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열다섯살 계비가 왕실 ‘불행의 씨앗’ 될 줄이야.

야촌(1) 2010. 9. 19. 05:22

■ 열다섯살 계비가 왕실 ‘불행의 씨앗’ 될 줄이야.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50호 | 20100124 입력

 

왕조국가나 대통령제 국가의 큰 문제는 외척이나 측근의 발호 가능성이었다. 영조는 말로는 외척의 전횡을 비판했으나 행동으로는 이들을 정국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또 말로는 탕평책을 주창했지만 행동으로는 소론을 대거 쫓아내 탕평책을 붕괴시켰다. 말과 행동이 달랐던 영조의 이중적 정치 행보는 고스란히 국가적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절반의 성공 영조

⑨두 외척의 대립

 

▲홍봉한 초상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은 세자 사후에 동정론으로 돌아서서 노론 벽파의 비판
을 받았

   다.

 

소론의 정견을 갖고 있던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가 그를 보호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후 탕평책은 재만 남고 조정은 노론 일색으로 채워졌다. 


영조 48년(1772) 3월 이조판서 정존겸(鄭存謙)과 이조참의 이명식(李命植)이 성균관 대사성 후보 세 명을 모두 노론 청명당(淸名黨)으로 주의(注擬: 후보로 의망함)한 사건은 노론 일당의 정치지형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대사성 후보로 주의된 조정(趙晸)·김종수(金鍾秀)·서명천(徐命天)은 모두 후보에 처음 오른 신통(新通)인데다 셋 모두 일망(一望: 1위 후보자)으로 올려졌다. 대개 한 명을 일망으로, 한 명을 신통으로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더 큰 문제는 셋 모두 노론 청명당(淸名黨) 소속이란 점이었다. 


청명당은 노론 이천보(李天輔), 유척기(兪拓基) 등이 만든 것으로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는 소론이 참여하는 탕평책에 반대하고 노론 일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는 속셈에 불과했다. 

세 후보자를 모두 자당(自黨) 소속으로 주의한 것은 사실상 국왕의 인사권을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영조는 이조판서와 참의는 물론 배후의 영의정 김치인(金致仁)까지 유배 보내 청명당을 해체시켰다.

 

영조는 약원(藥院)에서 올리는 탕제(湯劑)를 거부하다가 사태 와중에 병조판서로 임명한 채제공(蔡濟恭)이 올리자 “지금 사람들이 노인 김치인에게 붙좇고 있는데, 경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내가 마시겠다”며 마셨다.

 

영조는 약원(藥院)에서 올리는 탕제(湯劑)를 거부하다가 사태 와중에 병조판서로 임명한 채제공(蔡濟恭)이 올리자 “지금 사람들이 노인 김치인에게 붙좇고 있는데, 경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내가 마시겠다”며 마셨다.

 

 

이천보 초상
    이천보가 만든 노론 청명당은 소론을 배제하고 노론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청명이라고 생각했다.

 

채제공은 조정에 남은 거의 유일한 남인이었다.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전제 체제를 만든 결과 국왕의 인사권까지 위협받게 된 것이 노론 청명당 사건이었다. 
 
사도세자 사후 조정은 크게 두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게 된 홍봉한 지지의 부홍파(扶洪派)와 홍봉한을 공격하는 공홍파(攻洪派)가 그것이다. 
 
노론 벽파인 공홍파는 청명당과 정순왕후의 친정이 주요한 두 축이었다. 예순여섯의 영조는 재위 35년(1759) 6월 22일 오시(午時: 11~1시)에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아래인 김한구(金漢耉)의 열다섯짜리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아들과 손자까지 있는 영조가 왜 쉰한 살이나 어린 소녀에게 새 장가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소녀는 3년 후 영조의 아들(사도세자)을 죽이는 데 가담하고, 그후에도 손자(은언군)와 손자며느리(송씨)를 비롯해 수많은 남인들과 천주교도들을 학살하게 된다.

낙방거사였던 김한구는 영조의 사돈이 된 그해 12월, 일약 종2품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오르고 아들 김귀주도 여동생 덕분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와 국왕의 처남이라는 지위를 배경으로 권력을 다투었다.
홍씨, 김씨 두 외척 가문은 사도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세자가 사라진 빈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청명당 사건으로 공홍파의 한 축이 무너지자 조급함을 느낀 김귀주가 영조 48년(1772) 7월 홍봉한을 강력히 공격하며 일으킨 것이 ‘나삼(羅蔘)·송다(松茶) 사건’이었다.

 
“연전에 재상 홍봉한이 외방(外方: 지방)에서 구매하던 삼(蔘)을 경공(京貢: 서울 공인들이 납품하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공인배(貢人輩)들이 실처럼 가는 미삼(尾蔘)을 모아 풀로 붙여 삼이란 이름으로 내국(內局: 내의원)에 바쳤습니다.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66세의 영조가 왕비로 맞아들인 15세의 정순왕후는 조선 후기 정국에 큰 파란을 몰고왔다. 사진가 권태균

 

혹 내국에서 퇴짜를 놓으려고 하면 홍봉한이 큰 소리로 ‘이는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라고 꾸짖어 위로는 제거(提擧: 내의원 책임자)에서부터 아래로는 의관까지 마음으로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입으로 감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영조실록』 48년 7월 21일).”
 
