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찰(季札 : BC 585년경) - 吳나라의 공자.
태백(太伯 : 고공단보의 아들)이 오나라를 세우고 14대 군주가 수몽인데, 수몽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다.
그중 막내아들인 계찰(季札)이 돈후(敦厚)하고 총명(聰明)했다.
수몽은 계찰을 후계자(後繼者)로 삼으려 했으나 계찰이 극구(極口) 반대했다.
별 수 없어 장자(長子)인 제번에게 물려주었는데 제번이 아버지 복상(服喪)을 치르고 나서는, 계찰에게 자리를 물려주려했으며 백성들도 계찰이 계승(繼承)하기를 바랐다. 계찰은 장남이 계승(繼承)해야 한다며 한사코 반대하고 들에 나가 농사를 지으니 더 강요(强要)하지 못했다.
뒤를 이은 여제가 계찰을 사절단(使節團)으로 하여 중원각국을 巡訪하도록 했다.
먼저 노(魯)나라로 갔는데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춤과 노래를 감상(感賞)할수 있었다.
시경(詩經)의 풍아(風雅)송을 두루 감상하며 매우 정확한 코멘트를 했다.
계찰의 깊고 넓은 문학적 소양을 나타낼 수 있는 계기(契機)였다.
제(齊)나라로 가서 안영을 만나 정치에서 손을 떼고 대읍(封邑)을 국고에 반납(返納)하지 않으면 禍를 입을 것 이라는 忠告를 하여 안영이 권력(權力)다툼의 재앙(災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鄭)나라로 가서는 정자산을 만났고, 위(衛)나라, 진(晉)나라 등을 갔다.
계찰(季札)이 상국(上國)으로 사신가는 길에 서국(徐國)을 들르게 되었는데, 그 나라의 임금이 계찰의 칼을 매우 부러워하였다. 계찰은 칼을 주기로 마음속으로 작정하고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국을 들렀으나 임금은 이미 죽은 뒤였다. 계찰은 마음 속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임금의 묘(墓)에 칼을 걸어 놓고 왔다.
▲계찰(季札) ▲계찰(季札) ▲계찰반신상(季札半身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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