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임금의 ‘서민 프렌들리’ … 숨죽인 신도시 반대 여론

■ 임금의 ‘서민 프렌들리’ ....숨죽인 신도시 반대 여론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6호| 20100725 입력 동양사회에서 국가 정책은 하늘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것이란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곧 민심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각이 명백히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백성들을 설득하고 백성들에게 구체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국가 권력이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⑧ 민심 확보책 정조는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선의 최정예 부대로 육성하려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정조가 화성 신도시를 착공한 재위 18년(1794)은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환갑을 맞는 해였다. 또한 ..

음지의 사도세자 양지로 … 정조의 조선 개조 시작되다.

작성일 : 2010. 11. 03 ■ 음지의 사도세자 양지로....정조의 조선 개조 시작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5호] 20100718 입력 국가 정책을 목적의 선함이나 당위성만으로 추진해서는 성공하기 쉽지 않다. 정책에 관계된 여러 세력의 이해를 조정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하고 무엇보다 민심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정책 추진 능력과 도덕성이 겸비된 세력이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추진해야 가능한 일이다. 정조의 사도세자 묘소 이전 과정은 이런 정책 수행의 전범을 보여준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릉.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불렀다.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높여졌다. 사도세자 책봉죽책문. 사도세자가 김가진에게 ..

“왕의 동생을 제거하라” 오빠 잃은 정순왕후 정조에 복수 칼 겨눠.

작성일 : 2010. 11. 03 ■ “왕의 동생을 제거하라” 오빠잃은 정순왕후 정조에 복수칼 겨눠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4호] 20100711 입력 아무리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돼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정치공세는 사익(私益)이나 당익(黨益)을 실현하기 위한 소모적 정쟁에 불과하다. 이런 정치공세는 구체성이 떨어지거나 과장돼 있기 일쑤다. 이런 정치공세를 현실화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정치공세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⑥ 왕대비의 반격 ▲장용영(壯勇營) 내부 평면도. 정조 23년(1799) 제작됐다. 정조는 이율·홍복영 역모사건에 구명겸이 연루된 의혹이 드러나자 새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만들..

서자 출신 지식인 등용으로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서다.

작성일 : 2010. 11. 03 ■ 서자 출신 지식인 등용으로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서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3호] 20100703 입력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특권과 능력의 대결 과정이기도 하다. 혈통·신분·학벌 같은 각종 카르텔의 성(城)에 능력은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특권 카르텔이 계속 승리하면 그 사회는 정체되고 능력이 승리하면 역동적으로 변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암적 요소가 학벌 카르텔이란 점에서 정조 때의 능력 중시 경험은 큰 교훈을 준다. ↑청나라 나양봉이 그린 박제가(朴齊家) 초상. 조선에서는 서자라고 천대받았던 박제가는 이미 청나라에 문명(文 名)이 알려져 있었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⑤ 북학파의 ‘도발’ 임란 때 백성들이 불을..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

작성일 : 2010. 11. 03 ■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 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2호] 20100626 입력 내세관이 없는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모든 보편적 종교와 공존이 가능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노론 유학자들은 유학(주자학)을 유교라는 유일사상의 종교로 만들었다. 노론 정권 유지의 이념이 된 유교는 다른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했다. 이런 유일사상의 나라 한 구석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자라고 있었다. ↑전주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당한 전주 풍남문에 세워졌다. 1891년에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착공해 6년 만에 준공했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④북경서 세례받은 이승훈 정조 7년(1783) 12..

우의정에 남인 채제공 발탁, 권력 재편 승부수

■ 우의정에 남인 채제공 발탁, 권력 재편 승부수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71호] 20100620 입력 이념적 지향성이 강한 정치집단은 배타적 권력독점을 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이념은 치열한 논쟁을 거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이 권력의 힘으로 성역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정치집단이 배타적 독점 권력을 장악할 경우 사회는 크게 퇴보하고 이런 상태를 해소하려는 정치개혁 요구가 거세지게 된다. ↑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앞 시사단(試士壇). 정조가 영남 남인들을 위해 도산서원에서 지방 별시를 실시한 것을 기념하려고 세운 비각이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③ 남인의 부상 정조 즉위 무렵 조정은 노론 일색이었다. 소론의 당론을 지지하던 사도세자를 뒤..

공민왕 16년(1367) 정미년 - 고려사

고려사 공민왕 16년(1367) 丁未 ●봄 정월 [정해일] 원나라에서 전 요양이문(遼陽理問) 쿠두테무르[忽都帖木兒]를 보내 영릉(永陵 : 충혜왕)에게는 터성선 충숭인병덕 협공인량공신(攄城宣忠崇仁秉德協恭寅亮功臣)의 칭호와 충혜(忠惠)라는 시호를, 명릉(明陵 : 충목왕)에게는 협성보리연덕선혜봉화보경공신(協誠輔理演德宣惠奉化保慶功臣)의 칭호와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총릉(聰陵 : 충정왕)에는 수성이정좌리익순보의적경공신(守誠履正佐理翊順保義迪慶功臣)의 칭호와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각각 추서했다. 충숙왕의 왕비 바얀쿠둑공주[伯顔忽都公主]1)에게는 숙공휘녕공주(肅恭徽寧公主), 공민왕의 왕비 부다시리[寶塔實里公主]에게는 노국휘익대장공주(魯國徽翼大長公主)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충혜왕비인 이린지발공주[亦憐眞班公主]2)..

노론이 보낸 자객, 왕의 침실 지붕 뚫고 암살 시도.

■ 노론이 보낸 자객, 왕의 침실 지붕 뚫고 암살 시도.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0호] 2010.06.12 입력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정치를 주도할 경우 정쟁은 극단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 경우 상대방이 집권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고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정치의 모든 타협이 거부되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되면서 정치 자체가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시는 경모당을 짓고 옥으로 만든 도장을 바쳤다. 노론에서는 정조를 압박 하기위해 이복동생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라고 주장했다. 사진은 헐리기 전의 경모궁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현재 서울대 의대 경내에 남아있는 경..

정치보복 악순환 끊고 새 시대 통합을 꾀하다

■ 정치보복 악순환 끊고 새 시대 통합을 꾀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9호 | 20100606 입력 한이 너무 많은 인물이 집권하면 ‘성공한 정치’를 하기 어렵다. 정치 보복의 유혹을 끊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한을 가지고 즉위했으나 과거로 돌아가 정치 보복에 나서지는 않았다.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소수 세력만 제거하고 나머지에게는 함께 미래로 가는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멀었다. ↑사도세자 사당 전남 무안군 남동리에 있는 사당이다. 마을 사람들의 꿈에 사도세자가 나타나 세웠다고 하는데 민간에서 세운 유일한 사당이다. 이때 영조가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受點權)을 세손에게 주고 또 대리청정까지 시키지 않았다면 국왕은 다른 인물이 되고 정조는 노론에 의해 죽..

3정승과 세자에게 권력 분산, 국정의 효율 극대화

■ 3정승과 세자에게 권력 분산, 국정의 효율 극대화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8호] 20100530 입력 국왕이 직접 모든 국사를 챙긴다는 뜻이 ‘만기친림(萬機親臨)’이다. 세종은 모든 국사에 성실했으나 여러 종류의 지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세종은 모든 국가기관이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북돋고 국가기관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을 주요한 일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왕권까지 과감하게 의정부 또는 세자와 나누었다. 왕권보다 중요한 것이 국사라는 생각에서였다. ↑영릉과 신도비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이장했는데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세종⑩ 시스템 통치 국..