홍봉한이 지방의 인삼 구매선을 서울의 공인들로 바꾸면서 이들과 짜고 싸구려 인삼을 납품했다는 비난이었다. 김귀주는 영조가 6년 전인 재위 42년(1766) 병석에 누웠을 때 자신의 부친 김한구는 좋은 나삼(羅蔘)을 쓰려 했으나 홍봉한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주장했다.3년 전(영조 45년)에 사망한 부친 김한구가 생전에 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이 근거였다. 


홍봉한이 ‘나삼은 조달하기 어렵다’고 말하자 부친(김한구)이 ‘일단 약원(藥院: 내의원)에 있는 나삼을 쓰면서 각도에 나삼을 바치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으나, 홍봉한이 ‘대감은 척리(戚里: 외척)로서 어찌 약원의 일에 간섭을 하시오?’라고 발끈 성을 냈다는 것이었다.

김귀주는 김한구가 동삼(童蔘) 한 뿌리를 구해 달여 올리자 영조의 병이 나아서 “부자가 서로 마주하여 춤을 출 듯이 기뻐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조의 다리가 아파 고생할 때 전 참의 홍성(洪晟)의 노부(老父)가 송다(松茶)를 마시고 효험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홍봉한에게 송다를 올리라고 권했으나 모른 체했다고 주장했다. 

김귀주는 김한구가 이 일을 말할 때면 “가슴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참으려 했으나 감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영조가 아플 때 김귀주의 부친 김한구는 정성을 다한 충신이지만 홍봉한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두 외척 가문이 정국의 중심에 서자 나삼(羅蔘)·미삼(尾蔘) 같은 저급한 이야기들이 정쟁의 소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공격한 진짜 이유는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김귀주는 “아! 임오년의 일(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바로 성상께서 종사를 위해서 하신 대처분으로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시어 해와 별처럼 빛나니, 신하로 있는 자 그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조의 뜻을 받들어 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던 홍봉한이 세월이 조금 흐르자 그 뜻을 바꾸어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여 종묘에 들이자는 의논을 만들었다”고 공격했다. 

 

김귀주는 “신하 된 자에게 이런 범죄가 있으면 하루라도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어야 한다”면서 홍봉한을 사형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김귀주는 홍봉한이 흉적(凶賊)이란 사실을 “전하께서는 막막하게 깨닫지 못하신다”고 영조까지 비난했다. 그에 앞서 김귀주의 사촌동생인 홍문관 수찬 김관주가 홍봉한을 극렬하게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정순왕후 친정의 조직적인 공세였다. 

 

이날 비가 퍼붓고 벼락·천둥이 쳤는데 영조는 김귀주와 김관주의 상소를 모두 돌려주라고 명한 후 “내가 이 두 상소로 기관(機關)을 삼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말했다. ‘기관’ 운운은 사주당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영조는 우산도 없이 문소전(文昭殿)으로 가서 선왕들에게 울부짖었다.

 

“선후를 가릴 것 없이 척신(戚臣)이 함께 날뛰어 이처럼 놀랍고 괴이한 일을 저질렀으니, 종국(宗國)이 반드시 위망하게 되었습니다(『영조실록』 48년 7월 21일).” 영조는 “한 근의 나삼으로 기운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말이나 송다를 마셨더니 걸음 걷기가 좋아졌다는 말은 한번 웃어야 할 말이다”라면서 창의궁(彰義宮)으로 환어해 김귀주를 사판(仕版)에서 지우라고 명한 후 이렇게 말했다.

 

“두 집안은 형세가 양립할 수 없어서 홍씨 집안을 폐하면 달가워할 것이니 어찌 음덕이 되겠는가? 

내가 김귀주의 사람됨을 염려했는데 과연 그렇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곤전(坤殿: 정순왕후)과 충자(<51B2>子: 세손)뿐인데, 이런 거조를 당했으니 내전(內殿: 왕비)의 심사가 더욱 어떻겠는가?(『영조실록』 48년 7월 23일)”

 

외척의 발호가 걱정되면 태종같이 외척을 숙청하거나 새 장가를 가지 않았어야 될 일이었지만 낙방거사인 외척들을 끌어들인 인물은 영조 자신이었다. 더구나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정순왕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내전의 심사’를 염려한 인물도 영조였다. ‘나삼 사건’은 김귀주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지만 공홍파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공세의 초점은 홍봉한이 사도세자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는 데 있었다.

 

영조 47년(1771) 8월에는 유생 한유(韓鍮)가 홍봉한의 머리를 베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에 ‘홍봉한이 일물을 바쳤다(獻一物)’는 구절이 있었다. 일물(一物) 또는 목기(木器)는 세자가 죽은 뒤주를 뜻하는데 영조는 “상소의 ‘일물’ 두 자는 나도 모르게 뼛속이 서늘해진다”면서 “저가 비록 ‘홍봉한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영조실록』 47년 8월 7일)”라고 말했다. 뒤주를 바친 인물이 홍봉한이란 사실을 인정한 말이었다.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아들마저 죽인 엽기적 정치 보복이 영조의 업보로 돌아오는 셈이었다. 더구나 세자를 죽인 거대한 정치 세력은 이제 그의 아들 세손(世孫: 정조)에게까지 향하고 있었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열다섯 살 계비가 왕실 ‘불행의 씨앗’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