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대리청정 요구 노론에 소론 중용으로 ‘반격의 칼’

■ 대리청정 요구 노론에 소론 중용으로 ‘반격의 칼’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9호] 20091108 입력 노론이 경종 축출과 연잉군 추대의 당론을 정한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이 국왕을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곧 역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론은 강한 당세를 믿고 이런 당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권이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젊은 국왕을 공개적으로 내쫓으려는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김일경 단소(壇所:시신 없이 고인을 기리는 특별한 장소). 경북 예천군 감천면 내성천 근처에 있다. 김일경은 노론 4대신을 4흉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면서 사형당하게 된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④ 신축환국 노론이 한밤의..

33세 임금을 굴복시킨 ‘한밤의 날치기’

■ 33세 임금을 굴복시킨 ‘한밤의 날치기’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8호 | 20091031 입력] 과정과 결과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면 결과의 정당성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 노론은 ‘경종 축출과 연잉군(영조)’이라는 당론을 결정했는데 노론의 당력은 그만큼 막강했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몰아내고 특정 인물을 추대하려는 구상은 심한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정권에 눈이 먼 노론은 이를 강행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내에 있다. 왼쪽으로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능이 보인다. 인원왕후는 원래 소론가였으나 남편을 따라 노론을 지지했다.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한다는 인원왕후의 수찰을 받아 쿠데타의..

힘없는 국왕 앞에 드리운 어머니 장희빈의 그림자

■ 힘없는 국왕 앞에 드리운 어머니 장희빈의 그림자.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7호 | 20091024 입력] 헌정 질서를 부인하는 세력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많은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경종은 세자 대리청정을 거쳐 국왕이 되었지만 집권 노론은 경종을 부인했다. 노론에 경종은 자신들이 죽인 모친 장희빈과 한 몸이었다. 화해의 정치 대신 증오의 정치, 한때 국모였던 여인을 죽인 과거사가 현실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불행한 상황이었다. ↑연행도 중 조양문 조선 사신들이 베이징 조양문을 향하고 있다. 이이명은 사신으로 가면서 6만냥 을 가져가 청나라 관리들을 매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②허수아비 임급 숙종이 세상을 떠나기 한 ..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

[이덕일 ㅣ제136호 | 20091018 입력] ■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①숙종-이이명 독대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元子)가 되거나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 된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노론은 이런 헌정 질서를 부인하고 자당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노론 영수 이이명의 초상. 이이명은 숙종43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신도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이명(李頤命)이 집필한 소재집(疎齋集). 숙종 43년(1717) 7월 19일. 전염병이..

급서 미리 안 듯, 일사천리로 구체제 복귀.

급서 미리 안 듯, 일사천리로 구체제 복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35호 | 20091010 입력] 국왕 독살 여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후 체제를 살펴봐야 한다. 거대 정파와 대립하던 국왕이 급서하는 것으로 갈등이 해소되고 거대 정파가 권력을 독차지할 경우 독살설의 신빙성은 높아진다.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탄생한 공신집단들은 예종이 자신들의 특권을 제한하려 하자 크게 반발했다. 예종과 공신집단 간의 갈등은 예종의 급서로 해소되고 구체제로 회귀했다. ↑예종의 창릉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다. 계비 안순 왕후 한씨(한백륜의 딸)와 합장묘다. 원부인이었던 장순 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생존했다면 예종도 더 오래 왕위에 있었을지 모른다.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④ 거대한 음모예종이 분경(奔競>..

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의 운명은

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의 운명은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4호 | 20091001 입력] 개혁은 당위성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명분뿐만 아니라 개혁 대상의 저항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고 있어야 성공하는 것이다. 예종은 공신 집단의 해체라는 분명한 개혁 목표와 실천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현실적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제거한 결정적 하자였다.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 ② 개혁 능력의 한계 ▲신숙주의 영정 이상(理想)을 택한 사육신에 비해 현실을 택한 신숙주의 여유롭고 부귀한 모습이 잘 드러난 영정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조선시대 내내 사육신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공..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린 ‘남이의 죽음’

■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린 ‘남이의 죽음’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33호 | 20090926 입력]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에게 공신은 필요악이었다. 재위 후반 세조는 신(新)공신, 구(舊)공신과 삼각 축을 형성했다. 세조는 공신들과 권력을 나눌 수밖에 없는 숙명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종은 이를 거부했다. 예종은 신구 공신을 상호 견제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공신들을 직접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이 남이의 옥 사였다. 남이 장군 부부 묘와, 남이 장군 초상, 남이 장군 부부 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왼쪽 사진). 남이의 부인은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한 권람의 딸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 용산구 용문동 사당에 걸린..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2호 | 20090920 입력] 같은 쿠데타로 집권했지만태종과 세조는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태종은 공신집단을 해체해 깨끗한 조정을 세종에게 물려준 반면세조는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 집단을 그대로 예종에게 물려주었다. 예종은 이 공신 집단을 해체하지 않는 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예종이 왕 노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양자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육신 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응부의 시신을 몰래 이장하면서 조성되었다. 세자 예종은 공신들의 노리개로 떨어진 사 육신 가족들을 석방시켜야 세조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 ① ..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31호 | 20090913 입력] 정치가는 권력을 강화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권력 강화가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조선은 국왕의 권력이 강하면 사대부의 세력이 억제되면서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으나 숙종은 그렇지 못했다. 숙종은 조선 후기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군주지만권력을 백성들과 나눌 줄 몰랐던 실패한 군주이자 외로운 군주였다. ↑숙빈 최씨의 사당「육상궁」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데, 숙빈 최씨는 왕비 민씨와 결탁해 희빈 장씨를 압박 했다. 훗날 그의 아들이 임금(영조)으로 즉위한다. 三宗의 혈맥 숙종 ⑨후계 경쟁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탈환한 서인들이 남인들에 ..

미인계로 흥한 남인 미인계로 망하다.

■ 미인계로 흥한 남인미인계로 망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30호 | 20090906 입력] 신성한 왕권의 전제는 국왕이 하늘을 대신해 정치를 한다는 사실에 온 나라가 동의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국왕은 초월적인 위치에 서서 정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숙종은 개인의 애욕(愛慾)을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해 잦은 정권교체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왕권은 강화됐지만 국왕은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왕위에 앉은 필부(匹夫)로 전락했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명릉(明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도동에 있다. 서인을 대표했던 인현왕후 민씨와 남인을 대표했던 장씨의 다툼은 결국 민씨의 승리로 끝났음을 보여주는 무덤이 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 ⑧갑술환국 후궁 장씨가 인현왕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