렇게 붕괴의 길을 걸었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⑥ 세 가지 의혹 ▲경종의 초상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부터 서인(노론)의 격렬한 반감을 사다가 36세에 급서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무성했다. 초상화에 먹물이 스며든 것은 독살설을 암시한다. 경종의 초상은 전해지..

경종 시해 시나리오 ‘목호룡 고변’으로 발각.

■ 경종 시해 시나리오 ‘목호룡 고변’으로 발각.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0호] 20091115 입력 최소한의 공존의 틀마저 무너뜨리면 상대방만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다. 작용이 반작용을 부르는 것은 정치도 마찬가지다. 노론이 경종 제거를 당론으로 삼아 실행에 옮긴 것은 왕조국가에서 각 당파가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틀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이 무리한 처사에 격렬한 반발이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수많은 비극이 양산되었다. 왼쪽부터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초상. 노론 영수인 이들은 경종을 제거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던 노론 당론을 추진하다. 목호룡 고변 사건으로 모두 사형당했다. 영조가 즉위한 후 모두 복관되는데, 노 론 쪽에서는 이를 신축· 임인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